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운명 (1)
밤의 아버지에 관한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
“뭐, 그렇게까지 아주 거창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말에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고, 블라드 가시공이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저 어떻게 해서 나이트워커 가문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밤을 걷는 자들이 서로를 자신의 ‘전부’라 믿어 의심치 않는지─ 그에 관한 진실이죠.”
진실. 그 말에 시엔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들을 가치가 있는 진실이어야 할 거다.”
삼키고 나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당신들은 가엾은 가축들입니다.”
그리고 블라드 가시공이 말했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조롱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자신들의 운명이 송두리째 빼앗겨 조롱당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심지어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꼭두각시들이죠.”
“마지막 한마디다.”
이어지는 말에도 시엔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섬뜩하게 빛나는 살기를 담아서.
“그 한마디도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
시엔이 뿜어내는 살기 앞에서 비웃음을 흘리던 가시공이 말을 멈춘다. 마치 다음에 내뱉을 ‘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르듯이.
“운명의 창은, 이미 한 번 완성됐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신의 아들을 찔러 죽이고 나서 세상 곳곳에 산산이 흩어졌다고 알려졌지만, 엄밀히 말해 절반은 틀린 말이죠.”
블라드가 말했다.
“그렇게 흩어졌던 운명의 창은 800년 전, 동방에서 온 어느 이방인의 손에 의해 한 번 완전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카산 나이트워커…….”
“그렇습니다.”
그 남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창에 깃든 힘을 휘두르며, 약소국이었던 당대의 베네토 공화국을 대륙 제일의 부국(富國)으로 거듭나게 했죠.”
체사레조차 완성된 운명의 창을 가졌던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 찰나에 휘두르는 힘조차 시엔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도박이었다.
그런데 그 창이, 이미 한 번 완성되어서 자유자재로 카산의 손에 휘둘러졌다니.
“그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 우리 같은 괴물처럼 수백 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창에 깃든 힘을 행사했나?”
“아,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죠.”
가시공이 어개를 으쓱이며 말했다.
“문제는, 거기에 깃든 힘을 ‘어떻게 행사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행사했느냐.
“그 남자는 인간이 마땅히 묶여 있어야 할 ‘운명의 족쇄’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불사의 역설에 사로잡혀 있는 괴물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필멸자의 운명, 운명의 족쇄에 묶여 있어야 할 인간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죽어도 죽지 않고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가 없는 힘도 없다.
운명의 창이 가진 본질적인 힘은, 단지 어떤 형태로든 운명의 흐름을 뒤틀어 대가를 치르는 방식을 속이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아무리 창에 깃든 힘을 마음껏 휘둘러도 무(無)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의 개변까지는 불가능하다.
“설마.”
“아, 이제 좀 눈치를 채셨군요.”
블라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치 이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게 당신들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이자, 이 세상에 나이트워커 가문이 태어난 진짜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시엔의 피가 얼어붙었다.
“당신들은…… 운명의 가축입니다.”
진실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뱀파이어에게 인간이 가축과 다름없는 것처럼, 그 남자에게는 당신들의 존재가 가축이나 다름없는 셈이죠.”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운명을 뒤틀어 ‘특혜’를 누릴 때,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는 특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800년 가까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갈 때, 누군가는 거기서 발생하는 채무(債務)를 치러야 하죠.”
“그게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이라고?”
“뭐, 이제는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지요.”
가시공이 남의 일처럼 말했다.
“카산은 창을 통해 ‘운명의 특혜’를 누리는 동시에─ 거기서 비롯되고 치러야 할 모든 대가를 ‘가족들의 몫’으로 떠넘겼습니다.”
마치 은행에서 거액의 돈을 빌리고, 그 빚을 모조리 가족들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그럼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뭐지?”
“이미 치렀습니다.”
가시공이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들은 조종당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가엾은 꼭두각시라고.”
마치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원래대로 당신은 지금쯤 ‘진짜 부모’의 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라나, 지금보다 훨씬 더 제대로 된 삶과 행복을 누릴 예정이었습니다.”
가시공의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될 운명이었죠.”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손에 버려지고 뒷골목의 범죄 길드 손에 거둬지는 삶이 아니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 당신들 가문이 진짜 피를 가진 가족을 허락하지 않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습니까? 아니, 의문을 품어볼 생각은 해봤습니까?”
