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65화 (165/200)

165화. 성배 (2)

밤하늘에 달빛이 부서져 쏟아지듯, 헤아릴 수 없는 월광(月光)의 암기들이 흩뿌려지며 아서왕을 향해 쇄도했다.

카앙!

그러나 사방에서 흩날리는 암기 세례를 일검에 모조리 튕겨내며, 아서왕이 흥미로운 듯 입을 열었다.

“호오, 설마 이것이─.”

일곱 신기로 전신을 완전무장하고 있는 곰처럼 커다란 거구의 왕이, 그의 애검 ‘엑스칼리버’를 고쳐 잡는다.

쿠웅!

동시에 지금까지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기백이, 왕이 딛고 있는 발밑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쩌적, 쩍.

딛고 있는 땅이 갈라지고 왕의 주위에 힘이 휘몰아치며, 곰이 포효하는 것처럼 소리를 높였다.

「올 포 원(All for One)」.

일곱 신기로도 모자라, 왕국 백성 전체의 의지를 홀로 등에 짊어진 왕이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찌부러져 압사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게를,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당당히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어깨 위에 짊어진 것들에게, 새파란 하늘을 약속하기 위해.

“백성은 왕의 하늘이며, 왕은 백성에게 창천(蒼天)을 약속하는 자.”

그렇기에 그 앞을 가로막는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

시엔조차 무심코 압도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기백을 내뿜는 당대의 최강자 중 하나.

“왕의 앞에…… 서지 마라.”

그 말과 함께 왕이 땅을 박찼다.

박차는 것은 왕 하나가 아니었다. 그가 어깨에 짊어진 백성 전체의 의지, 그 전부가 그대로 왕이 짊어진 무게가 되어 시엔을 향해 내리꽂혔다.

쿠웅!

물 흐르듯 일격을 비껴내려 했으나, 왕의 검에 실린 괴력은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시엔의 자세가 그대로 고꾸라져 무너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위력.

그는 이미 이 세계의 섭리나 물리 법칙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괴력(怪力)의 화신 그 자체였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남자.

왕이 가진 철의 의지 앞에서는, 시엔조차 마음대로 호흡할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압사할 것 같은 터무니없는 압박감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

시엔에게 있어 나라나 백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가족을 지키는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하니까.

아서왕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나라와 백성이 전부였다.

왕은 나라를 짊어지는 자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등으로 나라의 무게를 짊어진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진 것의 무게는, 시엔 역시 결코 왕에게 뒤지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다. 물 흐르듯 비끼지도, 중심을 흘려내지도 않는다.

카앙!

그저 똑바로 마주하며 검을 휘두를 따름이다.

빙륜검(氷輪劍), 그 이름처럼 창백하고 시린 달빛을 내뿜는 ‘보름달의 검’이 어느덧 시엔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락의 자세」.”

그와 함께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검식 중, 일찍이 시엔이 마스터했고 애용하는 검식이자 그 무엇보다 굳센 강검(剛劍)의 묘리를 가진 검식을.

“호오.”

그 모습을 보고 아서왕이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감히 짐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하겠다는 것이냐.”

“못할 거라도 있나?”

빙륜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시엔이 되물었다.

자신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가족의 무게를 헤아리며.

이제는, 시엔이 아버지였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

시엔을 길러준 어머니 라일라가 홀로 가족의 무게를 짊어진 채 싸워왔듯, 그 어머니를 길러준 아버지 ‘빌 나이트워커’가 그랬듯, 이제는 자신이 가족을 짊어질 차례였다.

마치 밤하늘 위에 걸린 달을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아서왕의 패검이 휘둘러졌다.

그에 맞서 보름달의 검이 휘둘러졌다.

검이 맞부딪쳤다. 그러나 맞부딪친 것은 결코 칼끝이 다가 아니다.

두 사람이 등 위에, 어깨 위에 짊어진 것들의 무게였다.

그것은 어느 쪽이 더 작지도 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았다.

똑같이 무거웠다.

달을 떨어뜨리는 왕의 검에 맞서 ‘별과 단검의 주인’이 검을 휘둘렀다.

쿠웅!

그곳에 있는 왕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

왕과 아버지가 격돌했다.

“무엇이 그리 소중하지?”

검이 부딪히고 의지가 부딪히며, 팽팽하게 이루어진 대치 속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나라, 백성, 영토, 그까짓 것들이 도대체 네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토록 소중하지?”

“짐이 왕이기에.”

그리고 왕이 대답했다.

“가뭄이 오든 홍수가 쏟아지든, 풍작이든 흉작(凶作)이든, 짐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두가 짐의 일이다.”

“…….”

“백성이 비좁은 군도에 갇혀 살 곳이 없는 것도 짐의 책임이고, 외적의 약탈에 시달려 터전을 빼앗기고 고통받는 것도 짐의 책임이다.”

그저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렇기에 짐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왕의 운명이다.”

아서왕의 말을 듣고 시엔이 차갑게 조소했다.

조소와 동시에 그 말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가문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시엔의 책임이니까.

가족이 임무에 실패하는 것도 시엔의 책임이고, 가족이 죽거나 사로잡혀 고통받는 것도 시엔의 책임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운명이고, 라일라가 어머니로서 평생을 짊어진 운명이기도 했다.

