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73화 (173/200)

173화. 아바돈(阿鼻沌) (3)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신성 제국 최강의 전력이라 일컬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의 군세’를, 마치 자신의 병사처럼 거느린 채.

싸움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에 강림해 있는 천사들 모두가, 누가 진정으로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인지 깨달은 까닭에.

그렇기에 천사들의 군세가 등을 돌린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조국, 신성 제국을 짓밟고 그 영토를 자신의 주군에게 바치기 위해.

*  *  *

빌헬미나 아퀴나스와 더불어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추기경 전력’이 그곳에 있었다.

불쌍히 여기는 자, 긍휼(矜恤)의 마그누스.

기괴할 정도로 등이 굽고 쪼그라든 노구는, 마치 미라를 보는 것처럼 섬뜩하고 앙상하다.

“상품의 0품, 메타트론(Metatron) 강림.”

제국 국교회에서는 정식 교리로 채택하고 있지 않으나, 일부 신비주의 파벌에서 최강의 천사 ‘미카엘’보다 강하다 일컬어지는 천사.

그 천사 앞에서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가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  *  *

상품의 1품, 두 명의 ‘미카엘’이 그곳에 있었다.

“조심하렴, 티아.”

티아와 린, 각각 흑조와 밴시의 이명을 가진 두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앞에서.

순백의 성광을 휘감고, 마치 쌍둥이를 보는 것처럼 똑같이 닮아 있는 두 명의 천사.

새하얀 날개 열두 장이 돋아 있는 금발의 미남자.

오른손에 검을, 왼손에 저울을 쥐고 이 세상의 악(惡)을 심판하는 존재.

이 지상에 내린 선(善)의 화신이자 정의의 집행자, 최강의 천사 미카엘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네, 린 언니.”

그럼에도 티아 나이트워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눈앞에 있는 선의 집행자들을 마주할 따름이다.

스륵.

마찬가지로 그녀의 곁에 있는 밴시 린이, 칠흑의 붕대를 벗고 그 너머로 핏빛의 눈동자를 드러내듯이.

세상에서 가장 검고 붉은 눈동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  *  *

아무도 틀리지 않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정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단지 자신의 정의가 타인의 악일 뿐.

혹은 그 반대거나.

그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상품의 0품, 메타트론이 펼치는 드높은 천상(天上)과 그 옥좌를 마주하고도 시엔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보라,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땅이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동시에 시엔이 딛고 있는 발밑으로, 그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나락이 아가리를 벌린다.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그리고 그 구렁텅이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세기 어려운 죄인들이 팔을 뻗어 앞다투어 아우성치고 있다.

그 풍경을 일컬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떨어질 곳이다.”

지옥.

“누가 그걸 결정하지?”

“저 드높은 천상의 주인께서.”

“우리가 있을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조롱하는 시엔의 말에 메타트론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답에 시엔이 재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나와 내 가족들이 있는 곳이다.”

반대로 어떤 극락이라 해도, 가족 없이 혼자 남겨진 그곳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어느덧 가문의 신기, 빙륜검 루나 피에나의 칼자루를 고쳐 잡고 시엔이 땅을 박찼다.

드높은 천상과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의 구렁텅이가 펼쳐진 그 세계에서, 나이트워커 공작을 상징하는 ‘빙륜검’이 월광의 서슬을 흩뿌린다.

“누구도 우리가 있을 곳을 규정할 수 없다.”

차가운 읊조림과 함께 날카로운 달빛이 메타트론을 향해 휘몰아쳤다.

얼어붙은 창날 조각이 사방에서 빗발처럼 쏟아진다.

동시에 메타트론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달빛보다 찬란한 성광(聖光)이 쏟아졌다.

군세와 군세가 격돌하는 것 같은 싸움.

빙륜검 루나 피에나가 벼린 달빛이 빗발처럼 쏟아졌고, 그에 맞서 메타트론 역시 활짝 펼친 날개의 빛을 흩뿌리며 맞섰다.

수천, 수만 명의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격돌하는 것 같다.

이윽고 달빛과 휘광이 하늘을 뒤덮고 눈을 멀게 하는 사이, 어느덧 시엔과 메타트론이 땅을 박찼다.

섭리와 이치의 바깥에 있어야 할 천사가, 그 무엇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손에 쥐고 있는 검을 휘둘렀다.

‘─.’

그러나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은 여전히 섭리와 이치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음을.

메타트론의 두 눈동자에서 빛나는 이채, 마치 시엔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대응과 움직임이 그 증거다.

카앙!

어떤 식으로 어떻게 휘둘러도,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손쉽게 맞서고 역습을 넣는다.

예지의 눈.

일찍이 요정왕 멀린이 가졌던 것 같은 두루뭉술한 개념이 아니다. 운명이니 뭐니 하는 개념조차 아니다.

저 존재는 말 그대로 몇 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있다.

섭리와 이치를 벗어나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동시에 더없이 인간적인 싸움의 방식을 취하는 존재.

그것이 상품의 0품, 메타트론의 힘이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시엔은, 메타트론과 싸워본 적이 없다.

그 당시, 메타트론을 쓰러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시엔이 아니라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였으니까.

