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76화 (176/200)

176화. 아바돈(阿鼻沌) (6)

“정말 괜찮은 것인가?”

그로부터 얼마 후, 모노클을 쓴 장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성 제국 북동부.

대륙 제일의 학업적 명성을 가진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 또는 마탑에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의 이름을 따 ‘여덟 담쟁이덩굴의 탑(아이비 리그)’이라 불리는 유서 깊은 배움의 전당.

바로 그 여덟 마탑이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절벽 위에, 두 남자가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시엔이 되물었다.

“다른 나이트워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네 홀로 이 일을 수행하는 게 말일세.”

“가족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수행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시엔이 말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

그 말에 암월의 베르나르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참 얄궂은 일이군.”

바로 그곳에서, 암월의 베르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찍이 내가 몸을 담았고 나를 저버린 바로 이곳이, 나의 ‘걸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장이 되다니.”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대륙 제일의 명문, 그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 에인션트 리그.

바로 이곳에 남자의 걸작이 펼쳐질 경우,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엔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전쟁의 후기에 이를수록 제국 마탑의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며, 종국에는 교회의 입지조차 까마득히 뛰어넘는 수준에 이른다.

그리고 그 씨앗의 발아(發芽)는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땅째로 짓밟아 없앤다.

마법사도, 기술도, 어떤 형태로든 유무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바로 이곳에서 송두리째 없애고 역사와 진보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망설여집니까?”

감상에 사로잡혀 있는 베르나르트를 보며 시엔이 되물었다.

“내가 왜 망설여야 하지?”

베르나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망설일 것은 무엇 하나 없다는 듯이.

“그저 이 정도 규모의 초대형 마법을, 손짓 하나로 달랑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겠지요.”

“내 고뇌는 그저 어떻게 해야 이 마법을 좀 더 잘 쓸 수 있을까, 오직 그뿐이라네.”

그저 성능의 뛰어남을 초월해 마법 자체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게 가능한, 일명 결전마법(決戰魔法)이란 개념의 창시자.

다시 말해 지금 이 남자의 손끝에서 ‘아바돈’이 펼쳐지기 전까지, 이 세상에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아직, 이 마법은 공식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본다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이미 늦은 뒤다.

실제로 과거의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은 베르나르트가 마법을 시전할 당시, 공화국 일대에 포착된 수상쩍은 마력의 움직임과 불온한 기류를 무수히 보고받았으니까.

그저 몰랐을 뿐이다. 몰라서 당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며,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곳이 대륙 마법의 총본산이란 것.’

동시에 그들은 아마 이 세상 누구보다 이런 사태에 가장 잘 대응할 존재들이란 것.

바로 이 지점이, 시엔의 역할이었다.

*  *  *

“……요 며칠, 에인션트 리그 일대에 고출력의 마력 흐름이 지속적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마탑은 온갖 기술의 결정체가 모여 있는 지식의 보고이며, 따라서 이 공간을 관리하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철두철미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아주 사소한 변화와 이변조차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정해진 매뉴얼과 지시 사항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대응이 요구되는 까닭에.

그리고 이 시기, 마탑의 지하에서 벌어지는 ‘어떤 불온한 실험’ 덕분에─ 핵심 관계자들 중 그 누구도 이것이 ‘바깥의 이변(異變)’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설상가상 에인션트 리그 일대의 안전 시스템은 완전히 해제되었고, 각 마탑의 마력 원자로 제어봉은 일시적으로 작동 정지가 되어있었다.

그저 위에서의 지시란 이유 아래 일방적으로 침묵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말 그대로 보고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을 뿐.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더 이상 그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이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  *  *

남자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파괴 마법의 덕목이 무엇인 줄 아나?”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스럽게 두 팔을 벌리며.

“너무나도 강력해서 사용할 필요가 없는 마법? 혹은 너무 유용해서 그 어떤 전장에서라도 마구잡이로 난사할 수 있는 마법?”

“둘 다 아닙니다.”

베르나르트의 물음에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딱 한 번 쓰는 것으로 족한 마법이죠.”

─말하고 나서, 시엔이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곳에서 무엇이 벌어졌는지, 불과 몇 분 전의 일들이 마치 수천 년 전에 벌어진 역사 속의 까마득한 기록처럼 아득하다.

수천 년 전에 이곳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고 어떤 역사를 자랑했는지, 이 세상의 누구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공허했다.

무엇이 벌어졌는가.

검고 어두운 흑점(黑點)이 상공에 생성되고, 뒤이어 일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역사책 속에 기록된 문구를 되새기듯, 그 일들을 묘사하는 데 아무 감흥조차 들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푹.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단검을, 베르나르트의 등 뒤로 찔러넣으며.