검(劍)이 맞부딪친다. 강철에 깃든 의지가 맞부딪친다.

왕을 나락으로 쓰러뜨리려는 시엔의 검과, 달을 땅으로 떨어뜨리려는 아서의 검이 부딪쳤다.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끝도 없이, 기약도 없이 부딪치고 힘을 겨루고 멀어졌다 다시 부딪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목에 감각이 없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따갑다. 호흡이 가쁘고 숨이 찬다.

지친다.

왕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육체는 진즉에 힘을 다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을 구속하는 것들이 그들의 존재를 묶고 몸을 묶고 의지를 묶어 지탱해주고 있다.

쿠웅!

너무나도 무거운 나머지, 평소에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조차 쉴 수 없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이 왔을 때, 그 무게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최후의 대들보가 되어준다.

그 무게가, 그들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왕과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왕은 나라의 아버지고, 아버지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가 그것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헤쳐오며 고통을 참아왔는지 알 수 있다.

지켜야 할 것,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기에 무너질 수 없다.

그렇기에 빼앗는다.

상대의 것이 소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탐이 나서 빼앗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소중한 것이 타인의 소중한 것보다 좀 더 소중했던 까닭에.

“악인의 자세─.”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겁(劫)」.”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자세는 곧 신념이고, 신념은 곧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상대가 짊어진 소중함의 무게를 이해하는 까닭에, 그것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까닭에, 시엔 역시 새롭게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것이 악의 방식이니까.

왕 역시, 나지막이 읊조린다.

“원 포 올(One for All).”

모두를 위하는 하나.

그러나 그가 말을 읊조리고 나서도, 여전히 그 남자에게 깃든 모두의 힘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모두는 하나를 위해(올 포 원).

그리고 하나는 모두를 위해(원 포 올).

모두가 위하는 하나가, 모두를 위해 강철 같은 의지를 다진다.

자기 자신을 향해 다그치듯이, 서로가 읊조리고 나서 검을 맞부딪쳤다.

왕과 아버지, 그리고 두 명의 아버지가 검을 부딪쳤다.

쿵!

일섬 끝에, 정적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왕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렸고, 시엔의 코트 자락 역시 미풍(微風)에 일렁이듯 자그맣게 나부꼈다.

거창하게 휘몰아치는 힘의 폭풍 따위는 없었다. 귀를 찢을 것 같은 굉음도 없었다.

그저 지칠 대로 지쳐 다 쓰러져가는 두 개의 낡은 수레가, 그들을 지탱하는 가죽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는 것 같은 움직임.

그리고 낡을 대로 낡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하나의 수레바퀴가,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휘감고 지탱하는 가죽끈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큇살이 부서지고 낡은 나무가 쩍쩍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듯이.

“왕의 앞을…….”

그 와중, 왕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막지…… 마라.”

쿠웅!

그곳에 있는 암살자들의 아버지 앞에서 비틀거리며.

왕이,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할 말이다.”

시엔 역시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무심코 휘청거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왕국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  *  *

“주군……!”

성배의 기사, 갤러해드가 당황하며 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운명의 여신을 본 적이 있니, 아이야?”

“커헉!”

원탁의 기사단 내 최강의 기사이자, 성배의 힘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는 아서왕 이상의 강자로 거듭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사가 피를 내뿜었다.

그곳에 있는 ‘어머니’의 앞에서.

피의 어머니, 미망공(未亡公) 스칼렛.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단다. 심지어 대화도 나눴지.”

운명의 창, 그 이상이라 일컬어지는 신기 ‘성배의 힘’을 갖고도 쓰러뜨리기는커녕, 쐐기를 박는 일격을 허락하며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고 있는 기사를 보며 피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말이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어 하더군.”

“뭐가…… 말이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듯이.

“왜 인간들이 자신을 섬기고 경외하며,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이토록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름를 부르짖는지 말이야.”

성배를 손에 넣을 운명을 타고난 기사, 태어날 때부터 그 운명을 의심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온 기사를 향해 로드 스칼렛이 말했다.

“정작 그녀 자신은 조금도 인간을 사랑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데 말이지.”

─그것이 운명의 여신이다.

그녀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쓰러진 채 피를 흘리며, 마찬가지로 자기 주군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며, 성배의 기사 갤러해드가 이를 악물었다.

기사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기사였다.

그렇기에 그가 신기 ‘이상한 띠의 검’을 고쳐 잡고서 최후의 일격을 먹이려는 찰나.

촤악!

그녀의 손이 갤러해드의 흉갑을 찢고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마치 심장을 움켜쥐듯 무엇을 움켜쥐고 뽑아냈다.

피와 함께 흩뿌려진 그것은, 심장이나 체내의 장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금색의 잔이었다.

포도주처럼 붉은 핏빛의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는.

“아아, 신의 아들이 흘린 피가 담겨 있는 잔이라.”

그 잔을 손에 쥐고 로드 스칼렛이 황홀하게 미소 짓는다.

교회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은, 다시 말해 신과 다름없는 존재다.

따라서 신의 아들이 흘린 피는 곧 ‘신의 피’를 뜻할 것이다.

그리고 신이 흘린 피를 눈앞에 둔 뱀파이어가 해야 할 일 따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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