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나이트워커 공작 (3)
4국 회담의 이야기가 성사되기 얼마 전, 수도 베네토의 어느 새벽 바닷가.
굽이쳐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하늘 위를 끝없이 덮고 있는 칠흑 같은 밤하늘, 그것들을 뒤로하고 시엔의 앞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야, 시엔.”
바다 위에서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그날 시엔이 내밀어준 손을 잡은 ‘마린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파도가 휘날릴 때마다 물살이 부딪치는 암초 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내며.
쏟아지는 달빛에 그녀의 꼬리지느러미가 찬란하게 빛났고, 그 상태에서 물속을 향해 풍덩 뛰어들었다.
차박, 차박.
미끄러지듯 밤바다를 가로지르며 뭍에 올라온 그녀가, 어느새 인간의 희고 가느다란 두 다리를 갖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고향 바다의 적막이 그리웠어.”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니까.”
시엔의 말에 마린이 말없이 미소 짓는다.
고향 바다, 그 말처럼 그녀는 이 나라를 위해 기약도 없이 멀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적들과 싸웠다. 느긋이 바닷속을 헤엄칠 수도, 고요와 적막을 즐길 수도 없는 전쟁터에서.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뭐가?”
“지금의 나는 아직, 너와 ‘대등하지’ 않으니까.”
마린이 말했다.
“네가 싸우는 세계, 네가 싸우는 전쟁에 비해 내가 있는 곳은 어린애들 장난 같은 거지.”
“너도 충분히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어.”
“아직은 아니야.”
시엔의 말에 마린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바다 전부를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녀다운 결의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 그와 더불어 희미하게 떨리는 감정이 깃든 목소리였다.
“약속해줄래, 시엔?”
“말해봐.”
시엔이 물었고,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 끝에 마린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 * *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하나의 자리에 모여 있었다.
브리타니아 왕국의 아서왕, 샤를마뉴 왕국의 로젤리아 여왕,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 디트리히 합스부르크.
끝으로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
신성 제국과 샤를마뉴 왕국, 베네토 공화국과 브리타니아 왕국의 신수도 ‘루테시아’ 네 곳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바로 그곳에.
“나이트워커 공작이라.”
그리고 공화국 측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로젤리아 샤를이 의외란 듯 미소 짓는다.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만수무강하셨는지요, 로젤리아 샤를 여왕 폐하.”
그렇기에 시엔 역시 차가운 조소를 담아 예를 표했다.
“덕분에 말이지요.”
그날,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칼을 꽂아야 했던 뼈저린 고통을 떠올리며 시엔이 애써 미소 짓는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그랬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기고, 뺏고, 끝없는 증오가 사슬처럼 엮여 서로의 전부를 빼앗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라들이다.
“무슨 꿍꿍이지?”
이윽고 침묵하고 있던 아서왕이 입을 열었다. 그의 곁을 지키는 책사, 요정왕 멀린을 뒤로하고.
마찬가지로 시엔의 등 뒤에도 나이트워커 공작을 보좌하기 위해 《죽음의 숙녀》 라일라, 그리고 《웃는 남자》 요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젤리아의 곁을 지키는 피의 어머니와 뱀파이어 클랜의 고위 흡혈귀들 역시 예외가 아니고, 끝으로 신성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쌍두까마귀의 가족이자 새로운 제국의 황제 ‘디트리히’가 입을 열었다.
바로 이곳에서 4국의 회담을 제의하고 중재하는 당사자로서.
“저는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불사자(임모탈)》 디트리히 합스부르크.
공식적으로 이 나라, 제국을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황실 가문의 2황자.
그러나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정확히는 그의 그릇을 빌린 ‘밤의 아버지’가 시엔의 손에 쓰러지고 나서는, 새롭게 제국의 황제로 거듭나 있는 남자.
그의 두 눈동자가, 마치 파충류 동물처럼 쭉 찢어진 세로 동공을 하고 있었다.
뱀의 눈동자, 사안(蛇眼).
예로부터 불사와 재생, 지혜와 악, 때로는 풍요와 다산을 일컫는, 헤아릴 수 없는 상징의 동물.
“평화라.”
그 말을 듣고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왕도, 시엔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전쟁과 평화는 결코 양자택일의 사항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꼭 나이트워커 가문이 할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조소했다.
비록 당장 그들 샤를마뉴 왕국과 신성 제국이 손을 잡았다고 해서, 그게 그들이 꼭 같은 팀이란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직전까지 힘을 합친 공화국과 칠왕국, 이제는 ‘브리타니아 왕국’의 이름을 가진 나라와의 사이가 그렇듯이.
“뭐, 여기 있는 우리 중에 평화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없을 테지요.”
제국의 새로운 황제이자 쌍두까마귀의 가족, 그리고 ‘그 남자’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딱히 숨길 생각도 무엇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저는 ‘진정한 평화’를 논하기 위해 이 자리를 준비했고, 기꺼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직 전쟁으로밖에 손에 넣을 수 없는 평화.
“베네토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 그들의 파멸을 위해 우리와 힘을 합치는 자에게─ 우리 제국은 ‘진정한 평화’를 약속하겠습니다.”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공작의 존재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디트리히가 말했다.
