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버지들 (1)
최초의 밤을 걷는 자, 밤의 아버지.
그를 향해 ‘왕 시해자’를 고쳐 잡는 와중에도, 암살자들의 아버지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화로웠다.
그저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남자는, 지금까지 시엔이 죽여온 인간들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어리석을 정도로 자신밖에 모르고, 손에 넣은 어설픈 힘을 주체하지 못해 우쭐해하며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족속.
─밤의 끝 같은 것은 없다.
눈앞의 남자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마법처럼 밤이 사라지고 해가 뜰 리도 없고, 심지어 죽여야 할 마지막 적조차도 아니었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거라, 아들아.”
그렇기에 나지막이 읊조리는 밤의 아버지 앞에서, 시엔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카앙!
침묵 끝에 칼날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격돌 끝에 직감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마법사는 베르나르트 혼자가 아니다.
일찍이 물질 조작 학파의 수장이자 제국 제일의 마법사 역시, 그가 꿈꾸었던 완전생물의 숙원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아바돈의 소멸 속에서조차 그 존재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육체.
그것은 완전하다는 말조차 부족하다. 문자 그대로 영원에 가까운 무엇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또다시 그의 손에 추방된 마법사 베르나르트의 역할이었다.
‘아바돈의 피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이 순간에도 아바돈의 여파는 아직까지 그의 몸에서 끝없는 파괴를 일으키고, 그때마다 남자의 육체는 재생을 거듭하며 필사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참으로 공교롭지 않나?”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네가 바란 궁극의 비원(悲願)이 눈앞까지 다가온 바로 그 순간, 하필 이런 식의 방해가 들어오다니.”
“방해라고?”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짐짓 평정을 가장하는 밤의 아버지를 향해 시엔이 말했다.
“무사히 네가 그 육체를 손에 넣었다면, 아니, 어쩌면 ‘아바돈’이 떨어지는 게 딱 하루만 늦었더라면.”
“아바돈(阿鼻沌)─.”
이 세계에서 아직 누구도 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마법의 진명.
“그랬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달라질 것은 없다.”
영원을 꿈꾸는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지.”
그저 담담하게.
“네놈의 방해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
“뭘?”
“이 육체야말로, 내가 평생을 바쳐 꿈꾸었던 ‘영원의 그릇’임을.”
틀린 말은 아니다.
바로 그 마법, 아바돈의 타격을 직격으로 맞고 모든 것이 무(無)가 되어버린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고맙구나, 나의 아들아.”
그렇기에 밤의 아버지가 조소하며 말했다.
“이 순간 내가 입고 있는 상흔, 나를 방해하는 네놈의 존재,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나는 밤의 끝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어떤 때보다 결연하게 각오를 다지며.
시엔 역시, 일찍이 제1마탑이 꿈꾼 완전생물의 비원이나 그를 이루기 위해 거듭한 무수한 시행착오를 알고 있었다.
물질 조작 학파, 아울러 생물 역시 물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육체에 괴물의 세포를 이식하거나 생명 물질을 조작해 이론상 가장 완전한 형태의 생물을 창조하는 것.
지금까지는 어떤 인간도 그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붕괴하며, 키메라나 혼종 같은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그들의 비원을 풀어줄 최후의 실마리는 결국 그릇이 되어줄 인간 그 자체에 달려 있던 까닭에.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운명을 집어삼키며 추악할 정도로 자신밖에 모르는 그 남자야말로, 완전생물의 그릇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존재였다.
“보아라, 이 경이롭고 완전한 육체를.”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끝없는 무와 어둠의 소용돌이(阿鼻沌) 속에서조차, 부서지지 않는 이 형상을.”
아바돈에 갈가리 찢겨 어느 때보다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약동하는 생명의 힘을 느끼며.
더없이 영원에 가까운 존재가, 자신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 앞에서 팔을 뻗는다.
촤아악!
그러자 그의 팔이 세포 단위에서 기괴하게 뒤틀리며, 검(劍)의 형태를 이룬다.
“─가시나무의 자세.”
촤아악!
팔뿐이 아니다.
어느덧 그의 육체가 뒤틀리며, 마치 고슴도치처럼 헤아릴 수 없는 칼날들이 솟아났다.
“더 이상 체내에서 뼈의 칼날을 사출하며 불필요한 출혈을 흘릴 필요도, 상처를 입을 일조차 없다.”
체내에 이식한 칼을 사출하는 게 아니다. 몸이 칼날 그 자체로 바뀌는 것이다.
“그에 비해 너희들이 펼치는 가시나무의 자세는 실로 조악하지.”
타앗!
보란 듯이 남자가 땅을 박찬다. 거리가 좁혀졌다.
고슴도치처럼 전신에서 칼날을 발검(拔劍)하며 춤추는 남자의 움직임은, 대량학살장치 앨리스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5식의 구사자들이 그러하듯, 남을 상처 입히며 자신이 상처 입는 일 따위는 없다.
‘가시나무의 자세’를 구사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결코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죽는 게 두렵나?”
동시에 그 확신 앞에서 시엔이 조소했다.
