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아바돈(阿鼻沌) (1)
나이트워커 가문의 세례성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마땅히 누려야 할 ‘진짜 삶’과 가족 전부를 빼앗기고, 운명의 가축이 되어 이곳에 온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
그것은 동시에 나이트워커 공작이 된 시엔이 최초로 거행하는 성사이기도 했다.
‘정말 그것이 네 결정이니?’
라일라가 그렇게 물었을 때, 시엔은 주저하지 않았다.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지하 예배당. 고딕 양식의 부조(浮彫)와 검고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아치형 천장 아래에서, 나이트워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밤의 아이들을 향해 시엔이 말했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그 시각.
샤를마뉴 왕국 제2의 수도, 랭스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성모의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일찍이 신의 아들이 받은 수난을 그린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등진 채, 로젤리아 샤를이 금빛의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왕국의 여왕이자 붉은 백합의 성녀.
아울러 그녀의 손에 들린 성스러운 잔, 성배(聖杯) 앞에서 ‘피의 축복’을 기다리는 이들이 무릎 꿇고 예를 표했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신성 제국 수도의 대성당.
영원한 밤의 아버지 역시 금색의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아이들’이 있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동물을 잡아먹고, 뱀파이어가 바로 그런 인간의 피를 빨아 삶을 이어가듯이.
그는 그곳에 있는 아이들의 운명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이곳에 오게 했다.
그들이 누려야 할 가족과 삶, 행복, 그 전부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빼앗긴 삶조차도 자신을 위해 살게 될 운명의 가축들.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눈앞의 약탈자를 자신의 ‘주인’이라며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은 꼭두각시들.
운명의 창은 사라졌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800년 전, 그가 운명의 창을 손에 쥐고 행사했던 ‘뒤틀림의 결과’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이 뺏으면 될 일이다.
굶주린 자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욱여넣듯이. 영양이 부족해 말라붙은 자가 더 많은 양분을 섭취하듯이.
어느덧 그곳에 있는 이들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조차 있는 규모를 까마득히 벗어나 있었다.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가축들을 방목(放牧)하고 기르는 목장 그 자체였다.
* * *
베네토 공화국과 신성 제국, 그리고 샤를마뉴 왕국. 찰나와 같았던 평화가 끝나고 나서는, 다시 전쟁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최후의 전쟁이.
그날 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집무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 남자에게 삶을 빼앗긴 운명의 가축이라 해도, 여전히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남겨진 서로의 전부이기도 했다.
시엔에게는 그 전부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로젤리아 샤를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그들이 빼앗긴 것, 진실 앞에서의 충격과 별개로 냉정하게 상황을 헤아렸다.
이 상황에서 밤의 아버지와 나이트워커 가문이 전력전을 펼칠 경우, 정작 어부지리를 챙기는 것은 누구도 아니고 그들 밤과 피의 왕국일 테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기꺼이 그들 가문의 진실을 말해 주었고, 진실을 알아버린 이상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엔은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린 그날 새벽, 하나의 서신(書信)이 샤를마뉴 왕국의 여왕 로젤리아를 향해 보내졌다.
* * *
“아아, 사랑스러운 나의 왕자님.”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진 서신을 받고,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미소 짓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가시공 블라드가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왕 폐하.”
“우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의죠.”
로젤리아가 말했다.
적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적과 함께 손을 잡는 일.
“기꺼이 나이트워커 가문에 화답을 하죠.”
그러나 그녀가 희열하는 이유는 달리 있었다.
그저 손을 잡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로드 마스커레이드(Lord Masquerade).”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가진 또 하나의 이름, 뱀파이어의 이명을 입에 담으며 ‘가시공’ 블라드가 예를 표했다.
로드 마스커레이드, 일명 《가장공(假裝公)》 로젤리아.
물론 더 이상 이 나라의 귀족들은 자신의 정체를 가면에 숨기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알기 쉬운 형태의 괴물이 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기꺼이 귀족의 모범이 되기를 자처하며 백성들을 대신해 나라를 지키고 수호하는 고결한 존재로 거듭났으니까.
그럼에도 백성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씨 고운 공주, 로젤리아 샤를이 가면 속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얼핏 그녀의 존재를 향한 조롱처럼 들릴 수 있는 그 이름을, 그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 * *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샤를마뉴 왕국 동부와 신성 제국의 서부 국경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더 이상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싸움에는 인간이 세운 전략도 전술도, 그 어떤 이치도 통용되지 않는다.
제국이 자랑하는 신성 군단의 천사병, 마탑의 자동인형과 혼종(混種), 교회의 이단심문관들.
섭리와 이치를 벗어난 그들의 싸움에 맞서 마찬가지로 샤를마뉴 왕국의 귀족들이 있었다.
