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운명 (2)
“시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침묵하고 있던 시엔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적어도 이 순간, 차마 두 눈으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
“어머니.”
그렇기에 시엔이 필사적으로 동요를 감추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시공 블라드를 그냥 보내주었더구나.”
“아무리 밉다고 해도, 먼 데서 온 손님을 칼로 찌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시엔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라일라가 조용히 침묵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시엔의 상황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던 까닭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니?”
라일라가 물었다. 시엔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라일라의 앞에서는 결코 거짓을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족의 앞에서 방금 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모조리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은 그저 그 남자의 가축에 불과하다고.
게다가 그 이야기가 설령 거짓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시엔은 그저 이야기를 들었고, 본능적으로 그것이 진실이란 ‘느낌’을 가졌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엔.”
그럼에도 침묵하는 시엔을 향해 라일라가 말했다.
“그에게 무슨 일을 들은 거니?”
마치 아들의 대답을 재촉하듯이.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시엔이 말을 흐렸다.
“좀 더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것은 ‘나이트워커 공작’으로서의 명령이니?”
“그렇습니다.”
말하고 나서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차마 그곳에 있는 라일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등을 돌린 채로.
* * *
이튿날 새벽, 나이트워커 공작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족 중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홀연히.
* * *
오랜만에 찾은 그곳은, 그 시절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시궁창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엔이 나고 자란 공화국 어느 자유도시의 암흑가.
칠흑의 로브로 정체를 가린 채, 시엔은 자신이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갈 곳 없이 버려졌던 도시의 뒷골목을 거닐었다.
처음 사람을 죽였던 그곳.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그곳.
일찍이 시엔을 거두어준 범죄 길드는 그 후로 거듭되는 다툼 속에서 모두 죽고 사라졌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악인(惡人)이 죽거나 사라져도 선(善)이 찾아올 자리는 없다. 그 자리에는 그저 새로운 악인이 채워질 뿐이니까.
문득 갈 곳 없는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이 뒷골목을 전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절의 시엔처럼.
딱히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憐愍)의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으로 넘쳐나고 있는지.
그저 이해할 수 없었다.
스릉.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날붙이를 겨누는 감각이 느껴졌다.
“움직이지 마.”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가, 가진 거…… 전부 다 내놔.”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어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두 손목.
하도 굶주림에 시달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미라처럼 메마른 남자아이였다.
“…….”
시엔이 말없이 침묵했다.
“뭘 바라니?”
침묵 끝에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 돈…….”
칼을 겨눈 남자아이가 팔을 떨며 말했다.
“돈으로 뭘 사고 싶은데?”
“먹을 거.”
시엔이 재차 되물었고, 남자아이가 대답했다. 그 대답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서는 품에 손을 넣고, 동전 몇 푼을 꺼내 아이에게 넘겨준다.
동화(銅貨) 몇 닢.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금액을 이 아이에게 주었다가는 필시 해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엔이 나름대로 아이를 배려해 동전을 내밀었고, 내미는 동시에 겨누어진 단검을 낚아채 칼자루를 빙글 돌려 잡는다.
“!”
겁에 질린 남자아이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시엔이 침묵했다.
“기억하렴.”
침묵 끝에 시엔이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손에 들린 단검을 도로 넘겨주며.
“살고 싶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칼자루를 놓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칼자루를 쥐여주자, 겁에 질린 아이가 뒷걸음질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저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오늘 하루 끼니를 굶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무엇 하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시엔이 그날의 라일라처럼 손을 내밀어줄 이유도 없었다.
“……대부님.”
바로 그때였다.
저 너머로 도망치듯 떠나가는 아이와 엇갈리며, 또 하나의 실루엣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란 듯이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을 새겨넣은 소녀였다.
“티아.”
그녀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을까. 생각하고 나서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도 이 나라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없다.
설령 그들 자신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족이 되기 전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문도 갖거나 품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티아 나이트워커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서.
“규칙을…… 깨트리셨군요.”
“그래.”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누구보다 가문의 규칙을 준수하고 모범이 되어야 할 나이트워커 공작이.
“어째서죠?”
“궁금했거든.”
시엔이 남의 일처럼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되지 않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말이야.”
“대부님!”
시엔의 말에 티아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들에게 있어 그 말이 갖는 의미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던 까닭에.
