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80화 (180/200)

180화. 밤과 피 (1)

검고 어둡고 붉은 밤하늘.

바로 그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 피의 어머니가 고개를 내린다.

“때가 왔구나, 나의 딸아.”

피의 어머니, 미망공 스칼렛.

“아아, 물론이에요.”

그녀를 향해 예를 표하며,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이 미소 짓는다.

“머지않아 이 세상이 밤과 피로 물들 때가.”

그녀와 그녀가 거느린 귀족들, 심지어 그녀가 가진 성배의 힘에 이끌린 천사병의 군세까지.

제국의 심장, 레벤스부르크 앞에 진을 친 샤를마뉴 왕국의 지배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괴물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나라를 사랑했다.

그리고 어떤 세상이 되었든, 그들의 나라를 이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귀족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었다.

국가란 이름의 목장 아래 사육되는 가축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직접 나서 싸우고 피를 묻히고 희생하고 죽는다.

그렇기에 안전한 목장 속에서 길러지는 샤를마뉴 왕국의 백성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들 역시 자신이 가진 것을 위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머지않아서가 아니랍니다, 어머니.”

밤과 피의 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 순간, 이 세상을 영원한 밤과 피의 세계 앞에 무릎 꿇리는 거죠.”

신의 피가 담긴 잔, 성배를 손에 넣은 성혈의 뱀파이어.

신의 힘과 신성(神性)을 손에 넣은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  *

“티아…….”

그곳에 있을 리 없는 얼굴, 들릴 리 없는 목소리.

처음에는 죽음을 앞두고 보는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쓰러진 시엔을 향해 뻗어주는 팔, 뺨을 쓰다듬는 손끝의 온기를 느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시엔보다 더 시엔을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온기.

그것이 바로 남자와 시엔의 가장 커다란 차이였다.

동시에 시엔이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망집을 가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생(生)의 의지와 끈을 부여잡고 버틸 수 있었던 유일의 이유.

“입을 열지 마세요, 오라버니. 상처가 깊어요.”

티아가 말했다. 피투성이가 된 시엔을 보고 당황하거나 겁에 질리는 일 따위는 없다. 그저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시엔의 상처를 살피고 해야 할 처치를 헤아릴 따름이다.

“어른이 되었구나, 티아.”

“오라버니─.”

그 모습에 시엔이 남의 일처럼 입을 열자, 티아가 표정을 찌푸렸다.

“나는 죽지 않아.”

시엔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

“죽을 생각도 없고.”

“오라버니는 죽지 않을 거예요.”

티아가 말했다.

그 말을 뒤로하고 시엔이 고개를 돌린다.

무너져 내린 남자의 육체, 그들 가문의 인간들이 본래 누렸어야 할 삶과 행복과 운명을 빼앗은 남자의 최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동시에 그 육체가, 마치 암석이 풍화되듯 쩍쩍 갈라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듯이.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모든 것들은 언젠가 부서지는 법이다.

이 세상은 꿈과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에.

“언젠가는…… 나 역시 죽을 거야.”

이곳에 있는 시엔도, 티아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은 아니에요.”

티아가 말했다. 시엔 역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그 상태로,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고 어두운 하늘, 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사방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과 별자리가 밤의 장막을 은빛으로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하늘의 별을 향해, 부서져 흩날리는 남자의 육체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으로 남자는 그토록 바란 영원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끝이군요.”

티아의 말에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밤은 끝나지 않는다. 이 싸움이 그들 가문의 마지막 싸움도 아닐 것이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그렇기에 아직은 멈추어 설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지칠 대로 지치고 상처 입은 육체라 해도, 이 육체를 채찍질하며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뇨, 지금은 멈출 때예요.”

그럼에도 움직이려는 시엔을 향해 티아가 팔을 뻗는다.

“─티아.”

일전의 전투를 통해 지칠 대로 지친 시엔에게, 이미 그 손길에 저항할 힘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자신을 옭아매는 동생의 손끝 앞에서 시엔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느덧 티아는 품에서 치유의 영약이라 불리는 엘릭서를 머금고, 그대로 시엔에게 입맞춤했다.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처럼, 오라버니 역시 가족을 믿어줄 때예요.”

입맞춤 끝에 티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 남겨진 시엔을 뒤로하고 담담히 등을 돌리며.

“기다려, 티아……!”

그 모습에 시엔이 재차 팔을 뻗어 그녀를 제지하려는 찰나, 형용할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부디 우리를 믿어주세요, 오라버니.”

눈꺼풀이 무겁다.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그리고 부디 좋은 꿈을 꾸세요.”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서로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 상냥함.

마치 고슴도치가 서로를 포옹하는 것처럼, 그것은 상냥함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서로를 상처 입히는 가시와 같았다.

*  *  *

그곳은 그들 가문의 전장이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가 자신들을 위해 ‘밤의 아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움을 각오했듯이, 그들 역시 시엔과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밤과 피의 장막, 그리고 그 아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천사의 군세’가 진격하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심장을 향해서.

