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성배 (1)
회담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 그게 이 세상이다.
시엔과 로젤리아, 로드 스칼렛과 라일라,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를 죽일 듯 으르렁댔던 그들이 이제는 힘을 합쳐 ‘공공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들이 힘을 합쳤던 브리타니아 왕국의 수장, 아서왕과 그의 기사들에 맞서─.
그리고 그곳에 있는 제국과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에 맞서서.
게다가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이 거느린 가족들은 라일라뿐이 아니다.
“음, 어지러운 싸움이 되겠는걸.”
가장 믿을 수 있는 최강의 하이마스터, 웃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제국 측, 정확히는 디트리히의 등 뒤에 있는 라일라의 동생이자 ‘죽음의 성모’라 불리는 그녀를 향해.
빌헬미나 아퀴나스.
“듣자 하니, 내 딸 눈에서 피눈물을 철철 쏟게 했다던데.”
일찍이 그녀와 싸울 당시 밴시 린이 보여준 모습을 되새기며 요한이 말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피눈물을 흘리는 법이지요.”
빌헬미나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보나 마나 그쪽도 적잖이 피눈물을 흘리셨겠지.”
요한 역시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산다는 게 다 그렇지?”
“─.”
“유감이네, 사랑하는 언니와 다시 대화를 나눌 기회를 내가 뺏어버려서.”
이어지는 그 말과 함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얼어붙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둘의 모습이 사라진다.
카앙!
어느덧 빌헬미나의 손에 들린 칠흑의 낫과, 요한의 손에 들린 태도(太刀)가 맞부딪치고 있었다.
하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이렇게나 믿음직스러운 동맹이 될 줄이야.”
마찬가지로 칠흑의 날개로 전신을 감싸고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로젤리아 샤를이 눈앞의 상대를 마주했다.
《불사자(임모탈)》의 이명을 가진 사안의 디트리히.
얼마 전까지 서로 손을 잡고 혈맹을 논했던 두 나라의 수장이, 이제는 서로를 향해 살의를 숨기지 않고 자세를 취했다.
“「뱀의 자세」.”
디트리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보이지 않는 죽음의 실이 수백 마리의 살아 있는 독사처럼 그녀에게 휘감겼다.
그러자 로젤리아가 나비의 비늘가루를 흩뿌리듯, 실크처럼 검고 어두운 날개가 흑색의 입자를 흩뿌렸다.
“왕의 자세.”
쿠웅!
바로 그때, 터무니없는 폭력의 정수가 깃든 일검이 로젤리아의 등 뒤에서 내리꽂혔다. 마치 나비의 날개를 낚아 갈가리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카앙!
그리고 그 일격에 맞서, 그가 그곳에 있었다.
“아,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어느덧 로젤리아를 지키듯 그녀와 등을 맞대고, 칠흑의 미스릴 단검을 고쳐 잡은 나이트워커 공작이.
“아아, 그야말로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늠름하시군요.”
“…….”
로젤리아가 미소 짓는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눈앞에 있는 상대를, 왕을 응시할 따름이다.
초점 없는 청백색의 눈동자로.
패왕(霸王) 아서.
“왕의 앞에 서지…… 마라.”
마치 곰처럼 커다란 거구에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신기로 전신을 완전무장하고 있는 괴물 중의 괴물.
아버지 우서 펜드래곤의 투구 구스화이트(Goosewhite), 물푸레나무 창 롱고미니아드, 요정왕 멀린이 직접 엮은 마법의 사슬갑옷 위가르(Wygar), 단검 카른웬하이, 방패 프리드웬, 전설 속의 명검 엑스칼리버는 물론, 그와 더불어 자웅을 겨루는 명검 클라렌트(Clarent)까지.
그의 나라가 ‘칠왕국’이라 불리게 된 이유이자, 칠왕국의 각 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는 일곱 개의 신기들.
그 전부를 손에 넣고 나라의 무게를 짊어진 왕.
언젠가 결판을 내야 할 상대였다.
그렇기에 시엔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싸움이다. 아니, 오히려 눈앞의 강자와 검을 맞대는 것은 지금의 시엔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기회가 될 테니까.
여전히 시엔의 성장은 끝나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이 쌓아 올린 경지, 그조차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무엇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절대 ‘그 남자’를 이길 수 없다.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륙 최강의 전력이 일제히 모여 있는 이 자리, 어떤 의미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절호의 기회가 될 자리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빌헬미나 아퀴나스와 더불어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추기경 전력’이 그곳에 있었다.
불쌍히 여기는 자, 긍휼(矜恤)의 마그누스.
기괴할 정도로 등이 굽고 쪼그라든 노구는, 마치 미라를 보는 것처럼 섬뜩하고 앙상하다.
“네 죄를 회개하겠느냐, 악에 물든 가엾은 소녀야.”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랗고 힘없는 육체. 그럼에도 그의 두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안광(眼光)은 결코 죽어가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회개해야 할 잘못 따위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오호, 그것참 오만하구나, 소녀야.”
라일라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죄인이란다.”
제국 국교회에서 운명의 창과 더불어 가장 성스럽게 다루는 신기─ 라지엘의 서(Sepher Rezial Hemelach)의 소유자.
하느님의 비밀을 뜻하는 천사 ‘라지엘’이 쓴 지혜의 보고.
제국 국교회에서는 정식 교리로 채택하고 있지 않으나, 일부 신비주의 파벌에서 최강의 천사 ‘미카엘’보다 강하다 일컬어지는 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신기.
