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82화 (182/200)

182화. 밤과 피 (3)

또 하나의 아버지와 딸이 그곳에 있었다.

웃는 남자, 요한과 밴시 린.

함께 등을 맞대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천사병과 대천사, 밤과 피의 귀족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그들의 칼끝이 시린 냉기와 서슬을 흩뿌렸다.

“지쳐 보이는구나, 린.”

“……저는 괜찮아요, 대부님.”

요한의 걱정스러운 미소에 밴시 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용히, 그녀의 눈동자를 뒤덮고 있는 검은 붕대를 풀어 헤치며.

“─.”

핏빛으로 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어떤 뱀파이어보다 붉고 짙은 진홍색 눈동자가, 피로 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린.”

그 모습에 요한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린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저주받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어요.”

흐느끼며 죽음을 고하는 요정, 밴시(Banshee)의 이명을 가진 가문의 암살자가 말했다.

붕대를 풀어 헤치고 그녀의 두 눈동자로 앞을 볼 때마다 흐르는 피눈물, 그것은 세상을 너무나도 잘 보게 된 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잘 보일수록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게 된다. 심지어 보지 말아야 할 것조차 보게 된다.

그게 그녀가 저주였다.

“이제는 아니에요.”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뒤로하고, 린이 담담하게 고했다.

“이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웃는 남자,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느 때처럼 초승달 같은 미소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어째서지?”

“이렇게 당신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검고 어두운 흑진은의 갑주와 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신성군단장, 「로드 템플러(Lord Templar)」의 검을 막아내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는 제게 맡겨주세요.”

여느 때와 같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  *  *

‘가족이 되고 싶니?’

린을 낳은 어머니는 거리의 어느 매춘부였다.

아버지는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영영 알 도리도 없을 것이다. 린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자기 딸을 마녀라고 여기며 경악했고, 나아가 자신이 ‘마녀를 낳은 여자’라 불릴까 봐 두려워 그녀를 뒷골목에 버렸다.

돌이켜 보면 딱히 마녀라서 버려진 게 아니었다.

아마 린의 눈동자가 마녀처럼 붉고 저주받지 않았어도, 그녀는 똑같이 버려졌을 테니까.

처음 린의 눈동자에 흥미를 가진 것은, 공교롭게도 도시에 성직자의 신분으로 잠입해 있던 제국 공안이었다.

그 눈동자에 모종의 힘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이 곧 제국과 교회의 유용한 전력이 될 거라 여겼다.

그때부터 어린 린은 성당의 고아원에 거두어져, 순백의 붕대를 눈에 감고 제국 공안의 손에 길러졌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평소의 그녀는 겉으로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고, 밤에는 공화국령에서 활동하는 제국 공안의 임무를 돕기 위해 그녀의 ‘눈’을 혹사당하는 나날이었다.

그녀는 사람의 아주 작은 변화, 극도로 훈련받은 요원마저 간파할 수 없는, 또는 숨길 수 없는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대신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정보 처리량으로 인해 뇌의 과부하와 더불어 혈루(血淚)가 흘렀지만, 공안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제국 공안의 상층부는 어린 린을 ‘본국’으로 송환해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녀가 본래 누렸어야 할 운명은 무엇일까.

낳자마자 린을 버린 매춘부가, 정말 그녀를 버리지 않고 애정과 사랑으로 키워주는 미래일까?

혹은 이대로 제국으로 끌려가 공안의 손에 교육과 세뇌를 거쳐 철저한 살인 병기로 길러진 미래일까?

어쩌면 제국에서의 삶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름의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 수도 있을 테니까.

어느 쪽이든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려야 할 운명을 빼앗겼고, 누려야 할 행복과 삶과 모든 것들을 박탈당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당신이 아버님이 말한 밤의 괴물이구나.”

어린 린이 말했다.

말끔한 정장에 초승달처럼 섬뜩하게 찢어진 미소를 짓는 남자를 향해.

흑색 정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손에는 달빛에 서슬 퍼렇게 빛나는 스틸레토 단검이 들어 있다.

단검의 끝자락을 따라 뚝뚝 피가 떨어진다. 그것이 누구의 피일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 땅과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은 절대 그들의 정원에 쥐새끼처럼 숨어든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나는 괴물이란다.”

남자, 요한이 말했다.

“네가 그런 것처럼 말이지.”

“…….”

“그 남자, 네 아버님이 너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니?”

“……괴물.”

“그래.”

소녀가 대답했다. 요한이 웃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

웃고 나서 요한이 말했다.

“우리 같은 괴물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  *  *

그곳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불타는 제국의 수도,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섭리 밖의 존재들이 넘쳐나는 지옥도 속.

일찍이 그녀를 거두어준 가족이자 오라버니, 그리고 대부(代父)의 곁.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곳.

카앙!

눈앞에서 블랙 미스릴로 전신을 휘감은 로드 템플러, 군단장의 검이 쇄도했다.

그에 맞서 린의 손에 들린 태도가 휘감겼다.