“─.”
“우리가 인간의 피를 빨며 영원의 삶을 살아가듯, 그 남자는 당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운명’을 빼앗아 살아가는 겁니다.”
이 순간에도 헤아릴 수 없는 밤의 아이들이 가문에 이끌려오듯이.
그래야 지금과 같은 뒤틀린 가족의 형태가 유지되며, 남자에게 영원(永遠)의 양분이 되어줄 목장이 유지될 테니까.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말이야.
응, 그거야 물론이지.
─그 외에 달리 우리에게 뭐가 남아 있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가족의 온기. 그 온기를 구원이라 여기며 가족이 전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음부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손이 떨렸다.
시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엔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금도 여전히 시엔의 전부인 사랑하는 가족들이 ‘본래 누려야 했을 행복’을 박탈당한 분노였다.
누구도 이곳에 올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진짜 부모의 아래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운명이었다.
그런데 빼앗겼다.
라일라도, 비고도, 헨젤과 그레텔도, 미하일과 이자벨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가족 모두가 그런 식으로 카산의 손에 마땅히 누릴 행복을 박탈당한 채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가족들을 전부라 여기며 상처를 보듬어준다.
그 남자는, 말 그대로 자신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신 이외의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지?”
“뒤틀린 운명은 오직 당사자들밖에 바로잡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가시공이 순순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카산 나이트워커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에게 운명을 박탈당한 존재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이외의 존재들에게 있어, 그 남자는 말 그대로 불사신과 같은 존재란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힘을 빌려 놈을 쓰러뜨려 달란 소리군.”
“말 그대로입니다.”
가시공 블라드가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나이트워커 가문에 맡기는 암살 의뢰인 셈이죠.”
동시에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내용의.
이 모두가 로젤리아 샤를의 교활함이고 계책이다. 그럼에도 시엔의 머릿속에 그녀의 존재가 끼어들 여지 따위는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
진실이란 결코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님을.
게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저주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이 위화감의 정체를.
운명이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다. 그럼에도 시엔에게는 운명을 극복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해왔다.
아니었다.
운명을 극복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해온 것은 시엔이 아니라 카산 나이트워커였고, 시엔은 오히려 운명을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하는 쪽이었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힘이 이제는 ‘자신의 편’이 되었다는 후련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절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깨닫고 나니 허탈함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부디 제가 드린 말씀이, 절 살려줄 가치가 있기를 바라야겠네요.”
웃는 시엔을 향해 가시공이 말했다. 흘끗 그를 보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꺼져라.”
“아, 그것참 감격스러운 말씀이군요.”
인간을 가축으로 삼고 피를 빨며 살아가는 괴물, 뱀파이어가 과장되게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와중에도 시엔은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채,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침묵하고 나서는…… 조용히 몸을 구부리고 어깨를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누려야 했을 가정과 삶과 행복이 빼앗겼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나이트워커의 이름을 가진 가족들을 위해 슬퍼할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마땅히 가지고 누렸어야 할 가정과 삶과 행복을 상상하고, 그 전부를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의 이기(利己)를 위해 빼앗겼다는 사실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그저 여기 있는 가족이 자신의 전부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어리석음이 고통스러웠다.
아니, 어리석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가족들의 상냥함과 다정함이 더더욱 시엔의 심장을 도려내고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어깨를 들썩이며 시엔이 흐느꼈다. 아무리 울고 울어도 마르지 않는 슬픔을 뒤로하고.
깨닫고 보니, 더 이상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소름 끼치는 정적 속에서 시엔이 침묵할 따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 * *
운명이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에 맞서고 저항하며, 그 힘에 극복할 의무가 있었다.
처음에는 충분히 저항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지날수록,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그것이 점점 거스를 수 없는 성질의 절대적 무엇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 손을 통해 뒤틀린 800년 전의 운명이,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고 자신의 전부를 빼앗기 위해 악의의 손길을 뻗쳐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자가 몸을 떨며 절망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무엇 하나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인간임을 잃고 싶지도 않았고, 삶이 멈추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의식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에게는 자신이 전부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