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74화 (174/200)

174화. 아바돈(阿鼻沌) (4)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그 말에 비로소 초점 없는 순백의 눈동자, 메타트론의 두 눈에 동요의 빛이 일렁였다.

“왜 그러지?”

그 동요 앞에서 시엔이 조소하기 무섭게, 메타트론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신께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인간은 어째서 기도 따위를 하는 거지?”

마치 교리의 문답을 하는 것처럼 시엔이 되물었고, 메타트론이 대답했다.

「인간은 하느님의 판단을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길을 찾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듣는 것만으로 그 전능함 앞에 무릎 꿇고 싶어지는 성스러운 찬미(讚美)의 목소리.

카앙!

칼날이 맞부딪친다.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시엔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정녕 저 존재 앞에서 거스르는 게 옳은 일일까?

그가 몇 초 뒤의 미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 끝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놈은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한다. 그걸로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비로소 확신이 섰다.

“나락의 자세.”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는 정직하기 짝이 없는 일검이, 메타트론의 몸 위에 처음으로 혈선을 그린다.

“보아하니 신도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이지?”

몇 초 뒤의 미래를 보는 ‘신의 눈’을 가진 존재가, 시엔의 검 앞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우유처럼 새하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엔의 등 뒤로 펼쳐져 있는 검고 어두운 밤 아래서.

망령의 자세, 1식의 극의 영야(永夜).

“역시.”

시엔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찼다. 왕 시해자와 홍염의 칼날이 맞부딪쳤다 거리를 벌리고, 다시 맞부딪치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 천천히 메타트론의 움직임이 이전과 달리 경직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너무 많이 보이는 까닭이다.

놈이 보는 미래 역시 결코 고정된 하나의 형태가 아니다.

그저 이 앞에 펼쳐진 헤아릴 수 없는 분기(分岐) 중의 하나일 뿐.

그렇기에 시엔이 영야를 이용해 ‘시간의 흐름’을 어지럽혔을 때, 놈은 그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했다.

빠르게 하는 게 아니다. 느리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시엔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일대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흩트려놓아, 눈앞의 존재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어디서는 빨라지고 어디서는 느려지고,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이.

세상의 그 무엇도 고정된 것 따위는 없다.

이 세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듯, 메타트론이 보는 몇 초 뒤의 미래와 시엔이 보는 몇 초 뒤의 미래는 동일하지 않다.

서로의 미래가 엇갈린 순간,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신의 절대성이 무너진다.

그 순간, 시엔의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것은 희열이었다.

정해진 미래 따위는 없다.

고정된 미래 따위는 없다.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신의 사자조차, 고작 몇 초 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증거였다.

어느덧 시엔의 검(劍)은 어느 때에 비할 바 없는 무게를 싣고 메타트론을 압박하고 있다.

바로 그때였다.

일방적으로 수세에 밀리고 있던 메타트론이, 비로소 거리를 벌린 채 입을 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어느덧 섬뜩한 저주를 담은 목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 형제자매여.」

마치 시엔에게 최후의 통첩을 날리듯이.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십시오(Liberate tetume ex inferis)’.」

지옥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그 사실을 보란 것처럼 과시하듯, 시엔과 메타트론이 딛고 있는 발밑 일대가 투명한 유리처럼 바뀌며 이글거리는 불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불과 유황, 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치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까지.

바로 그 지옥의 풍경을 등진 채, 메타트론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불과 유황이 이글거리는 홍염(紅焰)의 검을 쥐고서.

죽은 뒤에 영겁에 걸쳐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고통받는, 죄악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도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말에 시엔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죽은 뒤 영겁의 삶을 볼모로 잡아 협박하는 네놈들 따위는…….”

웃고 나서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6식, 나락(奈落)의 자세를 펼치며.

“지옥에나 떨어져라.”

*  *  *

악(惡)으로 가득 찬 두 자매가 그곳에 있었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와 핏빛의 눈동자를 가진 두 암살자가.

흑조 티아와 밴시 린 나이트워커.

그리고 그들 자매의 검 아래에,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성스러운 선의 대행자가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  *  *

곳곳에서 악이 승리하고, 곳곳에서 선이 패배하고 있었다.

“상품의 0품, 두 명의 1품, 그 외에 일곱 명의 상품 천사들.”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의 유해(遺骸) 속에서, 그들의 찢겨진 날개와 새하얀 피가 대지를 적시는 와중에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아무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즈음, 밤매 하나가 날아와 시엔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이 시각,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가 제국 각지에 벌어지는 전황(戰況)의 보고였다.