“왜 그러니, 티아?”
“대부님은…… 저의 전부예요.”
짐짓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 시엔의 앞에서 티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지 않는 대답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억누르며.
“제가 당신의 전부이듯이.”
“너는 여전히 나의 전부란다, 티아.”
“!”
그리고 시엔 역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이 도시에 아직 자신을 버린 ‘진짜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대답을 듣고 티아 역시 활짝 웃었다.
“우리가 서로의 전부이듯이.”
“맞아요, 대부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다는 듯이.
“저택으로 돌아가요, 아버지.”
그 이상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고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티아가 말했다.
“서로의 전부가 있는 곳으로.”
“…….”
티아가 말했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 * *
“공작이 되자마자 가출이라니,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보는구나.”
시엔이 공작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웃는 남자 ‘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한과 라일라, 끝으로 가문의 콘실리에리 루나가 입회해 있는 집무실.
나이트워커 가문 최고 지도부, 아울러 그들의 정점에 서는 암살자들의 아버지 역시 그곳에 있었다.
“가시공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더구나.”
라일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니?”
“…….”
라일라가 물었다.
더 이상의 침묵과 부정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이채(異彩)를 빛내며.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대답했다.
“……우리 가족의 존재와 삶의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야기였죠.”
시엔이 말했다.
“만약에…….”
이곳에 있는 시엔의 가족들, 서로를 서로의 전부라 믿어 의심치 않고 달리 갈 곳도 없는 버려진 자들.
“우리가 서로의 전부가 아니라면, 어머니는 어떤 말을 하겠어요?”
시엔이 말했다.
그날, 가시공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자신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
그들에게는 저마다 누려야 할 진짜 가족이 존재했고, 그 전부를 그 남자에 의해 빼앗겼다는 것.
“우리가 본래 가졌어야 할 것들이라.”
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애초에, 증거조차 없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확신하는 이유가 뭐니?”
그럼에도 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는 알 수 있으니까요.”
시엔이 대답했다.
“운명의 창을 가졌고, 그 창에 깃든 힘을 이해하는 까닭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운명의 창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그 창이 힘을 행사했던 흔적, 그리고 신기에 의해 행사되고 뒤틀린 운명의 기류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시공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시엔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쳐도.”
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라일라가 말했다.
“어째서 그 사실에 그렇게 슬퍼하는 거니?”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여전히 네가 내 아들이라서 다행이란다, 시엔.”
“…….”
딱히 충격에 빠지지도 않고, 숨을 삼키는 등 알기 쉬운 동요조차 없다. 동요하지 않는다. 라일라가 그렇듯, 그 말을 들은 시엔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저 역시 당신이 제 어머니라 다행이에요.”
“그럼 무엇을 그리 슬퍼하는 거니?”
“……당신들이 슬퍼하지 않는다는 게.”
시엔이 말했다.
그 말에 비로소 라일라가 숨을 삼켰다.
“저의 전부인 당신이, 마땅히 가졌어야 할 가족과 삶과 행복 전부를 빼앗기고도─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슬퍼하지 않는다는 게 슬퍼요.”
“그건 네 생각이란다, 시엔.”
라일라가 말했다.
“오히려 너를 내 아들로 있게 해준 그 남자가 고마울 지경이란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던 까닭에.
“우리를 서로의 전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줘서.”
그들은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다.
시엔 역시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대답해줄 거란 사실을.
“그래요, 고마울 지경이죠.”
그래서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를 용서할 이유는 되지 않지만요.”
“아, 그거야 물론이지.”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루나 나이트워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곳에서 홀로 희미하게 떨리는 가느다란 어깨를 애써 감추며.
* * *
얼마 후, 베르나르트 후작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지원 아래 새롭게 쌓아 올린 마도의 성지에 시엔이 모습을 드러내자, 정장에 모노클을 쓴 마법사가 예를 표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소.”
“베르나르트 후작 각하.”
베르나르트가 손등 위에 입맞춤하며 예를 표하자, 시엔이 담담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때가 되었습니다.”
“!”
그 의미를 헤아린 베르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날 베르나르트를 제국의 손에서 구해낼 때부터, 이것은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이 전쟁에 신(神)이 개입할 여지 따위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