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악의 심연 (2)
이 세계는 더 이상 인간들의 것이 아니다.
칠왕국의 아서왕이 거느린 악마의 군세, 레드 코트.
밤과 피의 왕국을 이끄는 로젤리아와 뱀파이어 클랜의 귀족들.
신성 제국의 ‘천사’라 불리는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섭리 밖의 존재들이 벌이는 다툼 속에서, 더 이상 인간들의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없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곳에는 인간들이 있다.
“명예를 위하여!”
피부색이 다르고 체격이 다르고 문화와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같은 인간들에게 ‘오크’라고 손가락질받던 이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의 군세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인간임을 상징하는,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를 뿜어내며.
필사의 각오와 함께 의지가 결속되며 벌어지는 진짜 인간의 찬가─.
「원 포 올(One for All)」.
오러의 대규모 증폭 및 결속 현상.
그리고 그 의지가 함께 모여서 공명할 때, 오러의 위력은 배가 된다.
아무리 이 세계의 저울추를 유지하는 것이 ‘소수의 강자’라 해도, 결코 보병과 머릿수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
게다가 그들은 전사일지언정 결코 일개 잡졸(雜卒)이 아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내밀어준 손길에 구제받고 새로운 땅 위에서 밭을 일구며 미래를 기약하는 동안, 그들은 단 한 순간도 과거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동족들이 쓰러져야 했던 처절한 과거를 한순간도 잊지 않고 오직 이날을 위해 묵묵하게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전사들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을 향한 보은(報恩)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들의 소중했던 전부를 앗아간 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를, 형제자매를, 그들이 소중하게 여겨온 전부를 빼앗은 적들에게서, 똑같은 것을 빼앗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강자들조차 일순 평정심을 잃을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오러의 공진.
바로 그 공진을 또 하나의 방패처럼 휘감고, 오크들의 군마가 돌진했다.
그것은 일찍이 샤를마뉴 왕국의 기사들이 저질렀던 맥없는, 허황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상대의 진영에 쐐기를 꽂고 무너뜨릴 수 있는 충격력을 가진 ‘의지의 결집’ 그 자체였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의지.
악마와 흡혈귀, 천사의 군세가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그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의 찬가.
“많이 기다렸지!”
그리고 중장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오크들 사이에서, 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과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엣헴, 우리가 왔다구!”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폼 잡을 시간에 그냥 30분만 빨리 오지 그랬냐.”
일대의 중품 천사들을 상대로 전신의 칼날을 사출하며, 미하일이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렴, 이 못난 동생아.”
“헤, 헨젤, 그레텔!”
칼날과 함께 칠흑의 피를 흩뿌리며 이자벨이 웃었다. 앨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세요, 헨젤 삼촌, 그레텔 이모!”
《흑조》의 이명을 가진 티아의 검고 어두운 눈동자가, 가족을 향해 처음으로 생기(生氣)를 드러냈다.
“형님과 누님들, 그리고 우리 동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라힘 역시 두 주먹을 부딪치며 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의 주먹에서 타오르는 것은 더 이상 이글거리는 핏빛의 불꽃이 아니었다.
호수처럼 새파란 청색의 불꽃, 청염(靑炎)이다.
“공화국을 위하여!”
“하느님과 제국을 위하여!”
─그곳은 강자들이 격돌하는 장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戰場)이었다.
제국과 공화국의 국경.
밤하늘 산맥 너머에서 언제나 적들에 맞서 나라의 최전선을 지켜온 별과 단검의 전장.
적지 않은 그림자 기사들과 사병을 비롯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족과, 제국의 신성 군단과 고위 이단심문관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군세’가 격돌하는 장.
나이트워커 가문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시엔과 라일라는 없다. 심지어 최강의 하이마스터, 요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이 있었다.
제국의 신성 군단과 이단심문관, 심지어 쌍두까마귀의 가족에 맞서 자신의 전부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가족들이.
* * *
“「순교자의 자세」.”
시엔과 라일라의 앞을 가로막은 제국 공안들이, 일제히 그들의 몸 위에 초월자의 힘을 덧씌운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사자, 천사(天使).
심지어 살아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곳에서 그들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장기 말을 자처하며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기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상품의 1품, 미카엘(Michael) 강림.”
하지만 순백의 제복을 입은 사도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는, 시엔조차 예상치 못한 존재에 숨을 삼켜야 했다.
‘상품의 1품?’
그 정도의 최고위 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제국 공안의 숫자는 많지 않다. 적어도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은 그들의 목록을 오롯이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의 사도가, 아무렇지도 않게 상품의 1품을 강림시키고 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삼아 불완전 강림을 시키려는 셈이겠지.’
그게 시엔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귀결이었다.
촤아악!
