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나이트워커 공작 (2)
당장 제국과 공화국 사이의 전쟁은 방점을 찍었다. 눈으로 보이는 양지에서든, 혹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든.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적들을 쓰러뜨리는 사이, 모두의 눈이 쏠리는 양지에서 적들을 쓰러뜨린 또 하나의 ‘승자’가 있었다.
그 승자가 이제 막 개선장군(凱旋將軍)이 되어 수도 베네토의 항구로 들어왔다.
기러기가 끼룩거리는 소리, 파도가 굽이치며 바다가 부서지는 소리,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섞여 있는 소금 냄새와 햇빛을 당당하게 거느린 그녀가.
좁쌀처럼 작은 그들 나라에 있어, 유일하게 대륙 제일의 규모와 물량을 자랑하는 해군 함대.
바로 그 함대를 이끄는 마린 나이트워커 제독.
그녀는 사라센 제국이 함대를 빌려준 ‘신성 로마누스 제국’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승리했고, 여전히 그들이 바다 위의 패자임을 증명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시엔과의 약속을 이루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 손을 내밀어줘야 할 어린아이조차 아니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시엔이, 승자로서 환호받는 마린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다.
시엔 역시 똑같은 승자였다. 그러나 그들 가문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가 어떤 싸움을 치러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곳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저 그들이 존재하기에 이 나라의 영광이 존재하고 있다는 ‘별과 단검의 신뢰’가 존재할 뿐.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나?”
바로 그때, 기척조차 없이 곁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물밀듯 넘치는 군중 속에서 숨겨진 기척이라 하나, 지금의 시엔조차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소중한 것’을 결정하고, 또는 ‘소중하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가.”
낯선 목소리, 들어본 적도 없는 목소리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시엔의 영혼 속에 상처를 새기는 것 같은 아픔을 가져왔기에.
“아버지가 되었구나, 나의 아들 시엔.”
남자가 말했다. 마치 어린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할아버지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는, 그곳에 있는 아버지의 아버지였다.
“밤의 아버지─.”
최초의 밤을 걷는 자, 카산 나이트워커.
“일찍이 그렇게 불렸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 이름은 버린 지 오래니까.
“이제는 네놈을 뭐라 불러야 하지?”
“영원한 밤의 아버지.”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나직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나라는 황금으로 일어섰고 황금으로 몰락할 것이며, 바다로 일어섰고 바다로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밤으로 일어섰고, 밤으로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남자, 영원한 밤의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그렇게 말하며 시엔의 곁에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무적함대를 거느린 채 승리를 기뻐하는 바다의 여왕 ‘마린 나이트워커’를 뒤로하며.
남자는 정확히 그녀─ 마린을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란 말이, 일순 시엔의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님을 자백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그녀 마린은 시엔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야 했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자기 자신의 아픔 따위는 생각보다 사소한 것이지.”
영원한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거래를 제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노라,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리고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
두 명의 아버지들이 그곳에 있었다.
“네 몸을 나에게 넘겨라.”
그 터무니없는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흘리려는 찰나.
“그럼 나는 나의 ‘전부’를 포기하겠다.”
남자가 말했다.
“나의 제국, 쌍두까마귀의 가족,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나는 다시 너희 가문으로 돌아올 것이다.”
“…….”
“일찍이 밤의 아버지가 되어 번영을 이끌었듯, 이 나라와 우리 가문의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마.”
“내가 왜 그딴 헛소리를 믿어줘야 하지?”
“별과 단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남자가 말했다. 시엔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승자의 환성을 뒤로하고, 마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 같다.
정적이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그러나 정적은 길지 않았다.
“네놈은 그 이름을 빌릴 자격이 없다.”
“오만한 말을 하는구나, 나의 어린 아들아.”
“나는 네놈의 아들이 아니다.”
시엔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필시 제국이나 쌍두까마귀의 가족 따위는, 절대로 네놈의 ‘전부’가 아니다. 아마 일부조차 아닐 테지.”
모를 리가 없었던 까닭에.
“네놈은 그저 자신이 전부일 뿐이다.”
“그렇다.”