“아아…….”

베르나르트의 옷자락을 따라 피가 흘렀다.

그리고 등 뒤에서 꽂히는 암살자의 칼날에도, 베르나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말을 잇는다.

“그래, 역시 이렇게 되겠지.”

그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가장 훌륭한 마법은, 딱 한 번만 쓰는 마법이니까.”

“우리는 당신의 헌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

“꼭 제국 같은 말을 하는군.”

시엔의 말에 베르나르트가 조소했다.

“그래도 뭐……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썩 나쁘지 않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베르나르트가 말을 잇는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나.”

그곳에 펼쳐진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공허의 심연을 바라보며.

“자네들이 이 헌신을 기억하고 말고 따위는, 이 걸작 앞에서 아무래도 좋은 거야. ─심지어 내 목숨마저도.”

남자가 말했다.

“나는 죽어도, 이 땅 위에 새겨진 나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테지.”

“…….”

“운 좋게 ‘사건의 지평선’을 피해 살아남은 이곳의 마법사들은, 죽을 때까지 평생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지 못할 걸세.”

“그리고 후대의 후대에 이어, 이곳에서 벌어진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삶의 전부를 바치겠죠.”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내 마법의 신비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겠지. 그날의 악몽을 기억하고 두려움과 경이에 떨며─.”

베르나르트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비로소 이 세상 모든 마법사가, 나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온 것일세.”

그 모습은 결코 등 뒤에서 칼에 찔린 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말씀하십시오.”

“나의 연구 자료, 나의 연구에 협력한 이들, 공작령에 있는 모든 입을 막고 기록을 지워주게나.”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부탁.

“이 세상 모든 마법사들이, 하루라도 더 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을 칠 수 있도록.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그늘 속에서 하루라도 더 절망하고 나를 경외할 수 있도록.”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아, 역시.”

시엔의 철두철미함에 베르나르트가 질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 올 때부터, 이미 시엔이 쌓아 올린 나이트워커 공작령 내의 마탑에 ‘생존자’는 없었다.

“죽기에 참으로 좋은 날씨야.”

베르나르트가 말했다.

웃고 나서 아무것도 없는, 삭막하고 메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고 장엄하고, 위엄이 서린 동시에 덧없이 느껴지는 시구를 읊조린다.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그것이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  *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너져 닳아버린 거대한 공동(空洞)의 밑에는, 황량하고 외로운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남자는 바로 그 광야 위를 걷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없는 그 땅, 그곳을 가로지르며.

얼마를 걸었을까. 며칠을 걸었을까. 말라붙은 햇살이 달빛이 되고, 등 뒤로 펼쳐진 해가 지고, 밤이 뜨고, 다시 밤이 지려 하고 있었다.

동녘 하늘 너머에서 빛나는 어스름, 서녘 하늘 너머로 가라앉는 밤의 밑바닥, 두 빛이 맞물린 경계 속에서 자아내는 보랏빛의 커튼 자락이 나부꼈다.

그리고 그곳에─ 밤의 끝이 있었다.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바로 그곳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흑점, 초위계 광역섬멸형 흑마법 아바돈. 그 게걸스러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남자를 향해.

동시에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남자를 향해.

“…….”

남자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영원(永遠)을 꿈꾸는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

콰직, 콰직!

그 육체는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드러나고 뼈가 산산이 부서져 내린 와중에도, 다시금 재생을 거듭하며 끝없이 새로운 육체를 구축하고 있었다.

끝없이 생을 갈망하고 발버둥을 치듯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듯이.

아바돈(阿鼻沌)의 어둠과 혼돈 속에서도 그 존재를 무너뜨리지 않고, 입자 단위로 존재를 짓이기고 부수고 소멸하는 폭풍 속에서도 기꺼이 살아남아서.

남자는 여전히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끈질기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조롱했다.

“끈질기다고……?”

콰직, 콰직!

부서지고 생성되고 부서지고 생성되고, 일찍이 끝없는 윤회 속에서 거듭해온 삶이, 이제는 하나의 육체에서 오롯이 시작과 끝의 완결을 맺고 있었다.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사라진 마법사는, 베르나르트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

일찍이 영원생물(永遠生物)의 비원을 꿈꾸고, 그것을 ‘아버지’의 몸에 남겨둔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말이구나, 어린 아들아.”

밤의 아버지가 조롱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나, 너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잃고 있지.”

남자에게는 자신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영원하고 완전한 형태의 자신을 손에 넣었다.

따라서 남자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지금까지 늘 그래온 것처럼, 그에게 자신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네 아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차갑게 조소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

“그리고 카산 나이트워커.”

바로 그 시엔이 ‘최초의 밤을 걷는 자’이자 밤의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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