“상품의 0품, 메타트론(Metatron) 강림.”
* * *
왕을 섬기는 최강의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성배의 기사, 갤러해드.
“호오, 이것 참.”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피의 어머니’가 놀라운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원탁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가 전쟁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
“설마 그사이 성배(聖杯)를 손에 넣은 것인가?”
“손에 넣은 것이 아니다.”
갤러해드가 대답했다.
“그저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 뿐.”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아서왕 이상의 강함을 지녔을지 모른다고 일컬어지며, 원탁의 기사 중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강함을 자랑하는 ‘가장 완벽한 기사(The perfect knight)’─.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존재하며, 그것을 찾았다.”
성배.
“그리고 이제는 나의 주군, 폐하를 위해 그 힘을 행사할 때다.”
신의 아들을 찔러 죽였다는 ‘운명의 창’과 더불어서, 신의 아들이 자신의 성혈(聖血)을 담았다고 불리는 잔.
“신의 아들이 흘린 피의 잔이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피의 어머니’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참으로…… 군침이 도는구나.”
죽음의 성모와 웃는 남자.
로젤리아 샤를과 쌍두까마귀의 가족, 디트리히.
시엔과 아서왕.
라일라와 「계약의 천사」 메타트론.
피의 어머니와 성배(聖杯)의 기사.
‘성배라고?’
눈앞에 있는 아서왕의 검, 바로 곁에서 어머니 라일라를 상대하기 위해 강림해 있는 0품 천사 메타트론, 각자가 드러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를 속속 드러내는 와중에도 그 존재는 특히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 시엔이 기억하는 미래 속에서 ‘성배’는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
갤러해드는 성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죽었고, 그것이 시엔이 기억하는 결말이다.
미래가 달라진 것은 시엔뿐이 아니다. 지금까지 걷지 못했던 길을 나아가는 것은 시엔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듯이.
그저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저 성배의 존재야말로 신성 제국이 샤를마뉴 왕국과의 혈맹을 파기하고 등을 돌린 가장 결정적 이유가 됐을 거란 사실이다.
당장 아서왕이 ‘전쟁의 악마’에게 혼을 팔아넘기고 악마의 군세를 얻었다는 사실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격돌하는 이 자리는, 어느덧 그들이 내뿜는 힘에 의해 하나의 이계(異界)로 뒤틀리고 있었다.
이 세계의 섭리와 상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와 경지, 신기로 무장하고 있는 강자들끼리의 싸움.
바로 그때, 상념에 빠진 시엔의 의식을 되돌리는 일격이 내리꽂혔다.
왕의 검이었다.
그 어떤 기교도 기술도 없이, 그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의 정수를 담아 내리꽂히는 베기.
그렇기에 그 압도적 폭력에 맞서, 시엔은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은 기교(技巧)로 아서왕의 일격을 비껴내려 했다.
그 순간, 왕의 손에 들린 물푸레나무창이 내리꽂혔다.
살해하는 창, 롱고미니아드.
지금으로서는 깊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당장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지금의 시엔이 전력을 다해도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도 완전하게 무장을 갖춘 왕을 쓰러뜨리는 것.
일격을 비껴내기 무섭게 시엔이 재빨리 몸을 틀었고, 왕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전력을 실어 일격을 휘둘러도, 아무 반작용도 없이 그것을 거두며 다시 다음 동작을 잇는다.
그 무엇도 왕의 움직임을 구속할 수 없었다.
저것은 힘이 세다거나 하는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마치 일체의 물리 법칙을 벗어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은 터무니없는 괴력(怪力)이다.
무식할 정도로 힘이 세다는 비유가 아니다.
그저, 괴이의 영역에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다.
‘저게 일곱 개의 신기 전부를 완전무장하고 펼치는 왕의 전력.’
어지간한 강자라 해도 하나의 신기를 무장하는 것조차 벅찰 터다. 그것을 무려 일곱 개, 심지어 그 출력을 100% 이상으로 끌어내고 있다.
저것이 바로 왕이 짊어진 무게였다.
‘보는 눈이 적지 않지만…….’
그렇기에 시엔 역시 도리가 없다. 손에 쥐고 있는 애검 ‘왕 시해자’와 더불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로서 주어진 또 하나의 신기를 꺼내야 할 때였다.
빙륜검 · 루나 피에나(Luna Piena).
나이트워커 가문이 가졌다 일컬어진 유일의 신기급 무기, 월광검과 더불어 이 세상의 누구도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신기급 무기.
이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 정도 되는 괴물들과의 싸움에서 계속해 그 존재를 숨길 수도 없다.
게다가 지금의 시엔에게는 마땅히 그것을 결정할 자격이 있었다.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누구의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다.
이제 시엔 나이트워커는 어머니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나이트워커 공작으로서, 가문을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때였다.
스릉.
공화국 말로 ‘보름달’을 의미하는 그 이름답게, 소름 끼칠 것처럼 차갑고 시린 서슬이 시엔 일대에 내려앉았다.
검이라고 해도, 엄밀히 말해 그것은 검(劍)의 형태가 아니었다. 쥐어야 할 칼자루도 없고 검신도 없다.
그저 달처럼 창백하게 빛나는 시엔이, 조용히 팔을 뻗는다.
그러자 헤아릴 수 없는 달빛들이 벼려지며 아서왕을 향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