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악의 심연 (1)
“로젤리아 샤를,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것참 유감스러운 말이네요.”
그 말에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미소를 흘린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오늘, 여기서 죽을 예정이 아니라서요.”
옆에서 피의 어머니, 미망공 스칼렛이 속삭였다.
“때가 되었구나, 딸아.”
“예, 어머니.”
때가 되었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일순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찰나.
“우리는 오늘, 당신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저 ‘고통’을 주기 위해 왔을 따름이니까요.”
“살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너머, 당신들이 사랑하는 전부가 있답니다.”
로젤리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심지어, 아직 살아 있지요.”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믿었으니 이곳에 왔겠지요.”
로젤리아가 미소 지으며 웃었다.
“그걸 두고 떠나가는 우리와 계속해서 싸워서, 결말이 날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할 셈이신가요?”
“…….”
“저와 어머니는, 앞서 출정하고 있는 귀족들과 힘을 합쳐 ‘왕도 루테시아’를 되찾을 예정이랍니다. 그리고 지금쯤, 당신들의 공백을 파악하고 나이트워커 공작령에 신성 제국의 적들이 찾아와 있겠죠.”
처음부터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당장 이곳에 쌍두까마귀의 가족, 검귀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러니 여기서 기약 없는 싸움을 계속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지 않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서로의 등 뒤로 거느린 밤과 피의 하늘이 사라진다.
쿠궁, 쿵!
그와 함께, 그들이 있던 지하 감옥을 따라 지축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돌이 무너지고 땅 밑이 붕괴하고, 천장의 벽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펼친 두 명의 뱀파이어가, 천장을 따라 날아올랐다.
실크처럼 검고 아름다운 날개와,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악마의 날개를 펼치는 두 모녀가.
검귀 에리히 역시 어렵지 않게 벽을 박차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시엔과 라일라는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설령 그들을 쫓아서 싸움 끝에 ‘결말’을 내도, 그 과정에서 시엔과 라일라의 전력이 약화될 경우 신성 제국이 더할 나위 없이 바라는 결말이 될 테니까.
그저 묵묵히 무너지는 지하 감옥 속에서, 검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그 끝에 있는 독방을 향할 따름이다.
그 남자, 조니 나이트워커는 그곳에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서 검고 어두운 눈두덩이를 하고.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그럼에도 그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 시엔. 그리고 라일라 누님.”
“조니 형님─.”
그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자마자, 시엔이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계획은 애초에 이곳에 오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을 어쩔 셈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을 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들의 전부를 앗아가는 고통을.
“임무를…… 성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누님.”
“네 잘못이 아니란다, 조니.”
라일라가 슬픈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 그들 가문의 가주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시엔과 그녀뿐.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암살자들의 어머니로서, 자애로운 손길이 조니의 뺨을 쓰다듬었다.
“누님,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말해보렴.”
“저 좀 죽여주시죠.”
“…….”
그 말에 라일라가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상이 심하기는 해도, 충분히 수복할 수 있을 거란다.”
라일라가 말했다.
“설령 이 이상 우리 가문의 전력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말이지.”
“아, 그게 말이죠.”
조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늦어버렸거든요.”
울컥, 조니의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검고 어두운 암혈이었다.
“로젤리아였나, 그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저를 ‘구울’로 바꿔놨습니다. 솔직히 의식을 유지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라서요.”
“!”
“뭐, 그래도 그럴 가치가 있는 입맞춤이기는 했죠.”
이성과 자아를 잃고 혈족의 뜻에 따라 복종하는 괴물, 구울.
“이대로 완전히 저를 잃어버리기 전에, 가족으로서 저 좀 죽여주십쇼.”
보통 사람은 진즉에 구울화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 고통을 참고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올 거라고 믿었거든요.”
“…….”
“아니면, 시엔. 네가 좀 죽여줄래?”
그 와중에도 조니가 태평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누님은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거든.”
정말로 남의 일을 말하듯이.
“……다들 눈물 콧물 질질 짜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나 죽고 나서 실컷 짜도 늦지 않거든.”
조니가 말했다. 여느 때처럼 유쾌하고 쾌활하게.
“나야말로 진짜 급해 죽을 것 같은데, 부탁 좀 하자.”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조니를 향해 다가갔고, 팔다리가 잘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뚱이밖에 없는 그 몸에,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별과 단검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복수는 이루어질 겁니다.”
“그래. 아, 죽이기 전에 로젤리아 샤를, 그녀에게 내 안부나 좀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 말을 끝으로 시엔이 칼끝을 찔러넣었다. 왕 시해자의 칼끝이 조니의 목덜미를 따라 내리그어지며, 피를 뿜어냈다.
절명(絶命).
잘린 그의 목이 바닥을 뒹굴었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여기까지였다.
* * *
타앗!
대량학살장치 앨리스가 전신의 칼날을 뿜어내며 쇄도했다.
그곳에 있는 제국 공안, 중품 이상의 고위 천사들을 강림시키고 있는 이단심문관들을 향해서.
