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67화 (167/200)

167화. 암살자들의 아버지 (1)

“여기 있었느냐, 시엔.”

“루나 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시엔이 고개를 돌리자,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의 다크 엘프가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 이름으로 저를 부르시네요.”

시엔이 짐짓 짓궂은 목소리로 말하자, 루나 역시 당황하지 않고 점잖은 미소와 함께 예를 표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여.”

“……농담이에요.”

그렇기에 오히려 당황해서 가문의 최고 원로를 제지하는 것은 시엔 쪽이었다.

“그냥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불러주세요.”

“걱정하지 마렴, 시엔.”

그리고 루나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나 역시, 때와 장소를 가리며 ‘가주’를 존중할 정도의 지혜는 있으니.”

가주. 그 말의 무게에 시엔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실감하려 해도 ‘가족’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금 실감하고 마는 까닭에.

“회담에서의 실패는 모두 제 책임이었어요.”

시엔이 말했다.

더 이상 그들 가문의 실수와 실패는 라일라의 책임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의 시엔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미래의 지식이나 이정표조차 없다.

“어머니께서는…… 좀 더 나은 결정을 하셨을까요?”

“글쎄.”

루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어떤 잘못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너는 그녀를 나무라지 않을 거란 사실이지.”

“……그게 가족이니까요.”

“그걸 알고도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루나가 즐거운 듯이 물었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도, 똑같은 잣대를 자기 자신에게 대셨을 테니까요.”

그게 바로 가족을 짊어지는 자의 무게였던 까닭에.

“로젤리아가 오롯이 성배의 힘을 손에 넣었을 때…….”

시엔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거기에 깃든 힘은, 제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신기와도 비할 게 아니었어요.”

“신의 아들이 흘린 피를 담고 있는 잔이니 말이지.”

“신의 아들…….”

또다시 그 이야기다.

천 년 전,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죄를 홀로 대속하고 고대 제국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손에 처형되었다 일컬어지는 성자.

처형장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 찔러넣은 창은 훗날 ‘운명의 창’이라 불리는 신기가 되었고, 처형 직전 신의 아들이 그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만찬을 나눈 잔(盞)은 ‘성배’가 되었다.

운명의 창은 그 누구보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명성을 들었고 목격해온 시엔이었으나, 성배는 그렇지 않다.

당장 시엔이 기억하는 실패했던 미래 속에서, 성배는 마지막까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배를 찾으러 떠났던 기사 갤러해드 경 역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시엔이 기억하는 ‘성배 탐색’의 결말이었다.

무엇이 그들의 미래를 달라지게 했을까. 아니, 정말로 달라지기는 했을까.

설령 운명이 달라져 성배를 손에 넣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갤러해드 경이 바라는 형태의 운명이 아니었다.

시엔 역시 마찬가지다.

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구도 성배가 가진 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정작 성배를 손에 넣은 원탁 최강의 기사 갤러해드 경은,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성배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피의 어머니에게 패배했다.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

그럼에도 루나가 말했다.

“당장 너 역시, 운명의 창을 완성했던 체사레를 상대로 승리하지 않았더냐.”

그날, 시엔 나이트워커는 일부러 자신이 가진 최후의 조각을 체사레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가 운명의 창을 오롯이 완성하고 거기에 깃든 전능함에 빠져 있던 순간, 그게 체사레의 패인(敗因)이 되었다.

“그렇겠죠.”

시엔이 자조하듯 대답했다.

“적들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강력한 신기를 수중에 갖고 있든, 무엇 하나 달라질 것은 없죠.”

백성 전체의 의지를 두 어깨에 짊어진 왕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듯이.

가족의 의지를 짊어진 아버지 역시, 그의 앞을 가로막고 가족을 위협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시엔의 각오였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그 각오 없이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자리다.

새로운 나이트워커 공작,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자리.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피로(披露)의 장이 막 열리고 있었다.

*  *  *

“어서 오렴, 시엔.”

저택의 지하를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라일라가 시엔을 맞아준다.

“어머니.”

“표정이 무척 개운해졌구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돼서요.”

“그래, 참으로 다행이란다.”

“시엔! 어서 와!”

헨젤과 그레텔 역시 마찬가지였고, 시엔의 형 비고와 대녀 티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서 오시오, 시엔 어르신!”

“라힘 삼촌…….”

그리고 어느 때보다 과장되게 예를 표하는 그 모습에, 시엔이 당혹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못 본 사이, 많이 강해지셨네요.”

웃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마치 가문의 젊은이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어르신의 말투.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으나, 라힘은 개의치 않았다.

“모두 어르신이 준 가르침 덕분이오!”

“자랑스러워해도 좋단다, 시엔.”

