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75화 (175/200)

175화. 아바돈(阿鼻沌) (5)

“당신…….”

남겨진 가족들을 규합하고 나서, 그곳에 있는 뜻밖의 얼굴 앞에 시엔은 나직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런 시엔 앞에서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과장스레 무릎을 꿇고 손등 위에 입맞춤을 하는 자가 있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그녀는 우리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죽음의 숙녀 라일라가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격식을 갖추며 말을 잇는다.

“가주인 저에게 말도 없이 독단으로 결정을 내리셨군요.”

라일라는 더 이상 나이트워커 공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했고, 라일라는 달리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라일라가 시엔의 앞에서, 어쩌면 가족들의 앞에서 처음으로 부리는 ‘억지’란 사실을.

“그녀가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安危)가 아닙니다.”

라일라가 말했다.

“그럼 뭐죠?”

“사랑하는 아들의 안전.”

“…….”

그 말을 받아 빌헬미나가 입을 열었고, 시엔이 차갑게 조소했다.

“너희 제국과 쌍두까마귀의 손에 얼마나 많은 우리 가족들이 죽었는지,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지?”

“물론 알고 있답니다.”

빌헬미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듯이, 제가 바라는 것은 저 자신의 안위가 아니지요.”

“…….”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치셔도 좋답니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백한 살기를 내뿜으며 그녀를 마주할 뿐이다.

“네 목숨 하나로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용서를 바라는 것은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아니지요.”

빌헬미나가 대답했다.

“오직 한 사람, 제 아들이랍니다.”

“…….”

“그 아이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간절한 목소리.

그녀는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너의 처분은…….”

그렇기에 짧은 침묵 끝에, 시엔이 입을 열었다.

“오직 나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에게 일임할 것이다.”

“시엔─.”

그 말에 라일라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어머니.”

시엔이 말했다.

“당신이 그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모든 게 우리 가족을 위한 결정일 거라고─ 어떤 때에도 믿어 의심치 않아요.”

나이트워커 가문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아들로서, 어느 쪽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섞어 시엔이 말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 어떤 때라도.

“고맙구나, 시엔.”

그 말에 라일라 역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  *  *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수도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인간들의 제국을 지탱하는 심장.

서부 국경에서는 ‘성배의 흡혈귀’ 로젤리아 샤를을 비롯한 뱀파이어 클랜이, 동부 국경에서는 마린 제독이 이끄는 공화국 함대가 천천히 전선을 무너뜨리며 다가오는 와중에도, 그곳은 얼핏 보기에 전란(戰亂)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 넘쳐나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럼에도 오가는 시민의 얼굴마다, 귀족들의 얼굴마다, 이 시간에도 천천히 나라를 집어삼키는 적들의 이야기 앞에서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제국의 숙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드, 들었나? 남부 국경에서 제국 국교회가 대패하고 ‘공화국의 사신’들이 이곳을 향했다던데─.”

로브를 두른 채로 오가는 시민의 속삭임을 들으며,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철저하게 그 정체를 가린 채, 제국의 심장에 숨어든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제국의 심장을 눈앞에 둔 별과 단검의 주인들.

밤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밤을 걷는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  *  *

제국 서부의 어느 백작령.

쏟아지는 뱀파이어 클랜의 전선(戰線)을 감당하지 못하고, 심지어 도망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못한 채 절멸한 제국 백작의 성.

거기에 더 이상 살아 있는 인간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아 있었던 인간들의 피로 가득 채운 욕조에, 그녀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

피로 쌓아 올린 욕조에 몸을 잠그고, 로젤리아는 즐거운 듯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말없이 욕조에 몸을 잠그고 있는 그녀의 곁을, 그녀가 총애하는 고위 흡혈귀가 지키고 있다.

가시공 블라드.

“온도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여왕 폐하.”

“사람의 피는…… 생각보다 따듯하네요.”

마치 물의 온도를 확인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로젤리아가 말했다.

“그의 피도 이렇게 따듯할까요?”

“글쎄요.”

블라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니까요.”

“아아, 그것 참.”

그 말에, 마치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로젤리아가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로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입을 열었다.

“아아, 나의 얼음 왕자님.”

마치 꿈을 꾸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피로 쌓아 올린 욕조 속에서,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  *  *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이중 첩자로 암약하고 있을 경우, 나이트워커 가문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그들 전체의 몰살을 가져올 수도 있는 중대 사항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라일라를 믿는다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나이트워커 공작’으로서 그 위험을 모조리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제국의 심장, 레겐스부르크.

그렇기에 이곳에 침입해 있는 하이마스터들은 서로가 서로의 정보를 알지 못한다.