마치 이 자리가, 처음부터 자신들과 힘을 합칠 ‘동맹’을 구하는 자리라 말하듯이.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힘을 합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나라.
세 나라가 힘을 합칠 때, 제국의 입장에서는 두 왕국 사이의 이해득실을 중재해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제국은 ‘어느 나라가 먼저 자신들에게 붙을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역시, 제국의 신뢰는 참으로 덧없는 신기루 같군요.”
그렇기에 시엔이 조소하듯 말을 내뱉었다.
“얼마 전까지 샤를마뉴 왕국과 혈맹을 내세우며 힘을 합친 주제에, 이제 와서 다시금 ‘관계의 저울’을 재고하며 타산을 따지는 꼴이라니. ─그래서야 누가 제국을 믿고 기꺼이 그대들을 신뢰할까요?”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당장의 이득을 위해 눈이 멀어 택하는 행동은 곧 신뢰의 상실로 이어지며, 설령 당장의 이득이 없더라도 미래를 위하는 침묵은 ‘신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쌓아 올린 신뢰의 힘이자, 제국이 갖지 못하는 덕목이기도 했다.
“귀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바로 그때, 참으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과거 칠왕국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제는 오직 하나의 나라로 거듭나 있는 브리타니아 왕국. 더 이상 비좁은 군도(群島)에 갇혀 있지도 않고, 대륙에 진출해 샤를마뉴 왕국의 심장을 빼앗은 나라의 왕이.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국이 ‘우리의 제의’를 앞서 받아들일 때 이야기다.”
“말씀해 보시죠.”
“로젤리아 샤를을 죽여라.”
아서왕이 말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 말과 함께 일대에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공기.
“그리고 남아 있는 샤를마뉴 왕국의 영토 전부를, 짐에게 넘겨라.”
왕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기꺼이 그대들과 손을 잡을 것이다.”
터무니없을 정도의 요구. 그 말에 로젤리아 샤를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린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여전히 오늘의 적이리란 법도 없다. 여기는 그런 세계다.
게다가 이전까지 그나마 억제제 역할을 해왔던 명분(名分)조차, 이 시점의 이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곳은 야만의 세계다.
그저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하고 빼앗는 세계.
“브리타니아 왕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요.”
제국의 황제, 디트리히가 뱀의 눈동자를 가늘게 찢으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이 자리에 마침 ‘죽여야 할 대상’이 있으니, 바로 약속을 이행해 드릴까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처음부터 이곳은 그걸 위해 존재하는 자리였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키득거린다.
브리타니아 왕국과 아서왕이 신성 제국과 손을 합친 이상, 이곳에 있는 ‘네 나라’ 중 남아 있는 두 나라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던 까닭에.
“로젤리아 샤를, 내가 왜 너의 죽음을 막아야 하지?”
그럼에도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로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테니까요.”
넷 다음에는 셋이 되고, 둘이 힘을 합치는 이상 하나는 둘을 이길 수 없다. 그것이 그나마 야만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지탱하는 최소의 ‘합리성’이다.
“착각하지 마라.”
그렇기에 공화국의 수장, 나이트워커 공작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로젤리아 샤를, 우리 가문은 절대로 널 용서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내뱉으며.
“너를 죽이는 것은 오직 ‘우리 가문의 인간’이다.”
“아, 그것참 무섭기도 하지.”
로젤리아가 남의 일처럼 어깨를 떨며 웃었다.
무서운 동시에, 적어도 이 순간 그 말처럼 믿음직하게 들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럼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 누구보다 듬직하신 ‘왕자님’이 되겠군요.”
로젤리아가 말했다. 마치 자신이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라도 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촤아악!
─그러나 그녀는 결코 예쁘고 마음씨 고운, 알기 쉬운 공주님이 아니었다.
실크처럼 부드럽게 흩날리는 칠흑의 날개를 펼치며, 뱀파이어 클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여왕’이 그곳에 있었다.
시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나이트워커 공작.
그리고 그들이 등 뒤로 거느린 이들 역시, 이미 세상의 섭리를 까마득히 벗어나 있는 강자 중의 강자들이다.
피의 어머니, 미망공 로드 스칼렛과 클랜의 최고위 장로들.
마찬가지로 시엔의 등 뒤에 있는 ‘죽음의 숙녀’ 라일라와 웃는 남자.
“확실히,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지요.”
로젤리아가 말했다.
“우리의 ‘사적인’ 싸움에 아무 이유 없이 백성이 끌려가 창을 쥐고 희생되는 것, 심지어 그 희생은 아무 가치조차 없는 개죽음에 불과하죠.”
그녀는 딱히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미 세상의 섭리를 까마득히 벗어나 있는 그들 사이의 다툼에, 더 이상 ‘일개 백성’ 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몇 명의 백성을 모아 징집하고 부대를 꾸려도 그들의 존재는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오직 이곳에 있는 강자, 규격 외의 괴물들에 의해 벌어지는 싸움이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다.
“그렇담 더 이상 질질 이야기를 끌 필요조차 없겠군.”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자리는 처음부터 이런 자리가 될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이런 자리’야말로, 당초 이곳에 모이는 이들이 바라는 진짜 목적이기도 했다.
그 남자, 아서왕과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진정한 귀족의 의무(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수행할 때가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