하늘을 밤과 피로 뒤덮고, 마찬가지로 신의 찬미와 성스러운 빛을 휘감으며, 제국과 왕국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 시간, 제국의 남부와 공화국 북부 국경.
밤하늘 산맥을 넘어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명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돌아올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암살자들의 아버지와 함께 결의를 다진 밤을 걷는 자들이, 산을 넘고 있었다.
서로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된 가족들이.
* * *
“마린 나이트워커 제독이 이끄는 공화국 함대가 제국 동부 연안(沿岸) 일대에서 무차별적인 교란과 약탈, 파괴 공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보를 뒤로하고, 제국의 옥좌에 앉은 남자가 표정을 찌푸렸다.
불사자 디트리히 합스부르크.
쌍두까마귀의 가족이자 제국의 황제이며, 영원한 밤의 아버지를 섬기는 ‘가족’이어야 할 남자.
“…….”
동부, 서부, 남부, 세 방향에서 제국을 에워싸고 옥죄는 적의 세력들. 말 그대로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그 상황에서, 정작 그의 신경을 사로잡는 것은 나라의 안위 따위가 아니었다.
“폐하.”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린다.
“누님…… 아니, 아퀴나스 추기경.”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아들이자 《암굴의 성자》란 이명을 가진 또 하나의 가족, 루카 아퀴나스와 함께.
“잠시 신하들을 물리고,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디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물린 옥좌의 방에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해?”
침묵 끝에 빌헬미나가 물었다.
“……뭘?”
“아버지의 결정.”
“…….”
그렇다. 그것은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진정한 가족만을 받아들이고 거듭나게 하기 위한 외단(外丹)을, 극도로 열화시켜 복제해 헤아릴 수 없는 아이들에게 복용하게 한 것.
“우리는 그들과 달라.”
그렇게 태어난 이들은 더 이상 가족조차 아니었다. 그저 남자의 뜻에 따라 춤추는, 영혼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냥 장기 말일 뿐이잖아.”
그렇기에 디트리히가 말했고 빌헬미나가 되물었다.
“우리는 다르다는 거야?”
“그래.”
“우리는…… 아버지의 소중한 자식들이잖아.”
애써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것 같은 목소리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는 목소리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디트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믿을 뿐이야.”
진실과 믿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믿음이야말로 진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덕목이다.
빌헬미나는 그날 사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 믿음이 배신당했을 때, 믿음 뒤에 가려진 진실 앞에서 그녀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알 수 없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긍휼의 마그누스 추기경을 비롯해, 사도급의 최고위 이단심문관 전원을 소집하렴.”
그렇기에 결정을 내린 빌헬미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을 막을 테니까.”
“나도 같이─”
그렇게 말하는 빌헬미나를 향해 디트리히가 입을 열려는 찰나.
“남겨진 가족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잖니, 디트리히.”
빌헬미나가 말했다. 여전히 가족을 사랑하는 다정한 누나이자, 가족을 짊어질 의무가 있는 장녀로서.
“우리 가족을 대신해 희생할 ‘장기 말’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단다.”
* * *
살며시 뺨 위에 손을 올린다.
그러자 저주처럼 남자를 괴롭혔던 뺨 위의 생채기가, 거짓말처럼 아물어 있었다.
세월 속에서 덧없이 스러져가는 자신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하나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숫자의 행복이 파괴되었을까. 얼마나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누려야 할 삶을 빼앗기고, 행복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겨 운명의 가축이 되었을까.
알 바 아니었다.
“바르무어 후작.”
제1마탑의 지하 공방, 어둠 속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금빛 코트 위에 ‘묵시록의 붉은 용’을 문장으로 새겨넣은 남자를 향해.
대륙 최고 8개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의 정점에 서는 제1마탑의 수장이자, 황제 앞에서 유일하게 ‘왕’의 이명을 쓸 수 있는 제국 귀족.
마도왕 바르무어.
물질 조작 학파의 수장으로서, 일찍이 완전생물(完全生物)의 창조를 비원으로 꿈꾸는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바로 자네가 바라는 가장 완전한 소재라네.”
아울러 남자가 빚은 운명의 꼭두각시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어떤 담금질과 합성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기꺼이 버텨낼 수 있는 육체를 가진 아이들이지.”
물질 조작 학파는 그 이름처럼 세상의 물질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
그리고 생물 역시 물질이다.
바르무어 가문의 숙원이자 물질 조작 학파의 마법사들이 꿈꾸는 ‘이상의 물질’이 그곳에 있었다.
이미 태어났고 다시 태어난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태어나게 할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생물로.
아니, 완전조차 부족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완전 따위가 아니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바란 이상조차 뛰어넘는 그 너머의 경지, 영원생물(永遠生物)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