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밤과 피 (2)
이곳, 신성 제국의 수도 레벤부르크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곳에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있었다.
누구도 그들의 밤을 끝내게 놔둘 수 없다는 듯이.
동시에 그들과 그들의 적 역시,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회개하세요.”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성혈의 뱀파이어이자 붉은 백합의 성녀, 로젤리아 샤를.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의 군세를 거느린 채, 그곳에서 절망하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 달콤하게 속삭였다.
마치 진정한 성모(聖母)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자애롭고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고, 인간들의 우상으로 전락한 거짓된 신이 아니라, 진정한 신의 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거지요.”
로젤리아가 말했다.
“회, 회개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성모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일제히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그곳에 있는 새로운 신 앞에서 새로운 신앙을 맹세하듯이.
* * *
꿈을 꾸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의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꿈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게 정말 꿈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본래 시엔이 누려야 했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쉬운 삶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그 누구도 쉬운 삶을 살지는 않는다.
농사는 전쟁이고, 상품을 사고파는 것도 전쟁이다. 죽고 죽일 각오 없이는 절대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결코 극악(極惡)한 삶은 아니었다.
때로는 굶주림을 느끼고 때로는 추위를 느끼며 많은 부족함에 시달렸으나, 그럼에도 가진 것에 만족하며 웃을 줄 아는 삶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식,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핏줄이 이어진다.
대륙의 역사가 격동하는 와중, 그 어떤 역사적 사건도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 조용한 변두리의 삶.
그런 삶 속에서, 무심코 공화국 제일의 명가라 일컬어지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멸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라의 명운이 기울어갈 때조차.
시엔과 시엔의 진짜 가족들은 그 나라를 차지한 새로운 지배자 앞에 충성하며,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영위할 따름이다.
공화국 제일의 권력자,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쓰러졌다는 소식조차 남의 일이자 하나의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삶.
‘나는 이런 삶으로 괜찮았던 건가?’
시엔이 무심코 자신에게 되물었다.
본래 누렸어야 할 삶과 행복, 본래 누렸어야 할 운명, 그저 그것을 온전히 누리는 삶으로 만족해야 할까?
네가 내 아들이라서 다행이란다.
알 수 없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허무와 공허가 마지막까지 채워지지 않고, 정해진 운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시엔을 괴롭힐 따름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비록 처음부터 시엔이 바란 삶이 아니었을지언정,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으로 살아가기를 결의했던 것은 시엔 자신의 의지라고.
시엔의 운명은 한순간도 빼앗겼던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시엔은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시엔이 그 남자를 쓰러뜨린 것 역시, 그가 시엔과 가족의 운명을 빼앗아 갔다는 알기 쉬운 복수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시엔이 나아가는 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까닭에.
그게 다였다.
이런 평범한 삶 따위, 시엔은 한순간도 바란 적 없었다.
이것은 시엔이 본래 누렸어야 할 삶도 운명도 아니다.
처음부터 시엔은 오직 시엔 나이트워커였고,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으며─.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까닭에.
* * *
눈을 뜨자, 그곳은 무척이나 익숙하고 그리운 곳이었다.
그곳은 그 언제라도 시엔이 있어야 할 장소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곳이기도 했다.
“─!”
나이트워커 가문의 공작 저택.
“눈을 떴느냐.”
시엔이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곁에 앉아 있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루나 님!”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고, 전신을 칼로 갈가리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이 재차 시엔의 몸에 새겨졌다.
“티아는……!”
“티아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단다.”
루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있어야 할 전장으로 돌아갔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그 말이 시엔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불길한 침묵처럼 느껴졌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술을 깨물 따름이다.
바로 그때였다.
“혹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
그 말을 듣자마자 시엔이 대답했다.
“갈 겁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도 없이.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아니, 설령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제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시엔의 바람은 그저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거기에 늦고 이르고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럼 함께 가자꾸나.”
“!”
결의를 다진 시엔의 말에 루나가 대답했다. 거꾸로 그 말에는 시엔 쪽에서 당황하며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느냐, 시엔.”
루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되묻는다.
“네가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향하겠다는데, 나 역시 그것을 보고만 있으란 소리냐?”
“하지만…….”
루나 나이트워커는 비록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이기는 하나, 그녀의 능력은 결코 전투 자체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
“함께한다면, 나는 앞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루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 역시 너를 보내지 않겠지.”
“…….”