눈앞의 상대에게 거짓말이나 도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괴물이니까.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가 백 마디 말을 내뱉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듣고 볼 수 있었으니까.

움찔.

그때마다 피로 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느덧 뺨 위를 따라 두 줄의 선명한 혈선(血線)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두 눈동자가 고통에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늘 가족을 위해 상처 입을 준비가 된 까닭에.

*  *  *

더 이상 그들의 몸에 묶여 있는 꼭두각시의 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나서 라일라는 깨달았다.

단 한 순간도, 그 실은 매달려 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철저하게 실을 매달고 움직이는 쪽이었다.

자신과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아무 죄도 없는 타인을 희생시키고 상처 입히는 악인들.

누군가가 누려야 할 운명을 빼앗고, 삶과 행복을 박탈하고,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누린 것은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온갖 전쟁과 다툼, 불화, 살인, 그 모든 것들을 부추기고 이익을 챙기는 죽음의 상인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알기 쉽고 가엾은 피해자가 아니랍니다.”

그렇기에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웃었다.

“우리는 가해자랍니다.”

웃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빼앗았죠?”

검고 어두운 거미줄 앞에서, 마치 꼭두각시처럼 필사적으로 춤추는 가시투성이의 광대를 향해.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손에 넣고 무한한 영화를 누리는 동안,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그릇된 악(惡)에 가해자가 되어 800년 가까이 권세를 손에 쥐고 휘두르는 동안, 당신들 뱀파이어 클랜은 무엇을 했나요?”

라일라가 조롱했다.

“그야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지요.”

“…….”

“마치 죽은 사람처럼 침묵하고, 어둠 속에서 벌벌 떨며, 당신들이 마음껏 거닐어야 할 밤조차 무덤 같은 침묵 속에서 지새워야 했겠지요.”

정말로 우습다는 듯이.

“우리가 당신들의 밤을 빼앗았으니까.”

천년공 체사레조차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것 역시 누구도 아닌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이었다.

뱀파이어 클랜은 세상에 아무 관심 없는 척 시치미를 떼며,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치를 보며 세상에 달관한 존재인 양 거짓된 연기를 펼쳤다.

“당신들 종족이 본래 누려야 할 운명과 삶, 행복, 그 전부를 우리가 빼앗아 왔으니까.”

정작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그들 종족이란 듯이.

“그 치세도─.”

촤아악!

라일라의 조롱에 비로소 얼굴을 일그러뜨린 뱀파이어, 가시공 블라드가 쏘아붙였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을 고할 것이다.”

“모든 밤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지요.”

라일라가 대답했다. 그들 역시 모를 리가 없다.

이 세상은 물거품과 같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가 할 말은 오직 하나였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랍니다.”

800년에 걸쳐 그들 가문이 그래왔던 것처럼.

*  *  *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빼앗긴 ‘피해자’이자 옛 밤의 주인이 그곳에 있었다.

저 멀리, 신성 제국의 심장이자 수도 레벤부르크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며.

미망공(未亡公) 스칼렛.

그녀의 믿음직스러운 딸이자 밤과 피의 여왕, 로젤리아와 휘하의 귀족들이 붉은 밤을 위해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어둑어둑한 밤을 등진 채 홀로 그 풍경을 지켜본다.

함께 영원을 약속했던 사랑하는 남자는 없다.

그렇기에 그날 성배를 손에 넣었을 때, 그녀는 그것을 현명한 딸에게 넘겨주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들이 다시 영원한 밤을 손에 넣게 된들, 무엇이 달라질까?

로드 스칼렛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평생에 걸쳐 바란 염원, 그러나 그 염원을 함께 기뻐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세상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가슴이 허전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이토록 공허하고 덧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미망공, 그 이름처럼 미처 죽지 못해 살아가는 존재의 고통을 뒤로하고.

“아, 불청객이 찾아왔구나.”

최고(最古)의 뱀파이어, 로드 스칼렛이 나직이 고개를 들었다.

초승달처럼 섬뜩하게 찢어진 미소를 짓는 남자를 향해서.

“늙은이들이 늘 하는 말이 있지.”

바로 그 미소 짓는 남자가 말했다.

“다들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이야.”

“아, 실로 맞는 말이구나.”

스칼렛 역시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살 용기는 없지만 죽을 용기는 더더욱 없거든.”

“그럼 우리가 용기를 북돋아 줘야겠네.”

“딱 한 발자국을 내디딜 용기 말이지.”

바로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아니, 정확하게는 두 개의 목소리였다.

마녀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 최강의 하이마스터라 불리는 웃는 남자.

그들 세 명의 가족이, 오직 한 사람의 뱀파이어를 마주하고 있다.

시엔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이트워커 가문을 지탱해온 세 개의 기둥들이.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

아울러 그들을 마주하는 최고의 뱀파이어가, 씁쓸한 듯이 속삭였다.

“단지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그렇기에 로드 스칼렛이 차갑게 되물었다.

“이미 죽은 자를, 무슨 수로 죽일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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