그 누구도 아니고, 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이라 일컬어지는 뱀파이어의 명령에 따라.

“천벌이다…….”

다가오는 천사의 군세 앞에서, 성곽을 지키는 병사 하나가 손발을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싸울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의 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그들의 손에 들린 창과 칼과 방패 따위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어쭙잖게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은 더 이상 인간들의 섭리 속에 존재하는 싸움이 아니었던 까닭에.

‘천사’들이 짐승처럼 성곽을 타고 오른다. 사다리도 무엇도 없이, 마치 뱀이나 벌레가 벽을 기어서 오르듯 수도 레벤부르크의 성곽 너머로 쇄도했다.

일찍이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던 신의 사자들이, 이제는 역으로 제국을 노리는 집행자가 되어 칼날과 이빨을 겨누고 있다.

저항다운 저항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비명과 회개하는 소리, 이따금 주기도문 따위가 공허하게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그리고 수도 일대를 포위하고 진격하는 천사들의 군세 너머, 그들을 지휘하는 밤과 피의 귀족들이 있었다.

마치 무대 위의 여흥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손에 들린 포도주잔을 홀짝이며.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군요.”

그들 밤과 피의 여왕, 로젤리아 샤를이 즐거운 듯이 입을 열었다.

“그토록 신을 부르짖던 제국이, 그들이 믿는 신에 의해 멸망하는 꼴이라니.”

“신(神)을 믿습니까?”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가시공 블라드가 물었다.

“저는 믿는답니다.”

로젤리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비록 그 신이, 우리가 상상하는 형태의 알기 쉬운 신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요.”

그럼에도 그녀에게 깃든 성배의 힘, 신의 피,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의 증명 그 자체였다.

설령 이 피가 인간을 사랑해서 흘린 피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어쩌다 저 하늘 위에서 빗방울처럼 떨어진 일적(一滴)에 불과하다 해도.

어느새 로젤리아는 유리잔에 담겨 있는 핏빛의 포도주를 홀짝이고 나서,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귀족의 의무를 수행할 때가 왔답니다.”

일찍이 기사도의 나라라 불렸던 봄과 풍요의 나라, 이제는 봄도 풍요도 없는 밤과 피의 나라를 지탱하는 귀족들이 움직일 때였다.

*  *  *

천사들의 군세 위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박쥐 떼가 날갯짓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밤하늘이 더더욱 어두워지고, 침묵하고 있던 라일라가 눈을 떴다.

어느덧 그들 일대에 칠흑 같은 흑연(黑煙)이 피어오르며, 그 속에서 하나둘씩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과 피의 귀족들.

그것도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의 축성을 받고 ‘신의 힘’을 손에 넣은 괴물들이다.

아니, 이제는 그들을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신의 사도(使徒)였다.

일찍이 신성 제국, 신의 나라를 참칭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찾아온.

“아, 경애하는 옛 암살자들의 어머니.”

바로 그곳에서, 일찍이 가시공 블라드라 불리는 미남자가 미소 짓는다.

“보아하니 당신을 지켜줄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이곳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는 없다.

그는 지금쯤 뱀파이어들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눈엣가시였던 ‘그 남자’와 맞서 싸우고 있을 테니까.

“인간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들이지요.”

승리하든 지든 어느 쪽은 확실히 죽을 것이고, 남는 쪽은 재기불능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당신들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자들은 없을 겁니다.”

“…….”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팔을 뻗어, 열 손가락 사이로 거미줄을 휘감고 펼칠 따름이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죽음의 거미줄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그곳에 있는 남자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그리고 그때였다.

촤악!

어느덧 발밑 일대에서 피가 응고된 것처럼 날카로운 핏빛 꼬챙이들이 솟아나며, 휘몰아친 거미줄을 모조리 꿰뚫고 찢는다.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헤아릴 수 없는 가시를 세워 올리며 자신을 지키는 남자를 향해, 라일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의 어머니란다.”

암살자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겁쟁이처럼 벌벌 떨며, 우리 가문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온 너희 족속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목소리로.

“혹은 기억력이 나빠서 그새 까먹었거나.”

“뭘 말입니까?”

“인간의 악의.”

라일라가 말했다.

“너희는 천년을 살아왔지만, 우리는 천년에 걸쳐 저물지 않는 밤의 제국을 쌓아 올렸단다.”

이 세상에 가장 커다란 악의 꽃을 피워 올린 당사자로서, 눈앞에 있는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 누구도 우리 가문,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밤을 끝낼 수 없지.”

“아, 운명의 꼭두각시가 잘난 듯 지껄이는군요.”

가시공 블라드가 조소했다.

라일라 역시 남의 일처럼 웃었다.

더 이상 그들의 몸에 묶여 있는 꼭두각시의 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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