시엔은 침묵했다. 어지간한 마탑의 공방에 버금가는 마도 설비가 가득 설치된 이곳 공작령과 달리, 외지에서 루나가 가진 능력 ‘지혜의 고리’를 쓰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그것이 알기 쉬운 일대일의 상황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난전 속에서는 더더욱.
“루나 님의 목숨이 위험할 거예요.”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루나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 밤의 아버지와 싸우며 입은 상처들.
이것은 절대 하루아침에 지워질 상처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일찍이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시엔에게 있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시엔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던 까닭에.
그것은 시엔의 가족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 루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가죠.”
그렇기에 시엔이 팔을 뻗었다.
루나 역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시엔의 손을 잡았다.
혼자서는 가기 어려운 길이라도, 두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 * *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
아울러 ‘붉은 백합의 성녀’란 이명을 가진 그녀의 앞에, 또 하나의 성모(聖母)가 있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한때나마 좋았던 우리 사이가 떠오르네요.”
그녀를 보며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키득거렸다.
빌헬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키보다 커다란 검고 어두운 낫을 고쳐 잡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다.
자신에게 새겨진 저주 같은 족쇄,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뜬 진실의 눈으로.
“당신의 제국이 불타는 모습을 보세요, 친애하는 아퀴나스 추기경.”
로젤리아가 말했다.
“당신에게 충성하고 무릎 꿇었던 이들이, 당신의 등을 향해 칼을 찔러 넣으려는 이 풍경을 보세요.”
그곳에 펼쳐진 헤아릴 수 없는 천사병의 군세, 바로 그 군세를 이끄는 군단장들을 거느린 채.
세상에서 가장 희소하다 일컬어지는 금속, 흑진은(黑眞銀)으로 이루어진 갑옷과 검을 쥐고 있는 천사들이었다.
하품의 7품, 권품천사.
도읍과 나라와 왕들을 수호하는 천사.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답니다, 아퀴나스 추기경.”
그 군세를 이끄는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의 권세와 제국이 그러하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요.”
“모든 것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
그 말에 빌헬미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간을 포기하고 불사를 손에 넣은 괴물이, 잘난 듯이 필멸(必滅)을 논하다니.”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
로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감정 없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길 따름이다.
그러자 일찍이 신성 제국의 검이었고, 이제는 로젤리아의 사병(私兵)에 지나지 않는 천사병의 군세가 쇄도했다.
“─어리석은 것들.”
그들 앞에서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 어떤 존재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끝을.
* * *
“아이고, 아파 죽겠네.”
흐르는 피를 닦으며 미하일이 남의 일처럼 말했다.
끝없이 쇄도하는 밤과 피의 귀족들, 그들에 맞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으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며.
곁에 있는 누님 이자벨, 대모 앨리스,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상처 입기를 주저하지 않고 상처 입힐 각오를 다지며.
“미, 미하일…….”
“저는 괜찮습니다, 대모님.”
걱정스러운 듯 말을 잇는 앨리스의 말에 미하일이 대답했다.
어느덧 미하일의 육체는, 살을 뚫고 솟아나며 폭주에 가깝게 생장한 가시나무 덕에 사람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칼날의 육체가 그곳에 있었다.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로 전신을 휘감고 전신에 칼자루를 솟아 올리며, 그때마다 자신 역시 기꺼이 상처 입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당신이 저를 가문으로 데려오려 할 때,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고 주저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하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앨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 언제나 앞서 상처 입기를 주저하지 않고, 우리가 흘릴 피와 상처를 대속했던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촤아악!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에요, 앨리스 대모님.”
“미하일…….”
그 말과 함께 미하일의 날개뼈 부위가 찢어지며, 마치 천사가 날갯짓하듯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뼈와 금속과 칼날로 이루어진 강철의 날개였다.
“사람이 죽을 때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그렇게 미하일이 피를 흘릴 각오를 다진 동시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렇게 흘린 피가 검고 어두운 암혈(暗血)이 되어 적을 불태우고 상처 입히는 가족이.
“이자벨 누님.”
“그러다 다친다, 얘.”
이자벨이 말했다.
미하일과 똑같은 피를 흘리며 똑같은 상처를 입고, 똑같은 희생을 주저하지 않는 가족이.
“다들…… 어른이 됐구나.”
그들의 대모, 앨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렸던 그녀의 아들과 딸이, 이제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방패를 자처하며 싸우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이상할 정도로 앨리스의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이것이 가족이구나, 하는 커다란 만족과 행복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