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암살자들의 아버지 (2)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지고, 갈 곳 없는 시엔을 거두어준 것은 암흑가의 범죄 길드였다.
그리고 일곱 살 때, 시엔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칼끝을 찔러넣었을 때, 발버둥 치는 몸 위로 칼날을 내리그으며 살을 찢고 피에 손이 젖는 감각이 손에 생생하다.
어린 시엔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 정확히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재능. 사람을 죽이는 재능.
암살자의 재능이었다.
“…….”
짧은 회상 끝에 눈을 뜬다.
지금, 일곱 살 때 사람을 처음으로 죽였던 어린 암살자는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돈 나이트워커.”
“만수무강하소서,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공화국에 영광이 있기를.”
그렇기에 헤아릴 수 없는 공화국의 지배자와 가문의 가족들이 입회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경외하며 예를 표하는 이들을 향해 시엔이 입을 열었다.
손에 들린 유리잔을 따라 일렁이는 핏빛의 포도주를 뒤로하고.
이 나라는 하나의 커다란 정원과 같다.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은 대대로 그 커다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들이다.
“지금, 우리 가문과 이 나라는 어려운 시련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시엔이 입을 열었다. 얼어붙을 것처럼 내려앉은 대회당의 정적 속에서, 아스라하게.
“그리고 저는 이 시기에 어머니의 뒤를 이어, 그 누구보다 막중하고 무거운 자리에 오르기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흘끗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일찍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렸으며, 이제는 과거에 썼던 암살자의 진명 ‘죽음의 숙녀’라 불리는 가문의 그랜드마스터를.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보다 이 책무를 잘 수행할 거란 확신이 없습니다.”
“…….”
“그러나 이 이상, 어머니께서 홀로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시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것을 끝으로 손에 들고 있는 유리잔을 높이 들며, 시엔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문과 공화국에 영광을.”
* * *
제국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의 슈파이어 대성당.
바로 그 성당의 고해성사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를 고해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늘 고해를 듣는 쪽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자매님.”
“저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합니다.”
칠흑의 베일을 쓴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말을 잇는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에 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매님.”
“…….”
젊은 신부의 말에 빌헬미나는 잠시 침묵하고 나서, 이내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신부님?”
“물어보시지요.”
“진실과 믿음, 둘 중에 어느 쪽이 훨씬 더 가치 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믿음입니다.”
젊은 신부가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느님께서 모두가 알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진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끝없이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그 증거지요.”
결과가 정해진 시점에서 내기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도박과 배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 갖는 아름다움이야말로, 믿음이 진실에 앞서는 까닭이다.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고 나서 숭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
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면서도 숭배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자매님.”
“……그렇군요.”
그 말에 빌헬미나가 비로소 미소 짓는다.
그녀는 이미 배팅을 했다. 도박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달라질 것은 없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까.
* * *
“시엔.”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엔이 눈을 떴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집무실.
시린 달빛을 역광으로 등진 채,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더 이상 라일라가 아니었다.
“어머니.”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조금요.”
그곳에 앉은 나이트워커 공작,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내 아들이라서 무척 자랑스럽단다.”
라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시엔의 어머니였던 까닭에.
“당신이 제 어머니란 사실 역시도요.”
시엔이 말했다.
“그래도 아직 상념에 잠겨 있기는 이르단다. 여흥이 무르익고 있으니, 좀 더 그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두렴.”
“확실히 쉬운 자리가 아니네요.”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라일라가 웃었다.
“대화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말이야.”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자리를 비운 시엔이 재차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공화국의 온갖 인간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고개를 조아리고 아첨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이트워커 공작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이트워커 공작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그들의 아첨과 아양, 침 발린 말을 들으며 침묵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단다. 그렇기에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네가 그들처럼 어리석어져야 하지.’
“당신.”
그렇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시엔은 그야말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마린.”
모두가 보는 앞이기에, 마린 역시 마땅히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격식을 차린다.
우아하게 흩날리는 사파이어색 머리카락과 드레스, 옷자락 밑으로 희고 가느다란 인간의 두 다리를 과시하며 그녀가 다가왔다.
어리석은 자들의 목소리 역시 그쳤다.
아무리 그들이 어리석어도, 감히 그들의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은 까닭에.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마린이 말했고, 시엔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아, 좀 살 것 같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마린이, 직전까지 가면처럼 얼굴에 덧씌운 표정을 거두고 소리를 높였다.