그마저 최악이란 말조차 부족한 상황 속에서 시엔을 지키기 위해 쓰러뜨렸다.

다시 말해 놈은 어머니의 손에 확실하게 패배했다.

‘대체 어떻게 이 괴물을 쓰러뜨린 거지?’

어떻게 쓰러뜨렸는지, 어떻게 놈의 불가해(不可解)를 파괴했는지 시엔은 알 수 없다.

단지 승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걸로 족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며 일격을 허락하지 않는 와중, 시엔이 자세를 바꾼다.

생각을 읽는 게 아니다. 놈이 보는 것은 오직 결과다.

교회에서 말하는 신이, 결과로서 인간을 천국과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섣불리 검을 휘둘러도 머지않아 그 움직임을 읽고 파훼한다. 제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함부로 쐐기를 박기 위해 움직일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였다.

알고도 보고도 대응하지 못하는 완벽한 압살.

그러나 아무리 지금의 시엔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로 일방적인 승리를 손에 넣을 수는 없다. 하물며 그 앞에 있는 것이 제국 최강의 천사, 메타트론일 경우에는 더더욱.

‘아니, 어머니조차 필시 그런 식으로 승리를 손에 넣지는 못했을 거다.’

라일라 역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녀도 지금까지 천사를 쓰러뜨린 것처럼, 지혜를 통해 그들의 수를 파훼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섭리와 이치를 벗어나 있다 해도, 그들조차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규칙의 허점을.

시엔이 움직이지 않으면, 역으로 그 움직임을 읽고 상대 쪽에서 공세를 가한다.

반대로 함부로 이쪽이 움직였다가는, 마찬가지로 그것을 읽고 역습을 가한다.

카앙!

끝없이 칼날이 부딪치는 와중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시엔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설령 움직임을 읽혀도 큰 리스크가 없는 배팅을 계속하는 것.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천년이 지나도 승부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확실하게 지치고 있는 것은 시엔 쪽이었다.

‘늦든 이르든 승부에 쐐기를 박아야 하는 것은 내 쪽이다.’

눈앞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인간다운 전투의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어떤 것도 인간적이지 않다.

지치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몇 초 뒤의 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보며, 오직 결과로서 인간을 재단(裁斷)하는 존재.

신의 사자, 천사.

바로 그 천사들의 정점에 선 존재, 0품의 메타트론.

“이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겠지?”

그 존재를 향해 시엔이 말했다.

일순, 메타트론의 움직임이 그 자리에서 멈춘다.

“혹은 네가 보는 몇 초 뒤의 미래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예정인가?”

“사자의 눈을 시험하지 말아라, 죄 깊은 자야.”

조롱하는 시엔을 향해 메타트론이 대답했다.

“이 눈은 오직 보이는 것을 볼 뿐이니라.”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메타트론.”

바로 그때, 시엔이 말했다.

“─.”

그리고 메타트론의 눈은 이미 그 풍경을 보고 있었겠지.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보아하니, 너는 보는 것밖에 못 보는 모양이지.”

그렇기에 시엔이 재차 도발했다.

“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고.”

얼핏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말.

그러나 단서를 얻기에는 이걸로 충분했다.

다시금 확신을 가진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놈이 비로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볼 수 없는지’를 알기에.

그리고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으로 시엔을 바라보고 있는 초점 없는 순백의 눈동자, 메타트론의 두 눈에 동요의 빛이 일렁였다.

*  *  *

“싫어요, 어머니……!”

누군가의 전부이자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암굴의 성자》 루카 아퀴나스.

“이것은 내 명령이란다, 루카.”

그 아이를 향해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말했다.

“저들은 우리의 적이에요, 어머니! 저는 물론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요!”

“……그래, 그랬었지.”

그 어느 때보다 자애로운 성모(聖母)의 얼굴을 하고서.

“그러나 그들은 ‘진실된 적’이란다.”

“……!”

“그보다 더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을 아니?”

빌헬미나가 되물었다.

“믿음을 강요하는 아군이란다.”

맹목(盲目)에 가까운 믿음.

“하지만 어머니……!”

“별과 단검의 이름을 걸고 약속은 지켜질 거란다, 빌헬미나.”

바로 그때, 어머니의 언니가 말했다.

“그 아이는, 우리 나이트워커 공작령에서 보호받을 거야.”

“그래.”

빌헬미나가 미소 짓는다. 미소 짓고 나서는,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전부’가 이제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여전히 언니가 증오스러워.”

빌헬미나가 말을 잇는다.

“프란츠 오빠, 잭 할아범, 내가 사랑하는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을 앗아버린 당신과 당신의 가문이.”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죽음의 숙녀, 라일라가 대답했다.

더 이상 알기 쉬운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 자매가 서로 죽고 죽여야 할 이유도 없다.

빌헬미나 아퀴나스는 기꺼이 항복했고, 자신의 전부를 그들에게 바쳤으니까.

그 대가로 그녀의 아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네가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지, 내가 감시할 거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리고 빌헬미나는 이제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력(戰力)이 되어서 싸울 것이다.

일찍이 그녀가 사랑했고 서로의 전부였던 언니, 라일라와 함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