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밤과 피 (4)
이미 죽은 자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며 로드 스칼렛이 차갑게 두 팔을 벌렸다.
촤악!
마치 등의 생살을 찢고 튀어나오듯, 체내의 혈액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솟아나 열두 장의 커다란 날개로 거듭난다.
피의 날개.
바로 그 12장의 혈익(血翼)을 펼치고 치천사처럼 몸을 휘감으며, 피의 어머니가 읊조렸다. 더없이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검고 어두운 칼날이 날아와 로드 스칼렛을 향해 쇄도했다.
더없이 깊은 증오와 원념이 담겨 있는 저주의 검(劍).
그녀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증오하는 그레텔의 검이었다.
가문의 4식, 갈까마귀의 자세.
“아니, 죽일 거야.”
마녀 그레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가족과 가문을 위협하는 그 누구도 살려둘 수 없으니까.”
“가족이라.”
그 말에 스칼렛이 대답했다.
“나 역시 가족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사람이 있었지.”
그녀의 전부나 다름없는 소중한 존재를,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빼앗겼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녀 역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신이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되묻고 나서, 이내 깨달았다.
─피였다.
피의 복수(벤데타).
“죽는 것은 너희들이다.”
스칼렛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자신의 전부를 앗아간 증오스러운 이들에게, 똑같이 자신의 전부를 잃는 고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그것이 바로 남겨진 자의 사명이다.
아울러 그녀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이기도 했다.
* * *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그리고 그 말처럼, 형상화된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바로 그녀의 등 뒤에 수호령처럼 깃든, 검고 어두운 사신(死神)이 떠올랐다.
칠흑처럼 검고 어두운 로브를 쓴 채,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손으로 빌헬미나를 포옹하듯 휘감고 있는 존재.
“사마엘(Samael).”
죽음을 관장하는 천사.
혹은 천사이자 타락해 떨어진 악마라고도 불리며, 교회에서는 어느 쪽으로든 그 존재 자체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 이단(異端)의 초월자.
옛 고대어로 ‘신의 독’이란 의미를 가진 그 존재가, 마치 빌헬미나에게 깃든 수호천사처럼 곁을 지키고 있다.
그 존재를 강림시키고 나서도, 여전히 빌헬미나는 그곳에 있었다.
어느 때보다 검고 어두운 칠흑의 낫을 고쳐 잡고.
“…….”
그 모습을 보며 로젤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불사의 삶과 신의 피를 손에 넣은 성혈의 뱀파이어, 그녀조차 압도될 정도의 스산하고 섬뜩한 위압감.
빌헬미나를 휘감고 있는 죽음의 형상, 사마엘이 나직이 뼈밖에 없는 팔을 뻗는다.
그러자 그 손끝을 중심으로 에는 듯한 삭풍(朔風)이 휘몰아치며, 일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신성군단의 천사들, 밤과 피의 귀족, 그 모든 이들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제대로 된 저항이나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진다.
마치 바위가 오랜 풍화 속에서 가루와 입자가 되어 흩날리듯이.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그럼에도 그녀, 로젤리아는 멀쩡히 있었다.
“그것은 저도, 그리고 당신 역시 예외일 수 없지요. 친애하는 아퀴나스 추기경.”
“아직도 자신이 인간으로 느껴지시나요?”
그 말에 빌헬미나가 조소했다.
“아, 물론이죠.”
로젤리아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저는 여전히 인간이랍니다.”
“그것참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 말과 함께, 낫을 고쳐 잡은 빌헬미나가 땅을 박찬다.
카앙!
그리고 로젤리아의 손바닥을 찢고 흘러내린 피가, 마치 날카로운 창의 형태로 응고되며 빌헬미나의 낫을 받아쳤다.
낫을 받아치는 동시에 빌헬미나에게 깃든 사마엘이 다시금 죽음의 삭풍을 내뿜었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내뿜어지는 사기(死氣) 앞에서 로젤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더불어 ‘신의 피’를 가진 인간이기도 하죠.”
성혈.
그 이름처럼 로젤리아에게 깃든 신의 가호가 죽음의 천사가 내뿜는 삭풍을 가로막는다.
신과 죽음, 인간이 감히 정복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섭리이자 그 무엇보다 인간에게 가까운 섭리가 격돌했다.
촤아악!
격돌 끝에, 로젤리아가 흩뿌린 휘광(輝光)이 죽음의 성모와 천사를 향해 내리꽂혔다.
“신이 있기에 섬기는 것이 아니랍니다.”
검고 어두운 죽음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섬기는 존재가 곧 신(神)이 되는 것이죠.”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로젤리아가 차갑게 말했다.
“설령 그것이 피를 흘리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마치 자신이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고 말하듯이.
“제국 국교회 제일의 실세라 불렸던 빌헬미나 아퀴나스 추기경.”
상처 속에서 죽음의 성모와 천사가 자세를 다잡는다.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세요. 더 이상 아무도 당신과 교회를 섬기지 않는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고 시종 여유를 잃지 않으며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말했다.