“그럼 진즉에 피를 빨려서 뱀파이어라도 되지 그러셨나?”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전방위 360도로 춤을 추듯 칼날의 뼈를 흩뿌린다.
“그들은 이미 생(生)을 포기해버린 까닭에.”
말 그대로 흩뿌리고 있었다.
체내의 뼈를 탄환처럼 사출하듯, 그마저 뼈마디 수준이 아니라 장검처럼 날카롭고 길게 솟은 칼자루를 모조리 뿜어내고 있었다.
“!”
칼날의 비가 쇄도했다.
그렇게 전신의 뼈를 모조리 뿜어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남자의 육체는 다시금 뒤틀리며 새로운 칼날로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칼날들이 또다시 뿜어졌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끝없이 휘몰아치는 칼날의 폭풍, 천검(天劍)의 비.
“나는 불사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뱀파이어처럼 불사의 역설에 사로잡혀 성장하지 않고 정체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남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네 몰골을 보고도 인간이란 말이 나오나?”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지?”
남자가 되물었다.
“네놈은 다리 하나 없이 태어난 결손자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나? 혹은 손가락을 하나 더 가지고 태어난 이를 괴물이라 생각하나?”
아니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와 운명 속에서 굴하지 않고 싸우며 ‘인간다운 삶’을 손에 넣는다.”
남자가 말을 잇는다.
“오히려 두 팔과 두 다리가 멀쩡히 달린 인간 대다수는,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짐승과 같은 삶을 영위하지. 그것을 정녕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못 부를 이유라도 있나?”
“그렇다.”
밤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인간이란 운명의 정복자다.”
운명을 극복하는 자.
“주어진 운명 앞에서 순응하고 굴복하며 살아가는 족속 따위는, 운명 앞에서 저항하기를 거부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족속 따위는, 인간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짐승들이다.”
남자는 마지막까지 운명에 맞서 싸우는 투사였다.
동시에 그의 전신을 따라 칠흑의 이채가 빛났다.
완전생물의 육체를 통해 펼친 가시나무의 자세, 전신에 고슴도치처럼 솟은 장검을 따라 빛나는 칠흑의 서슬.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찬가(人間讚歌)의 의지─ 오러였다.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인간의 의지.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초월하고 극복하려는 의지.
“그리고 인정하마, 시엔 나이트워커. 나의 아들이여.”
어느 때보다 검게 빛나는 오러로 몸을 휘감고, 남자가 말했다.
“너의 존재야말로, 지금껏 보아온 그 무엇보다 높고 힘겨운 운명의 장벽임을.”
운명의 장벽.
“너를 극복하고, 나는 비로소 완전한 운명의 정복자로 거듭날 것이다.”
더 이상 시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내려다보는 시선이나 조소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시엔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그 어떤 운명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려는 인간이.
“그렇군.”
그 모습을 보고 시엔이 납득했다.
“네놈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다.”
납득하고 나서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그저 여느 때처럼 각오를 다지며.
사람을 죽일 각오.
─어린 시엔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을 죽이는 재능이었다.
그 재능을 살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죽여왔다.
“「살인자의 자세」.”
시엔이 읊조렸다.
깨닫고 보니 땅을 박찬 시엔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헤아릴 수 없는 칼날로 전신을 휘감은 남자를 향해서.
카앙!
검이 맞부딪친다. 수십, 수백 자루의 장검(長劍)으로 이루어진 칼날의 육체에.
가문이 자랑하는 신기 빙륜검 루나 피에나도, 오크 부족이 준 묠니르도, 그 어떤 신기(神器)의 힘도 빌리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는, 딱히 거창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을 죽이는 데는, 그저 급소에 칼날을 찔러넣는 것으로 족하다.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이 순간, 시엔의 눈앞에─ 죽여야 할 인간이 있었다.
* * *
하늘이 검고 어둡다.
제국의 수도, 레벤부르크의 성곽(城廓) 너머로 다가오는 끝없는 밤.
밤을 걷는 자들조차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불길하고 어두운 밤하늘과, 그 밤하늘 아래서 다가오는 군세.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님─!”
그리고 그 시각, 제국 황성의 옥좌.
그곳에 앉아 있는 제국의 황제이자 ‘쌍두까마귀의 가족’ 디트리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그의 누님이자 가족의 장녀, 빌헬미나 아퀴나스의 전향에.
그녀가 거느리고 제국의 심장까지 들어온 밤을 걷는 자들 앞에서.
“어느 쪽이든 달라질 것은 없단다, 디트리히.”
빌헬미나가 말했다.
디트리히와 더불어 그곳에 남아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더 이상 햇볕도 들지 않는 이 땅에서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이 새겨진 코트를 걸친 그들을 향해.
“아버지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거란다.”
남겨진 가족들을 향해 장녀 빌헬미나가 말했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로서는,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와 그녀가 거느린 피의 군세를 막을 수 없지.”
“그렇다고 해서……!”
“유감스럽게도 그쪽에 결정의 여지는 없답니다, 디트리히 폐하.”
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아버지는 그대들을 버렸고, 이 순간 그대들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하나지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거나, 혹은 죽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