어느덧 그곳에 있는 이자벨이 놀랄 것도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멍청이가 알아들을 수준으로 뭘 가르쳐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누님.”

“두, 두 사람 모두, 싸우지 마…….”

어느덧 미하일과 이자벨 남매의 대모 앨리스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고, 두 남매 역시 언제 티격태격했냐는 듯 같은 마음이 되어 그녀를 달래주기 바빴다.

“돈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렇기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들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들 가문의 대부, 시엔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예를 표하는 가족들.

새로운 가족들이 메이드맨이 되거나 마스터가 되고, 다시금 그들이 새로운 대부모로 거듭나 대자(代子)를 받고.

어느덧 막내였던 시엔의 위치는, 이제 가문 내에서도 순수 서열로 절대 낮지 않은 자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때마다 지켜야 할 것들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고, 어느새 왕국과 백성 전체의 의지를 짊어진 아서와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업(業)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무겁다. 동시에 이 무게가, 시엔이 무너지려 할 때 다시금 그를 지탱해줄 버팀목이 될 것이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마지막까지 저주처럼 시엔의 존재를 속박하게 될 버팀목이.

*  *  *

“돈 나이트워커.”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시엔이 ‘새로운 나이트워커 공작’이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축하하는 것은 가문 내에서의 일로 그치지 않았다.

이 나라, 베네토 공화국의 진짜 지배자라 할 수 있는 10인 위원회를 비롯해 총독과 대평의회, 원로원 등 온갖 명목상의 정치 기구들에 속해 있는 고위층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어서들 오시지요.”

그렇기에 시엔 역시, 라일라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아주었다.

예를 차리며 시엔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감정 없는 눈동자와 사무적인 미소가 걸린 입가로 화답해준다.

“모니카 써틴 은행장님도 어서 오세요.”

“어이쿠, 이것 참.”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광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돈 시엔, 아니,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으쓱이고 나서는, 정중히 가면을 벗고 흑청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예를 표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행장님.”

아울러 예를 표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시엔 역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여러 가지로 이 나라가 어려워진 와중, 은행장님의 활약이 무척이나 힘이 되고 있답니다.”

“뭐, 도둑놈 하는 일이 금고에 돈 채우는 것 말고─ 어이쿠야.”

말하다 말고 실언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니카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틀어막는 모습이, 시엔으로서는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동시에 그것이 그곳에 있는 그녀, 공화국 국영은행장이자 첩보장관의 이름을 가진 ‘모니카 써틴’의 위신이기도 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시엔과 가장 가까운 측근 중의 측근.

물론 가족을 제외하고 시엔과 가까운 인간이, 모니카 하나는 아니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해 그곳에 있는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시엔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당신.”

뭍으로 올라온 것도 모자라 내륙에 있는 이곳 공작령까지, 인간의 두 다리와 드레스를 입고 마린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마린 제독.”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서로가 각자의 칭호를 호명하며 짓궂게 미소 짓는다.

손등 위가 아니라, 부부의 사이를 드러내듯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을 통해 모두의 앞에서 관계를 과시하며.

“나이트워커 공작령에 온 걸 환영해.”

그녀가 시엔과 결혼하고 나서, 생전 처음으로 그녀의 두 발을 들이는 ‘남편의 저택’이 그곳에 있었다.

*  *  *

밤과 피의 왕국, 그 이름처럼 그 나라를 다스리는 귀족(Noble Blood)들은 말 그대로 ‘귀족의 모범’ 그 자체였다.

그들은 결코 백성들에게 싸움을 맡기는 법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고, 누구보다 앞장서 솔선수범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샤를마뉴 왕국의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곳에는 늘 검고 어두운 밤과 유혈이 낭자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모습을 형용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서, 성녀…….”

“성녀님─.”

여전히 그녀는 실크처럼 부드럽게 흩날리는 날개를 달고 있었다. 이전처럼 검고 어두운 흑익이 아니라, 이 세상 무엇보다 순수하고 깨끗하게 빛나는 백색의 날개를.

순백의 날개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성스러운 오라 앞에서, 브리타니아 왕국의 패잔병들은 그저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무릎 꿇고 조아리는 그들을 향해 성녀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콰직!

성녀의 미소와 함께, 병사들의 육체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흩뿌려진 그들의 피와 살점이 로젤리아를 핏빛으로 물들였고, 그렇기에 적들의 피로 목욕을 하는 ‘붉은 성녀’가 그곳에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감미로운 희열에 젖은 채로.

동시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정체 모를 갈증 속에서, 더더욱 애타는 목을 필사적으로 축이며.

이 저주와 같은 굶주림을 채워줄 ‘동화 속 왕자님’을 갈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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