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나이트워커 공작 (1)
대륙 각지에서 벌어진 저마다의 전투들이 어느 정도 일단락을 맺고, 짧은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국과 공화국, 왕국과 왕국, 인간과 뱀파이어, 암살자와 성직자, 천사와 악마.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과 세력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격돌하는 전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미줄처럼 촘촘히 이어져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 전쟁.
그 한복판에 그들의 전부이자 유일의 선(善)이 있었다.
“시엔!”
“앗, 시엔이다!”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의 천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레텔 누님, 헨젤 형님.”
“야, 시엔! 왜 저 바보를 먼저 부르는데!”
“엣헴, 시엔은 나를 더 좋아하니까 그렇지롱!”
강림했던 미카엘을 격퇴하고 천사의 군세를 쓰러뜨린 시엔이 돌아왔을 때, 예상대로 그들 가문의 적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어머니 라일라조차 제대로 된 타이밍에 위기에 빠진 가족들의 전력이 되어주지 못했다.
“어서 오렴.”
어머니 라일라 역시 그곳에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나의 전부들이여.”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이윽고 나이트워커 공작 앞에서 마땅히 가족들이 예를 표하려는 찰나.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말렴.”
라일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한 의지가 깃든 어투로 고개를 젓는다.
일순, 가족들 사이에 당혹의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들 역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기에.
일찍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리며 나이트워커 가문을 이끌어온 라일라가 정중하게 무릎을 꿇는다.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바로 그곳에 있는 그녀의 아들, 시엔의 앞에서.
“새로운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들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 앞에 예를 표하며.
“고개를 드세요, 어머니.”
그들 앞에서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모두들도.”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을 향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하는 나의 전부들이여.”
기다렸던 미래가 이곳에 펼쳐져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전부를 잃었던 시엔이 바라마지 않던 광경.
단 한 사람의 가족도 잃지 않은 완전무결한 미래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많은 가족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순간을.
더 이상 그의 앞을 비춰줄 미래의 나침반이나 이정표 따위는 없다. 아니, 한참 전부터 시엔이 걷고 있는 길은 그 누구도 나아가본 적 없는 검고 어두운 여로(旅路)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수도 베네토.
총독궁 내의 어느 비밀스러운 일실.
대낮에도 어둠이 가득 차 있는 그 방에는, 알기 쉬운 황금 장식이나 예술품 하나 없다.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는 잿빛 풍경과 더불어 대리석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비밀스러운 회의실이었다.
“돈 나이트워커.”
그늘 속에서 이 나라의 외교 및 첩보 활동, 전쟁을 비롯해 국가의 명운이 달린 정책이나 중대사 따위를 결정하는 조직, 일명 「10인 위원회」.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아버지를 뵙습니다.”
이 나라의 지배자들이, 그곳에 착석해 있는 시엔 앞에서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무릎 꿇고 손등 위에 입맞춤한다.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들이, 그 지배자 위의 지배자 앞에서 충성을 표하듯이.
“쓸데없는 겉치레는 이 정도로 되었습니다.”
새로운 ‘나이트워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 말에 위원 하나가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요사이 제국과의 충돌로 빚어진 새로운 규제 정책으로 인해, 제국을 상대로 하는 무역 규모가…….”
“보내준 보고서와 장부에 적혀 있는 수치는 읽었습니다. 서신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우리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시엔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려,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 대답을 받아 위원이 말을 잇는다.
“거기에 칠왕국의 대륙 진출과 샤를마뉴 왕국의 수도 이전이 더해져, 병장기(兵仗器)의 구매량 자체는 늘었으나 대륙 전체에 걸쳐 사치품의 수요가 눈에 띌 정도로 급감하고, 적지 않은 상회들이 파산을 앞둔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 ‘사라센 제국’ 측이 신성 제국에 함대를 빌려주거나 직할 사략선(私掠船)의 규모를 증대하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 공화국의 해양 패권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얼마 전 벌어진 대규모 해전에서는 ‘마린 나이트워커 제독’의 지휘로 대승을 거두었고, 사라센 제국이 빌려준 신형 선박을 나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이트워커 제독. 물론 그녀는 엄밀히 말해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아니다. 그저 그 이름을 쓰고 있을 뿐인 부외자니까.
시엔에게는 아니었다.
“마린 나이트워커라, 이걸 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펀트 공작.”
마찬가지로 그녀의 오빠이자 서펀트 가문을 이끄는 젊은 수장 라파엘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저 감사를 표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라파엘로가 말했다.
“제가 잡아주지 못했던,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셔서.”
“제 배우자, 마린 나이트워커는 누군가가 손을 잡아줘야 할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뭐, 적어도 그때는 그랬지요.”
라파엘로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 시절의 공작 각하께서 그러셨듯 말이지요.”