남자는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기에 네가 나의 그릇으로 거듭날 때, 너의 전부는 곧 ‘나의 전부’가 될 것이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네가 소중히 여기는 전부가 곧 나의 전부가 될 것이며, 나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것이 남자가 내세운 타협이었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전부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쯤은, 그들에게 있어 결코 대수로운 거래가 아닐 테니까.
“나이트워커 공작으로서, 나의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엔이 일말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다시, 자신의 과오로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구나.”
“─.”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시엔 나이트워커.”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전부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비극의 운명.
또다시 그 말이다. 저주처럼 시엔을 휘감는 말.
시엔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동요는 아주 잠시였다.
시엔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시엔 나이트워커’의 존재가 가족에게 있어서는 전부나 다름없는 것임을 이해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파멸하는 것은 네놈 자신이다, 별과 단검을 사칭하는 사기꾼아.”
말하고 나서 각오를 다졌을 때, 거기에 있던 남자의 기척은 사라진 채였다.
마치 신기루가 그곳에 내려앉았다 스러진 것처럼, 백일몽처럼 덧없는 대화였다.
깨달을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이어진 소강상태는 이걸로 끝났다.
멈춰 있던 전쟁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였다.
평화를 바라는 자는 늘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까닭에.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할 때였다.
* * *
“정신이 드시나요?”
젠틀맨 잭 더 리퍼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습기가 찬 어두컴컴한 지하실이나 감옥 같은 곳이 아니었다.
마치 정중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것 같은 저택 방의 일실이다.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렸으며, 이제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는 이명을 자처하는 가문의 암살자가.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다.
그 대신, 그곳에 있는 ‘숙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우리 자신의 아픔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고통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가요.”
체념하듯 쓴웃음을 짓는 젠틀맨 잭의 말에 라일라가 고개를 젓는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당신들처럼 ‘야만적인 방식’을 취할 생각이 없답니다.”
당장 그들이 조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전부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
“흠, 그것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신사로서 감사를 표하지요.”
잭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라일라의 눈동자가 차가운 서슬을 머금고 빛났다.
“그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이지요.”
“그것참 겁나는 말씀이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최후의 만찬이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마음만 받지요.”
잭이 대답했고, 라일라 역시 그 이상 되묻지 않았다.
촤아악!
깨닫고 보니 죽음의 실이 흩뿌려진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잭의 몸을 따라 헤아릴 수 없는 혈선(血線)이 내달린다. 죽음의 숙녀, 그 이름처럼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잭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오, 아름다운 레이디. 친절하기도 하시지.”
그렇기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잭이 나직이 미소 짓는다.
곱게 죽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서 사치스러운 영광도 없을 테니까. 심지어 자신처럼 극악무도한 살인귀에게 이런 결말은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이다.
피차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설령 눈앞에 있는 저 괴물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훨씬 더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이란 무엇일까. 왜 그녀는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죽이는 것일까.
일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잭을 휘감았다.
저들은 절대 알기 쉬운 자비를 베푸는 일이 없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가진 악의(惡意)는, 이 세상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끔찍하고 악랄해야 마땅할 터다.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나는 확실했다.
저들이 절대 이렇게 친절할 리 없다.
저 괴물들은 절대 이런 친절한 족속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시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이대로 눈을 감아야 하는 사실에, 젠틀맨 잭이 비로소 정체 모를 두려움과 공포에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며,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잭이 사로잡혔다는 소식 자체는 적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걸 끝으로 잭의 소식이,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중 무엇 하나가 사랑하는 가족의 귀에 들려오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어떤 희망도 절망도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에.
무엇보다 그 남자에게 있어, 가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와 다름없던 까닭에.
* * *
그로부터 얼마 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4국 회담.
공식적으로는 대륙에서 끝없이 벌어지고 있는 전란(戰亂)에 대해, 보다 합리적으로 지혜를 모아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자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회담.
제국과 공화국, 이제는 하나가 된 ‘브리타니아 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네 개의 강대국을 이끄는 공식적 내지는 ‘비공식적인’ 수장들이 하나의 자리에 모여 이 대륙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
그러나 개중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전쟁을 승리해 최후의 승자가 되려는 이들 역시 존재할 것이다.
아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적어도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 중, 전쟁과 평화가 양자택일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