그들 전부의 위치와 정보를 파악하고 눈과 귀를 통해 속삭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시엔 나이트워커뿐.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에서 제국 국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전까지 제국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들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남부 국경에서 진군하고 있는 ‘피의 군세’가 도착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에 시엔이 해야 할 일은, 영원한 밤의 아버지를 찾아 제거하는 것.

그 후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며, 제국과 왕국의 전투가 격화된 틈에 로젤리아 샤를을 제거하는 것.

‘두 명 남았다.’

두 명을 죽이는 것으로, 인간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들의 세계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시엔이 처음 공작령에 왔을 때, 이 대륙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문의 적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한 번은 적들 앞에서 패배하고 실패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과거의 강자, 새로운 시대의 강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게 될 강자들까지.

그들 모두를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무릎 꿇리고 가문의 염원(念願)은 이루어질 것이다.

천년 가까이 그들 가문을 옥죄어 온 그 남자의 저주를 풀고, 마땅히 치러야 할 응보를 치르게 해주며.

“시엔.”

“대부님.”

바로 그때, 상념에 잠겨 있는 자신을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고 형, 티아.”

“……정말로 괜찮겠어?”

“뭐가?”

“이미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에서 적지 않은 제국의 강자들이 패배했어.”

시엔의 형, 그리고 어엿한 가문의 일원이 된 비고가 말했다.

“놈들에게는 더 이상 우리 가문을 막을 힘이 없어.”

“그럴지도 모르지.”

시엔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위협을 무릅쓰며 ‘혼자’ 모든 걸 짊어질 이유가 있는 거야?”

“우리는 이 이상 제국의 전력을 약화시키지 않을 거야.”

시엔이 대답했다.

“머지않아 로젤리아가 이끄는 뱀파이어 클랜이 이곳에 당도하겠지.”

“…….”

“그들이 이 싸움에서 어부지리로 승리를 손에 넣었다가는, 왕국과 제국을 하나로 합친 ‘밤과 피의 제국’이 태어날 테니까.”

시엔이 말했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은, 이곳에서 제국의 편에 서서 놈들과 싸울 거야.”

이곳에 있는 가족들의 역할은, 제국을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였다.

“그리고 그사이, 밤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나 혼자의 몫이야.”

“어째서죠?”

티아가 되물었다.

“왜 대부님 혼자서 그 남자를 상대하시려는 거예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전대 가주님, 요한 오라버니, 아니, 하다못해 저나 비고 오빠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나도 혼자 싸울 생각은 아니야.”

그렇기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보다시피 볼품없는 마법사지.”

그 말에, 어둠 속에서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자네들처럼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나 지혜는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느리고 우둔한 학자라네.”

모노클을 쓰고, 흑색의 머리카락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장발의 미남자였다.

암월의 베르나르트.

그날, 시엔이 이날을 위해 망명을 받아들이고 숨겨둔 비장의 카드.

“─.”

그 모습에 티아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당황과 함께.

그의 말마따나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평생에 걸쳐 갈고닦은 그들이, 직전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거북이처럼 느리고 우둔한 학자의 존재를.

“우리는 제국 북동부, 에인션트 리그가 있는 곳으로 향할 거야.”

시엔이 말했다.

가족이 아니라, 곁에 있는 타인과 함께.

“그사이, 이곳의 명령은 어머니 라일라에게 일임할 테고.”

라일라는 빌헬미나를 이용해 제국과 협상을 하고, 시엔이 ‘암살 의뢰’를 마치는 동안 뱀파이어 클랜과 맞서는 방파제를 자처할 것이다.

그것은 제국의 입장에서도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한 남자를 죽이는 것 정도는, 저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대부님…….”

그 말에 티아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아니, 시엔 오라버니.”

“왜 그러니, 티아.”

“무사히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티아가 말했다.

“당신은 저의 전부니까요.”

“나 역시 네가 나의 전부란다.”

시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네가 나를 걱정하는 만큼, 나 역시 이곳에 남겨진 너와 우리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단다.”

이것은 결코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려는 게 아니다.

“이곳에서의 싸움 역시, 결코 내 싸움에 못지않게 치열할 테니까.”

이곳에서 싸우게 될 뱀파이어 클랜의 존재,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의 존재, 그들과 가족들의 싸움을 앞에 두고 타지로 향하는 것은 시엔에게 있어서도 터무니없는 리스크를 짊어진 도박이었다.

남겨진 가족들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흑조 티아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오라버니가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 만큼, 우리 역시 기꺼이 당신을 위해 헌신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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