그곳에 내려앉은 순백의 성광(聖光) 속에서 흩뿌리는 성스러운 힘의 결정을 보기 전까지는.
“!”
당혹 속에서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품의 1품, 교회가 자랑하는 최고위 천사 미카엘.
그것을 소환할 수 있는 최고위 이단심문관의 숫자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 오직 2명. 게다가 그들 두 명 모두가 제국 국교회의 추기경이자 《콘클라베》에 소속되어 있는 대제후들이다.
다시 말해, 저 존재야말로 단일 개체로서는 제국 국교회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이 되는 셈이다.
그 정도 되는 강자를, 고작 시엔과 라일라의 발을 묶기 위해 장기 말로 쓰겠다고?
아무리 미카엘이 강하다 해도 암살자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자리에 있는 이상, 승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굳이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를 드러내 발목을 묶으려 하는 것은, 그마저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저 사도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정보망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인물이다.
의미를 헤아린 시엔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가세요, 어머니.”
“─뭐라고?”
그 말에 일순 라일라가 당황했다.
“이곳에 있는 천사들은, 저 홀로 상대하겠습니다.”
“시엔!”
그 말에 라일라가 당황해서 소리를 높였으나,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작으로서의 명령입니다, 어머니.”
더 이상 그들 가문을 이끄는 수장은 그녀가 아니다.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오직 가주(家主)의 몫.
“이곳은 제게 맡기고, 공작령에 있는 가족들을 지켜주세요.”
“…….”
라일라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땅을 박차려는 그녀의 앞을, 천사들이 가로막는 순간.
그들에 앞서 시엔이 땅을 박찼다.
누구도 라일라가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듯이.
카앙!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휘둘러지는 칼날을 모조리 맞부딪치며, 시엔이 소리쳤다.
“제가 올 때까지─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우리 가문의 기둥이자 ‘나이트워커 공작’이십니다.”
“알겠습니다,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 말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움직였다.
누구도 그녀를 가로막지 못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엔을 쓰러뜨릴 수 없었던 까닭에.
시엔 역시, 홀로 남겨져 그곳에 있는 천사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일개 천사병 따위가 아니라, 고위급 제국 공안들이 펼치는 중품 이상부터 ‘최고위 치품천사’ 미카엘에 이르기까지.
달라질 것은 없다.
이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라일라의 아들도, 호수의 암살자도 아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대부(代父) 시엔 나이트워커.
제국 공안들이 강림시키고 있는 중품 천사들 사이에서, 홀로 고고하게 성광을 내뿜는 적을 마주했다.
“누가 하느님 같으랴(Quis ut Deus)?”
그 최강의 천사,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순백의 날개 열두 장이 돋아 있는 금발의 미남자가, 오른손에 검을, 왼손에 저울을 쥐고 이 세상의 악(惡)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때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용과 그의 부하들도 맞서 싸웠지만 당해 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사의 목소리라 불리는 아리아(Aria).
「미카엘 천사님, 당신은 강한 손으로 잔인한 용을 때려눕혀서 수많은 사람을 그 아가리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그것은 미카엘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 그의 주위에서 그를 찬미하는 ‘천사들’이 내는 목소리였다.
최강의 천사와 함께 하는 천사의 군세.
좋은 지휘관이 부하를 좋은 병사로 바꾸듯, 그것은 최강의 천사라 불리는 미카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미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광이, 일대의 천사들 모두를 휘감으며 하나의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인간들의 오러가 공명하며 공진을 일으키듯이, 천사들의 성광이 하모니처럼 울려 퍼진다.
쿵!
직후, 미카엘의 왼팔에 들린 저울이 움직였다.
마치 저울이 부서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다 못해 추를 올려놓아야 할 접시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내렸다.
「용의 아들아, 네 죄의 무게가 깊으니 천칭의 저울이 이리도 무겁게 기울었구나.」
침묵하고 있던 미카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 영혼의 무게를 재어, 내 마땅히 너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다.」
미카엘의 심판.
보통 사람은 그저 그 말을 듣는 것으로 벌벌 떨며 절명할 정도의 위압감.
그게 바로 신의 사자, 신의 대행자가 내는 목소리(아리아)다.
그러나 시엔 나이트워커는 눈동자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설령 천사가 자신의 죄를 꾸짖고 지옥에 떨어져 마땅할 존재라 말해도, 자신의 영혼이 결코 구제받지 못할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들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네놈이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순간,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을 저주나 가시나무의 왕관 따위는 개의치 않고.
그저 바라는 것을 얻고 손에 넣기 위해서.
그것이 악(惡)이니까.
“「악인의 자세」.”
그렇기에 신을 대행하는 최강의 천사이자 ‘천사장’의 직위를 가진 미카엘에 맞서,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신념(스탠스)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성스러운 선(善)의 대행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