제국 공안과 쌍두까마귀의 가족, 적지 않은 제국의 강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전부를 구하기 위해 전력을 흩뜨린 사이, 수도 베네토에 있던 잭 더 리퍼와 랭스에 있던 검귀 에리히의 정보를 토대로 비로소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규격 외 강자들의 위치 하나하나를 헤아리고 벌어지는 전투, 그 속에서 적지 않은 제국의 강자들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심장을 향해 전력을 이끌고 있다.
촤아악!
죽음의 거미줄이 앨리스 주위에 드리워지며 그녀를 노리는 칼날을 휘감았다.
“미하일!”
“조심하세요, 대모님.”
여느 때의 능청스러운 말투는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미하일에게 있어 앨리스는 그의 전부였으니까.
“너야말로 모가지 좀 신경 쓰고 다녀.”
동시에 이자벨 나이트워커가 쓴웃음을 지으며 미하일의 곁에서 ‘칠흑의 불꽃’을 피워 올린다.
그녀의 몸에서 솟아나는 가시와 함께 흩뿌려진 암혈(Black Blood)로 일대를 덧씌우며.
“아, 참 아름다운 우애기도 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국 측 전력의 정점에 서 있는 그녀가 미소 짓는다.
“설마 어리석어도 이렇게까지 어리석었을 줄이야.”
라일라 언니와 시엔, 심지어 웃는 남자까지.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제일의 강자들이 부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하이마스터 따위가 정말로 자신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조소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이끄는 장녀(長女)이자 라일라의 자매였고, 이제는 그들의 손에 사랑하는 전부를 빼앗기고 복수를 다짐하는 적수.
“어디 보자, 몇 명을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빌헬미나가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여기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부’를, 이 자리에서 얼마나 빼앗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전부를 빼앗기고, 전부를 빼앗는다. 그 쾌감에 몸부림치며 빌헬미나가 웃었다.
“아무것도.”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빌헬미나가 즐거운 듯이 고개를 돌린다.
“너희는 우리의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다.”
칠흑의 붕대로 두 눈동자를 가린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아, 그 유명하신 「밴시」 린 나이트워커군요.”
말없이 태도를 고쳐 잡는 그녀를 보며 빌헬미나가 조소했다.
“그러면, 당신을 빼앗을까요?”
어느덧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력의 입자를 통해 그녀의 무기를 형상화하며.
칠흑의 흑철로 검게 빛나는 사신의 낫(Death's Scythe).
그녀, 빌헬미나 아퀴나스를 《죽음의 성모》라 불리게 하는 상징 그 자체.
“가족이 전부다…….”
조용히 읊조리며 밴시 린이, 자신의 두 눈동자를 가린 칠흑의 붕대를 풀어 헤쳤다.
이윽고 붕대 속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눈이, 비로소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짙은 진홍으로 빛나는 핏빛의 눈동자였다.
* * *
규격 외 강자의 공백은 그 자체로도 전략적으로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을 마친 시엔과 라일라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매끄러운 가죽 재질의 검정 트렌치코트 위로, 핏빛 바탕에 흑색의 갈고리 십자가를 완장으로 찬 제복 차림의 무리.
보란 듯이 칠흑의 제복을 차려입고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는 제국 공안.
심지어 그들 속에는 사도급 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순백의 고위 이단심문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순교자의 자세」.”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들은 살아갈 생각 따위가 없고, 그저 이 자리에서 순교자가 되기로 결의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감히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지.”
그저 그들이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엔과 라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다.
고작 그 정도의 전력 따위로,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을 지탱하는 최강자의 ‘발목’을 잡는 것 따위가 가능할 리 없을 테니까.
* * *
밤하늘 산맥은 천혜의 요새이나, 동시에 요새를 넘는 시점에서 나이트워커 공작령은 그 어느 때보다 무방비하게 적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빌헬미나를 비롯해 제국의 강자들은 그깟 산맥 하나로 가로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을 지키는 적지 않은 그림자 기사들이 쓰러지고, 가문의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사투를 거듭하는 와중, 천천히 그곳에서의 전투는 열세(劣勢)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쓰러지는 것도 머지않을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바로 그때, 흥얼거리는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 누구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나의 황혼이여.
Goodbye, my dusk, lit brighter than ever.
류트를 튕기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소리 높여 부르는 합창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적어도 비고와 티아, 라힘 나이트워커는 그 노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이 된 내 사랑 황혼이여, 남겨진 우리가 여명으로 나아가는 별빛으로 이끌어주길.
Dusk my love, my star, guide us toward startlight reaching for dawn.
그날, 시엔 나이트워커가 목숨을 걸고 정착할 땅과 미래를 열어준 오크들의 노래였다.
동시에 그 노랫소리가 지금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이유를 모를 이들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땅에 정착하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린 그들이, 이제는 새로운 전력(戰力)이 되어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공화국이 자랑하는 새로운 군세가 되어서.
“차징!”
중장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오크 기병대가, 혈투가 벌어지는 와중 적들의 배후를 향해 깃발을 드높였다.
“명예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