157화. 달빛과 보름달 (3)
규격 외 강자는 그 자체로 전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강자들의 움직임이 발각되는 순간, 상대 입장에서도 첩보와 암약에 있어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가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급 강자 두 명이 랭스에 있다는 사실이 적들의 ‘눈과 귀’에 들어가는 순간, 신성 제국의 강자들은 결코 얌전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밤의 아버지가 직접 그들의 전력 전부를 끌고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다.
어느 시점부터, 모두가 이 기묘하기 그지없는 위화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점점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벗어나 ‘터무니없는 강함’을 손에 넣는 괴물들이 많아지고, 어느덧 세상의 저울추를 움직이는 것은 그들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있음을.
더 이상 섭리 속에 묶여 있는 인간 따위는, 설령 그 어떤 대군(大軍)을 가져온다 해도 의미가 없다.
아예 섭리 그 자체를 벗어나 버린 이형의 군세가 아니고서야.
아서왕의 레드 코트, 로젤리아 샤를이 거느린 귀족들, 이전부터 신성 제국이 자랑해온 천사까지.
과거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 이 세계의 흐름을 바뀌게 하고 있다.
마치 이 세상이, 점점 인간의 손에서 떠나가려는 듯이.
─그리고 보란 것처럼, 조니가 잡혀 있는 지하 감옥에 알기 쉬운 경비병 따위는 없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두 암살자가 기척을 숨길 필요조차 없이, 오히려 두 사람을 환영하는 것처럼 불길하게 뚫린 길을 나아갈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결코 아무런 믿는 구석 없이 사지(死地)로 향하는 게 아니다.
당장 이 순간, 수도 베네토에 있는 잭 더 리퍼가 그러하듯.
그들이 가진 정보망과 눈과 귀를 이용해 강자들의 위치를 특정하고, 그들이 지켜야 할 핵심 자산들에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듣고, 그 후 남겨져 있을 전력을 예상하고 ‘충분히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온 것이다.
싸우기 전에 싸움의 승패를 결정 짓는 것과 다름없는 첩보전.
그게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이자, 새로운 싸움의 방식이다.
“어서 오세요.”
문제는, 상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승산을 헤아리며, 그저 담담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을 맞이하는 그들이.
피로 이어진 두 모녀(母女)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을 지키는 몇 명의 고위 뱀파이어들과 함께.
피의 어머니, 미망공 스칼렛.
밤과 피의 여왕, 로젤리아 샤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검고 어두운 석벽 속에서 타오르는 어스름을 뒤로하고,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뱀파이어들이 전부가 아니다.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紋章)을 새겨넣은 인간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누군가에게 있어 전부나 다름없는 가족.
“설마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그 후계자가 함께 행차할 줄이야, 다소 의외네요.”
로젤리아가 짐짓 놀라운 듯이 말을 잇는다.
“그러나 그 정도는, 충분히 상정 이내랍니다.”
이 정도로 그녀가 그럴싸하게 세운 계획은 틀어지지 않는다.
“당신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로젤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 당신들의 전부를 위해 희생된 이들 역시, 우리의 전부란 사실을 기억해야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그런데 너희들의 소중한 것보다, 우리들의 소중한 것이 좀 더 소중하거든.”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 방식.
촤아악!
로젤리아의 날개가 펼쳐졌다. 칠흑의 실크처럼 검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날개, 심지어 갓 세례를 마쳤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기와 자태를 뽐내며─ ‘피의 어머니’를 잇는 어엿한 뱀파이어 클랜의 후계자로서 전력을 내뿜었다.
그곳에 있는 피의 어머니, 시엔의 손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진정으로 ‘미망공’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뱀파이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함께 침묵하고 있던 쌍두까마귀의 가족 역시 묵묵히 검을 빼들었다.
밴시 린처럼 두 눈동자를 순백의 붕대로 휘감고 있는 청년이었다.
「검귀(Sword Wraith)」 에리히 슈트로하임.
‘강자가 세 명.’
그것도 하나하나가 결코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쪽 역시, 충분히 상정 이내였다.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들이 힘을 합친 이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고 실망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아니니까.
그저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이다.
““영야(永夜).””
누구랄 것도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이트워커 가문 1식의 극의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상징하는 최강의 기술.
가주였던 자와 새로운 가주, 그들 두 모자가 펼치는 ‘영원의 밤’이 일대를 휘감았다.
마치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끝없는 밤의 세계처럼.
““혈야(血夜).””
그리고 별과 단검의 주인 앞에서, 밤과 피의 주인들이 입을 열었다.
끝나지 않는 검고 어두운 밤은 결코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유물이 아니란 듯이.
검고 어두운 밤 위로 진홍색의 물감을 타듯, 핏빛이 퍼져나갔다.
저마다의 등 뒤로, 얼핏 비슷해 보이면서도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세계를 드리운 채.
진정한 밤의 주인을 가리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시엔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빙륜검 · 루나 피에나.