“쓸데없는 헛소리나 하자고 이 자리까지 오시지는 않았을 테지요, 라파엘로 서펀트 해군 원수(元帥).”
마린 나이트워커 제독의 위에 존재하는 유일의 계급이자 이 나라의 바다 전체를 다스리는 자.
“흠, 잠시 여기가 물 밖이란 사실을 잊은 듯하네요.”
전대의 나이트워커 공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그렇게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이트워커 공작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별과 단검의 진정한 주인.
“게다가 여전히 샤일록 디 메디치의 자리, 공화국 국영은행장의 자리가 공석(空席) 중이란 듯하던데.”
“……계속해서 후보를 찾고 있으나, 대다수가 메디치 공의 수완을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팔푼이뿐입니다.”
이 나라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 그만큼 공식적으로 그 돈을 관리하는 공화국 국영은행장의 자리는 막중하다. 그 부재가 길어지는 것 역시 좋을 일이 아니나, 그렇다고 실력 없는 자에게 그 자리를 맡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 될 말이다.
“그렇다면 제가 후보 하나를 추천해도 될까요.”
생각하고 나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생각보다 이 자리에 제법 어울리는 인물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시엔이 말했다.
“위원회가 끝나는 대로, 제가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요.”
* * *
그날 새벽, 공화국 업타운의 어느 호화 저택.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그…… 아니, 그녀가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아니, 제대로 들었는데.”
“흠, 저는 분명 도둑놈에게 이 나라의 금고를 맡기겠다고 들었는데.”
“그래, 제대로 잘 들었네.”
베네토 도둑 길드의 수장, 모니카 써틴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후, 제 앞에 계신 분이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제정신이냐고 물어봤을 겁니다.”
“이야, 공작 앞에서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어요.”
“아니, 어디까지나 그럴 거란 가정이죠.”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대답했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언제부터 제 생각이 중요했습니까?”
모니카 써틴이 흑청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말했다.
“아니, 내가 뭐 네가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등 떠밀었던 적 있나?”
“등 뒤에 칼 겨누는 게 떠미는 일이 아니라고 쳤을 때 얘기죠.”
모니카가 말했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귀족 출신조차 아닌 제가 그 자리에 앉으면 ‘높으신 분들’의 저항이 거셀 겁니다.”
“높으신 분?”
그 말에 시엔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것 참.”
말하고 나서 모니카 역시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덧 초승달처럼 입꼬리가 찢어진 광대 마스크를 쓰고, 어깨를 들썩이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 나라의 그 누구도 나이트워커 가문보다 높을 수는 없다.
그들의 말이 곧 법(法)이다.
그저 그들이 힘이 있다거나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서가 아니다.
그들의 행동, 행위 하나하나에는 이 나라의 지배자들 모두가 납득할 정당성이 있었다.
“나는 네게 이 나라의 황금이 모이는 금고의 열쇠를 넘겨줄 거고, 네게는 그 황금을 지키는 동시에 불릴 의무가 주어질 거다.”
“뭐, 확실히 요새 이 나라의 지갑 사정이 썩 좋지는 않지요.”
그녀는 도둑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이 나라에 오고 가는 황금의 정세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전쟁, 심지어 뒤에서 느긋하게 뒷짐 지고 구경해야 할 우리나라마저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치고받기 바쁘니 말입니다.”
“바람 잘 날이 없기는 하지.”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이 나라와 우리 가문은…….”
“그 어떤 순간에도,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하고서.
그렇기에 모니카 역시 웃지 않았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포커페이스로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다.
“무엇을 꾸미고 계시는 겁니까?”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
시엔이 말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우리 가문과 이 나라가 업(業)처럼 짊어진 그 전쟁을, 내 대에서 끝낼 생각이거든.”
그것이 시엔이 바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가문과 이 나라의 평온을 바라고 있다.”
좀 더 정확히는, 이 나라의 평온이 곧 그들 가문의 평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굳이 입밖에 담지는 않았다. 아무리 눈앞에 있는 시프 마스터, 모니카가 신뢰할 수 있는 자라 하나 결코 ‘가족’은 아니었던 까닭에.
아울러 눈앞에 있는 그녀는, 적어도 가족을 제외하고 시엔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중 하나였다.
“나는 너를 공화국 국영은행장에 앉히고, 그와 더불어 또 하나의 직책을 내릴 생각이다.”
“무슨 직책입니까?”
“첩보장관.”
“…….”
“나는 네가 우리 가문의 새로운 ‘눈과 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모니카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여느 때와 같은 그녀의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일개 도둑놈에게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일이 뭡니까?”
“은행장 겸 첩보장관이 가장 잘해야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
“흠, 글쎄요.”
“안 들키고 남의 돈 터는 거.”
“아하.”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지.”
시엔의 말마따나, 그것은 베네토 도둑 길드의 수장이자 ‘얼굴 없는 자’ 모니카 써틴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