“당신들의 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죠.”
신조차 죽음을 맞는다.
그 말에 빌헬미나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맞았던 까닭에.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빌헬미나 역시, 한순간도 신의 존재를 믿었던 적이 없는 까닭에.
신은 애초에 살아 있던 적도 없다.
오직 인간이 있을 뿐이다.
촤악!
낫을 고쳐 쥔 빌헬미나가 재차 땅을 박찼다. 아울러 그녀를 휘감고 있는 사마엘이, 비로소 그녀를 포옹하고 있던 두 팔을 벌려 펼친다.
그 어느 때보다 검고 어두운 칠흑의 폭풍이 빌헬미나의 발끝에서 휘몰아친다.
일찍이 스치는 것으로 상대를 즉사에 이르게 하는 나이트워커 가문 4식의 극의, 네버모어(Nevermore)를 펼치듯이.
그것은 그저 빌헬미나의 낫에 깃든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와 사마엘의 존재 그 자체를 망토처럼 휘감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닿는 것으로 모든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필살(必殺)의 기운.
동시에 성혈의 뱀파이어 역시, 상대가 휘감은 죽음의 기운에 맞서 성스러운 가호를 갑주처럼 휘감았다.
무엇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성모와 천사가 땅을 박찼다.
빛과 어둠이 일렁이는 망토처럼 서로를 휘감고 부딪치며, 저마다의 믿음을 위해 격돌하고 있었다.
“!”
─바로 그때였다.
또 하나의 죽음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의 숙녀, 라일라 나이트워커.
“라일라……!”
그 존재에 비로소 로젤리아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의 빛이 내려앉는다.
“신의 힘과 피를 손에 넣어도, 여전히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라일라가 차가운 조소를 흘린다.
“그 누구도 죽음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녀의 곁을 지키는 동생, 빌헬미나와 함께.
“…….”
피할 수 없는 두 명의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 * *
티아와 비고, 아울러 라힘 역시 그곳에 있었다.
다른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전부를 지키고 적들의 전부를 빼앗기 위해서.
“효월(曉月).”
티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일찍이 그의 대부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이 전해준 비기.
체내의 마력과 오러가 공존하며 제곱의 힘을 뿜어내고, 밤과 피의 귀족과 천사들 사이에서 티아의 칼날이 춤을 춘다.
명경지수의 자세.
그리고 바로 그 티아를 엄호하며 비고가 거미줄을 펼치고, 그들의 무방비해진 등 뒤에서 라힘이 차갑게 불타는 주먹을 내리꽂는다.
“아무도 가족을 상처 입히게 놔두지 않겠소!”
그게 그들의 결의였다.
“물론이에요, 라힘 오라버니.”
그렇게 말하며 티아가 천사병의 군세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누구도 우리 가족을 상처 입히게 놔두지 않아요.”
그날, 티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기원이자 밤의 아버지가, 대부 시엔의 손에 쓰러지는 풍경을.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남자가 죽은 것은 그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앞을 가로막는 적이었던 까닭이다.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단 한순간도 피해자였던 적이 없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결코 가엾고 비극적이고 동정받아야 할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운명이고, 설령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다 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테니까.
그들은 늘 이 세상의 가해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옥 같은 세상을 더더욱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들고 바꾸는 악인들.
악은 자신밖에 알지 못한다. 오직 자신의 전부밖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 * *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의 사고방식이었다.
사랑하는 이들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해진다. 모두가 상처 입지 않는 이상의 세계를 꿈꾼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이들 이외의 전부를 바친다.
얼굴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 타인, 그들과 똑같이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을 바라는 누군가의 행복을 모조리 짓밟고 사랑하는 이를 빼앗으며 지옥 같은 세상을 더 지옥 같은 곳으로 바꾼다.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 그들은 행복을 손에 넣는다.
* * *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호흡이 흘러나왔다.
춥다. 그리고 하늘이 어둡다.
“조금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
시엔의 흐트러진 호흡을 깨닫고, 곁에 있던 로브 차림의 루나가 말했다. 시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가족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그것은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니더냐.”
“우리 모두가 그렇죠.”
시엔이 말했다.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눈빛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 조용히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갈 길이 멀구나.”
그렇기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아직 멈출 때가 아니니까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아직은 멈출 때가 아니다.
“가족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루나가 되묻는다.
그 물음에 시엔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 끝에,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믿어요.”
“그런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초조하고 다급하게 굴고 있구나.”
“가족을 믿으니까요.”
시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루나가 눈을 끔벅거렸다.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은, 이 정도 역경 앞에서 쓰러지고 죽지 않을 거란 걸 믿어요.”
시엔이 말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가서, 그들의 상처를 함께 나눌 거예요.”
믿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을 믿기에, 그들이 입을 상처를 조금이라도 대속해서 짊어질 수 있도록. 그들이 입을 고통과 상처를 조금이라도 대신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여.”
그 말에 루나가 미소 지으며 예를 표했다. 표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래도,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