“내가 할 말이지.”
“응, 그런 것 같아 보이더라.”
마찬가지로 시엔 역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엔의 침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들어온 두 사람이, 마치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어린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키득거린다.
“보자마자 알 것 같았어.”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바로 옆에 걸터앉은 마린을 보며 시엔이 말했다.
그들, 서펀트 가문의 인간들은 그 어떤 때에도 연안(沿岸) 너머로 발을 들이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마린이 직접 두 발로 비교적 내륙에 있는 나이트워커 공작령까지 왔다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 남편이 새로운 ‘나이트워커 공작’의 자리에 앉는 날이니까.”
마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거든.”
“뭘?”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을.”
“…….”
마린의 말에 시엔이 조용히 침묵했다.
“돌아갈 때는 내가 직접 바래다줄게.”
침묵 끝에 시엔이 짐짓 화제를 돌린다.
“당연히 그래야지.”
마린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하고 나서는, 다시금 어색하고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였구나.”
“뭘 새삼스럽게 그래?”
“아니, 그냥.”
정적 끝에 마린이 쓴웃음을 짓는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부부다운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왜, 해보고 싶어?”
“뭐, 뭐?!”
시엔이 짐짓 짓궂게 물었고, 마린의 얼굴이 이내 당혹 속에서 새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수줍음은 잠시였다.
“너나 나나, 피차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수줍음 끝에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마린이 말했다.
“그게 우리 사이의 약속이니까.”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부서지는 파도 소리 속에서 속삭였던 마린의 말을 떠올린다.
만약에…….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설령 시엔에게 가족이 전부고 그 이외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이제는 그녀 역시 더없이 ‘가족’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
바로 그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노크와 함께 나이트워커 가문의 늙은 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뜻밖의 손님이 오셨습니다.”
* * *
뜻밖의 손님이 그곳에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중성적이고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장발의 남성.
샤를마뉴 왕국의 ‘귀족’이 그곳에 있었다.
누구보다 앞서 귀족의 의무를 수행하고 모범을 보이며, 최전선에 나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 귀감.
“무슨 용무지?”
“저는 어디까지나 ‘여왕 폐하’의 뜻을 대리하는 대사로 이 자리에 왔답니다, 공작 각하.”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에 섬뜩하게 솟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남자가 미소 짓는다.
샤를마뉴 왕국의 공작, 블라드.
심지어 왕국에서 세속의 작위를 내려받기 전에도, 가시공(公)의 이명으로 불린 뱀파이어 클랜의 장로 중 하나.
실내를 내달리는 얼어붙은 냉기 속에서, 블라드 공작이 시엔의 손등 위에 입맞춤했다.
보란 듯 입술 뒤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송곳니의 서슬을 감추지 않고.
“폐하께서는 제안을 하고자 하십니다.”
“말해봐라.”
“우리 클랜은 당신들의 ‘가족’을 존중합니다. 우리들 피의 어머니, 여왕 폐하를 비롯한 모두가 나이트워커 가문의 위대한 결속과 사랑을 깊이 존중하고 계시죠.”
“앞으로는 할 말을 잘 골라야 할 거다.”
스릉.
얼핏 조롱처럼 들리는 그 말에, 시엔이 ‘왕 시해자’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겨눈다.
“물론 여왕 폐하 역시, 이제 와서 우리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화해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럼 뭘 기대하는 거지?”
바로 코앞에서 겨누어진 날붙이의 서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블라드 가시공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공공의 적’ 앞에서, 잠시 손을 잡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공공의 적이라.”
그 말을 듣고 시엔이 차갑게 조소했다.
“그 전에, 너희가 생각하는 ‘우리 가문의 적’이 누군지나 들어보고 싶네.”
“그야 하나밖에 없지요.”
블라드 가시공이 대답했다.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
그들 역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다.
“너희는 이미 우리 가문과의 신뢰를 깨트렸다.”
이미 그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뱀파이어 클랜은 나이트워커 가문을 속이고 뒤통수를 쳤다.
“설령 우리가 같은 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이미 신뢰를 깨트린 네놈들과 손을 잡을 이유는 될 수 없지.”
“그렇기에 더더욱 이야기를 드리려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일전에 드리지 못했던, 밤의 아버지에 관한 오래된 ‘옛날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