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새로운 시대
원탁 최강의 기사, 갤러해드 경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언젠가 성배를 찾게 될 운명을 가진 기사라고 여기며, 누구보다 그 운명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긍지 높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명대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전설 속의 성배를 찾아냈다.
그는 ‘운명대로’ 성배를 손에 넣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으며, 동시에 이것이 그의 운명이 가리키는 말로였다.
“아아, 신의 아들이 흘린 피가 담겨 있는 잔이라.”
그 잔을 손에 쥐고 로드 스칼렛이 황홀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신의 아들이 흘린 피는 곧 신이 흘린 피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금색의 잔을 높이 치켜들고, 피의 어머니가 즐거운 듯이 속삭였다.
황금의 잔을 따라 핏빛의 액체가 넘실거린다. 사람의 피가 아니다. 그렇다고 알기 쉬운 포도주조차 아니었다.
신의 피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그리고 마치 교회에서 세례성사의 전례를 집전하는 것처럼, 로드 스칼렛이 금빛 잔을 높이 치켜들고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
그 의미를 헤아린 순간, 제국 측의 인간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당황의 빛이 내려앉았다.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과 격돌하고 있던 죽음의 성모, 상품의 0품 ‘메타트론’을 강림시키고 있던 긍휼의 마그누스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신의 피를 눈앞에 둔 흡혈귀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흡혈귀는, 결코 그녀가 다가 아니었다.
후우웅!
어느덧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구속하고 있었다.
마치 신의 섭리가, 이 성스러운 의식을 방해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아, 경애하는 나의 어머니.”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밤과 피의 여왕, 로젤리아 샤를이 피의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마치 어린 시절, 시엔이 라일라의 앞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세례성사’를 받을 때처럼.
“─이것은 나의 피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엄숙하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의례가 끝을 맺었고, 피의 어머니는 기꺼이 금빛의 잔을 내밀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그녀의 새로운 딸을 위해서.
로젤리아는 금색의 잔을 받자마자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그 시절의 시엔과 같다.
설령 그것이 독이 든 성배라 하더라도, 어떤 리스크가 있다고 할지라도, 추호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아아…….”
황홀하다는 듯이 몸을 떨며 로젤리아가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의 어머니 역시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신화시대부터 살아온 최초의 뱀파이어, 그리고 신이 흘린 피를 손에 넣은 흡혈귀, 두 모녀(母女)가 그곳에 있었다.
“─.”
그리고 누구도 감히 앞을 가로막지 못할 것 같았던 왕이 쓰러졌다.
패왕 아서.
누구도 아니고 시엔의 손에 가로막혀서.
원탁 최강의 기사 역시 패배했다.
“……여기까지인가.”
그렇기에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브리타니아 왕국 유일의 생존자, 요정왕 멀린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어리석은 왕이여─.”
알기 쉬운 배신자의 웃음이나 조롱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미래를 점지하고 운명을 예지(叡智)하며 발버둥을 쳐도…….”
쓰러진 아서의 시체를 보며 멀린이 말했다.
“설령 세상의 끝까지 도망쳤다고 생각해도, 나와 우리는 여전히 ‘그녀의 손바닥’ 위구나.”
누구도 운명의 손바닥 위를 벗어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미래를 보는 힘을 가진 요정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서왕이 죽고 원탁 최강의 기사가 쓰러진 시점에서, 일찍이 칠왕국이라 불린 왕국의 ‘운명’ 역시 끝이란 사실을.
그 사실에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아서왕과 그의 칠왕국 역시 시엔과 같았다.
비록 지키려는 것은 달랐으나, 그들 역시 기꺼이 운명에 맞서 발버둥 치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발버둥을, 누구도 아니고 시엔의 손으로 끝내버렸다.
그 사실이 그저 우스꽝스러웠다.
어쩌면 시엔 역시 그들과 무엇 하나 다를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그리고 요정왕 멀린이 시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비로운 이채(異彩)가 서린 눈동자가, 시엔의 앞에 다가올 미래와 운명을 예지하듯이.
“─아.”
순간, 멀린이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콰직!
깨닫고 보니 ‘피의 어머니’가 어느덧 요정왕의 목덜미를 향해 그녀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꽂아 넣고 있었다.
신의 피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해도, 멀린 역시 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온 ‘고대의 요정’이다.
그러나 조금 이상했다.
고통 속에서 전신의 피를 빨리는 와중에도, 요정왕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시엔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전하려는 걸까. 혹은 무엇을 본 걸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모녀가 나란히 포식을 마치고, 남아 있는 각자의 적들을 바라보았다.
“아, 실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답니다.”
로젤리아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토록 배가 부르게 식사를 마쳤으니, 우리는 이쯤에서 물러나야겠군요.”
“─!”