동시에 라일라 역시 창백한 서슬을 흩뿌리는 월광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그녀의 거미허물 드레스 자락을 나부꼈다.
달빛의 폭격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더불어,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혈우(血雨).
로젤리아가 칠흑의 실크처럼 검고 부드러운 날개를 펼치고, 옷자락을 찢듯 날개가 찢어지며 별개의 생물처럼 시엔을 향해 쇄도했다.
촤아악!
그러나 쇄도하는 로젤리아의 날개 위로, 죽음의 거미줄이 휘감기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라일라가 펼치는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그녀의 보조와 동시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시엔을 향해서가 아니다. 시엔을 지켜주려는 라일라를 향해서다.
그렇기에 시엔이 땅을 박차며 그곳에서 휘몰아치는 일검(一劍)을 튕겨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 검귀 에리히.
어머니와 등을 맞대며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미소 짓는다.
그날 이후, 끝없이 자신을 속박하고 괴롭혔던 잘못된 답의 정체를 비로소 이해했던 까닭에.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 저주와 같은 가시 왕관을 벗어 던질 때였다.
시엔 나이트워커가 자세를 다잡는다.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둘러도 그것은 잘못된 답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시엔을 미혹에 빠트리게 했을까.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엔이 라일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바로 그때.
그 일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정답이었다.
라일라가 시엔을 지키듯, 시엔이 라일라를 지켜준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전부를 지키는 싸움.
시엔이 말없이 팔을 뻗는다.
그러자 그곳 일대에 세워 올린 월광(月光)의 결계가,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형태로 벼려지며 일대에 내리꽂혔다.
빙륜검 루나 피에나.
바로 그 보름달이 흩뿌리는 서슬 퍼런 달빛.
그리고 쏟아지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일찍이 오크 부족이 시엔에게 미래를 맡기며 넘겨준 또 하나의 신기, 묠니르.
─월광과 뇌전이 폭풍처럼 일대의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느덧 초점을 잃고 스파크를 내뿜는 시엔이, 그 상태에서 손에 쥐고 있는 또 하나의 애검을 고쳐 잡는다.
‘왕 시해자’의 이름을 가진 검.
그리고 그 앞에, 밤과 피의 여왕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엔이 땅을 박찼다.
달의 그림자처럼, 망령처럼, 소리 없이 거리를 좁히며 쇄도하는 섬광의 일격.
카앙!
그 앞을 쌍두까마귀의 가족, 검귀 에리히가 가로막는다.
동시에 시엔을 향해 피의 어머니, 로드 스칼렛이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핏빛의 손톱을 내리꽂았다.
카앙!
그 일격을, 재차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막아준다.
그런 라일라를 향해 로젤리아가 칠흑의 날개를 내리꽂고, 그 일격을 또다시 시엔이 막아준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그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교차하는 광경.
저마다의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더 나아가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남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싸움.
검이 맞부딪치고, 누군가 그 틈을 노리고, 누군가 노리는 그 틈을 다시 누군가가 지켜주고, 그렇게 생겨나는 틈을 또다시 누군가가 노리고─.
카앙!
다시 지켜준다.
“……이래서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네요.”
로젤리아가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이상.”
상대를 쉽게 쓰러뜨릴 수는 없어도, 이쪽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게 이 순간 서로가 취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더 강하다.’
시엔과 라일라, 그들 가문 사이에 맺어진 유대(紐帶)는 고작 ‘핏방울이 이어졌다고 해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저곳에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 검귀가 전력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호각을 이루는 게 그 증거다.
그럼에도 결국, 호각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이상 상황을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출혈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다. 그저 이곳에서 시간을 벌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 자체로 그들은 이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게 그들의 계획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잃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미소 짓는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전부는…….”
대답하는 것은 시엔이 아니라, 라일라의 몫이었다.
“너희들의 알량하기 짝이 없는 계획 따위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당신들의 영지가 불에 타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짓밟히고 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로젤리아가 물었다.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제는 시엔이 대답할 차례였다.
“절대로.”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는 거죠?”
“우리 가족을.”
시엔이 말했다.
“이 순간,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다.”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살의를 칼끝에 벼려내고, 지금까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신을 옥죄고 있던 가시 왕관을 벗어 던지며.
“로젤리아 샤를,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 * *
달빛이 쏟아지는 수도 베네토의 밤거리.
웃는 남자와 젠틀맨이 검을 맞대고 있었다.
* * *
헤아릴 수 없는 함대가 부서져 침몰하고,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세계를 삼키는 뱀이 포효하고 있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대제독 마린이, 이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그들의 함대와 해군 모두가, 그녀를 향해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예를 표했다.
* * *
“놈들이 움직이고 있구나.”
그 시각,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저택.
시엔과 라일라, 그들 가문을 짊어질 두 개의 기둥이 사라진 상황에서, 심지어 최강의 하이마스터 ‘요한’마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적들이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이닝 테이블에 늘어앉아, 나지막이 포도주를 홀짝이는 가족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사이좋게 웃고 떠들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만찬(晩餐)을 음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