‘……상황이 좋다.’

쪽지를 읽고 나서 암살자들의 아버지, 나이트워커 공작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서부 국경은 붕괴했고, 전력을 쏟는 탓에 동부 국경에서 벌어지는 마린 제독의 함대는 계속해서 일대를 장악하고 해로(海路)를 봉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

그렇기에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제국의 명운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역사 속에서 흥하고 망하고 성하고 쇠하는 수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곳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에 남아 있는 가족을 모두 규합하고, 제국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들 가족의 전부를 앗아간 그 남자에게, 피의 복수(벤데타)를 하는 것.

길고 길었던 싸움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각오마저, 어쩌면 자신의 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쉽게.

밤의 끝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  *  *

죽음의 숙녀와 성모가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아퀴나스’란 이름을 가진 자매이자, 이제는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아름마저 엇갈린 두 자매. 그리고 그들 자매가 걷는 길의 끝에서 다시금 서로의 목적지가 교차하고 있었다.

빌헬미나 아퀴나스와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들에게 진실을 들었구나.”

그녀의 전향(轉向)은 그저 개인적인 의심이나 의혹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라일라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일찍이 시엔에게 ‘밤의 아버지와 나이트워커 가문의 진실’을 알려주었듯, 샤를마뉴 왕국의 뱀파이어들은 쌍두까마귀의 가족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음을.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가족의 붕괴를 노리는 로젤리아 샤를의 계획이었다.

그것도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계획.

“그래.”

빌헬미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너희는 믿음을 택했겠지.”

맹목에 가까운 믿음.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빌헬미나가 말했다.

“아버지는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곳에 있는 두 자매의 아버지. 그리고 별과 단검과 쌍두까마귀의 아버지.

“우리는 그저 그 남자의 손에, 우리의 전부를 빼앗긴 가축에 불과하다고.”

빌헬미나가 말했다. 더 이상 적을 마주하는 눈빛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피해자를 보는 것 같은 슬픈 눈빛을 하고서.

“빼앗겨서 다행이야.”

바로 그때, 라일라가 대답했다.

“우리가 본래 누려야 했을 삶, 우리가 본래 가졌어야 할 ‘진짜 가족’들, 그 모든 것을 그 남자의 손에 빼앗아줘서.”

금기와 타락으로 얼룩진 아퀴나스 가문.

그것이 두 자매가 본래 맞이했어야 할 진짜 가족의 형태이자 빼앗기지 않고 누렸어야 할 온전한 운명이었다.

빌헬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일라가 정말로 타인의 의지로 운명을 빼앗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씨받이가 될 운명의 자신을 위해 아퀴나스 가문을 몰락시키고 나이트워커 가문과 손을 잡은 것은 ‘라일라 자신’의 의지였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빌헬미나를 위한 라일라의 선택이, 서로의 전부였던 그들 자매를 둘로 갈라놓았다.

한때 그들이 서로에게 전부였을지라도,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서로의 전부가 아니다.

“언니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당신이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였을 때, 이제는 진심으로 당신이 밉다고 생각했어.”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남자가 그저 사랑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닌, 자신의 전부를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본래 누렸어야 할 삶과 행복이란 대체 뭐지? 우리는 정확히 그 남자에게 무엇을 빼앗긴 거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내 의지고 그렇지 않은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어. 어디까지가 ‘온전한 우리의 의지’고 어디까지가 그렇지 않은지.”

“…….”

빌헬미나가 말했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운명의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할 거란 생각.

“원래의 나에게 당신은 둘도 없이 소중한 언니였고, 그 마음을 빼앗겨 당신을 미워하고 있는 거라면─.”

그녀답지 않게 흔들리는 목소리.

“진실과 믿음, 둘 다 모두 중요한 덕목이지.”

바로 그때, 방황하는 어린 여동생을 향해 라일라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단다.”

“그게 뭐지?”

“신뢰.”

라일라가 말했다.

“믿음은 오직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으로 국한되는 일이지만, 신뢰는 그렇지 않거든.”

신뢰는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믿음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신뢰를 갖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신뢰를 통해 맺어진 것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들을 그 무엇보다 신뢰하고 있단다, 빌헬미나.”

라일라가 말했다.

“설령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이곳에 던져진 존재들이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신뢰하고 있지.”

“…….”

그 말에 빌헬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여전히 사랑하는 언니로서 자신의 곁에 남아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만 곁에 남아주었다면, 빌헬미나는 어떤 지옥 같은 고통도 기꺼이 견뎌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언니가 전부였던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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