누구 맘대로,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과 제국은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나이트워커 가문이 직전에 손을 잡고 있던 것은 그곳에 있는 밤과 피의 여왕, 로젤리아 샤를 측이었으니까.
게다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시엔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로젤리아 샤를은, 이전까지의 그녀와 감히 비교조차 불허하는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게다가 아서왕과의 싸움을 통해 지칠 대로 지친 지금의 시엔이, 그녀를 상대로 승산이 있을 리 없다.
“다시 보게 될 날을 기대하죠, 저의 왕자님.”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곳에 있는 시엔 나이트워커를 향해.
“…….”
일순, 처음부터 이게 샤를마뉴 왕국과 신성 제국이 함께 짜고서 치는 사기극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아마 신성 제국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일 테니까.
하지만 그 남자, 밤의 아버지에게는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공화국도 제국도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거느린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일찍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이 그에게 있어 그러했듯이.
‘설마 제국을 버리고─.’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자니까.
그러나 아직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다.
지금 시점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이곳에 온 이들 모두가 그럴싸하게 세운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계획을 가진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이고 나서, 최후의 승자는 결국 로젤리아 샤를의 몫으로 돌아갔다는 것.
결과적으로 아서왕을 쓰러뜨린 시엔의 승리는, 그녀에게 있어 어부지리가 되었다.
그와의 싸움을 통해 시엔이 손에 넣은 ‘값진 성장’조차 색이 바랠 정도로 터무니없는.
“……물러나죠.”
차갑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나이트워커 공작이 입을 열었다.
* * *
하나의 전쟁이 끝을 맺었다.
수도가 함락당하고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샤를마뉴 왕국은 여왕 로젤리아 샤를의 지도 아래 다시 단결해 싸웠고, 이 땅에서 ‘브리타니아 왕국’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대륙을 잃고 다시 비좁은 군도 속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대륙의 누구도 그들에게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저 아서왕의 지휘 아래 하나가 되었던 왕국은 다시 세 갈래 네 갈래로 쪼개지고, 급기야 도로 칠왕국이 되어 끝없는 내전(內戰)의 불꽃에 휩싸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승리를 손에 넣은 여왕, 로젤리아 샤를은 그 어느 때보다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과 우러름을 받았다.
「붉은 성녀」 로젤리아 샤를.
이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그녀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그녀에게 내려준 힘이 정말 ‘하느님의 것’일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에게 ‘신과 같은 모종의 힘’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 * *
쌍두까마귀의 가족(패밀리)을 이끄는 장녀,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그날의 뼈저린 패배를 보고했을 때.
그들 가족의 아버지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직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그곳에서 벌어진 일 따위는 무엇 하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리고 그곳에 있는 아버지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겨진 가족들의 수가 많지 않답니다.”
나이트워커 가문과의 전쟁, 심지어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의 전쟁에서도 적지 않은 숫자의 가족들이 희생당했다.
더 이상 그들을 상징하는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紋章)에, 예전과 같은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국의 위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퍼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밤의 아버지는 묵묵하게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
그렇기에 빌헬미나 역시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아버지가 없는 가족을 홀로 이끄는 장녀처럼.
* * *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지하.
바로 그곳 나락의 방에서, 눈을 감은 시엔이 심상(心象)을 떠올렸다.
자신이 앞을 가로막고 자신이 쓰러뜨린 왕의 모습을.
쿠웅!
순간, 바로 그 심상이 시엔의 눈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철 같은 남자의 의지.
일곱 신기로도 모자라, 왕국 백성 전체의 의지를 홀로 등에 짊어진 왕.
그와의 싸움이 시엔에게 준 성장을 되새겼다.
비록 성배를 손에 넣은 로젤리아 샤를의 승리 앞에서 빛이 바랬다고 하나,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 ‘성배’를 손에 넣은 것은 시엔 역시도 마찬가지임을.
당대의 최강자 중 하나, 아서왕은 죽었다.
마찬가지로 롤랑도 죽었다.
모두 시엔의 손에.
그들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시엔이 깨우친 성장과 배움은 감히 성배라 부를 가치가 있는 승리였다.
게다가 오스왈드 그란델 역시 죽었으며, 살아남은 라일라 역시 더 이상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아니다.
하나의 시대가 완전히 끝이 났고,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막을 열었다.
그렇기에 이 시대, 당대의 최강자 중 하나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는 나지막이 각오를 다졌다.
각오를 다지며 휘둘러진 일검에, 눈앞에서 망령처럼 일렁이는 아서왕의 심상이 스러졌다.
‘로젤리아 샤를.’
아울러 시엔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의 강자로 거듭나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시대가 바뀌는 와중에도, 여전히 밤의 그늘 속에 숨어 침묵하는 ‘밤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여전히 이 세상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렇기에 시엔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강해지는 것.
시엔을 위협하는 적들, 오랜 적과 새로운 적들에 맞서 자신의 전부를 지킬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