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밤과 피 (5)
밤이 어둡다. 그리고 피가 짙었다.
지평 너머에서 너머까지, 일찍이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영광을 재현했던 수도 레벤부르크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체와 부서진 건물 잔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살아서 발버둥 치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부서진 구조물이나 잔해 따위를 이용해 시가전(市街戰)을 치르며 며칠에 걸쳐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단, 혹은 그저 아무 사명감도 없이 징집됐을 뿐인 보병, 그 외에도 끌어모을 대로 끌어모은 이들이 무너지고 함락되기 직전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패잔병들의 저항이자 일방적 학살이었다.
일찍이 위세를 상징했던 자랑스러운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미래는 더 이상 그들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 전쟁과 싸움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그들의 손을 떠나, 오직 자기 손으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강자들의 싸움이 미처 끝나지 않은 까닭이다.
평생에 걸쳐 자기 손으로 밤의 제국을 쌓아 올린 그들의 싸움이.
“아무 의미도 없는 저항이랍니다.”
그 앞에서 로젤리아 샤를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를 휘감는 성배의 후광과 함께, 그녀를 지키는 고위 뱀파이어 가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곳에 있는 두 명의 죽음 앞에서 싸늘하게 말을 잇는다.
“오늘로 당신들의 밤은 끝날 것이고, 밤하늘 역시 짙은 피로 물들겠죠.”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그 말에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의 밤도, 당신들이 흘린 피도 무엇 하나 마찬가지죠.”
지금쯤 어딘가에서 차가운 껍데기가 되어 산산이 조각났을 가시공의 시체를 뒤로하고.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로젤리아가 조롱하듯 되물었다.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세요.”
“풍경이라.”
라일라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헤아릴 수 없는 천사와 뱀파이어의 유해로 쌓아 올린 산이 보이네요.”
로젤리아가 다시금 코웃음을 친다.
“얼마의 산을 쌓아 올리든 개의치 않는답니다.”
웃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당신들의 제국을 무너뜨리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희생이지요. 아니─.”
말하다 말고 로젤리아는 침묵했다. 침묵 끝에 그녀가 다시금 운을 뗐다.
“오히려 그들이 쌓아 올린 유해의 비탈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당신들의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었지요.”
아울러 침묵하고 있던 빌헬미나가, 죽음의 천사를 덧씌운 채 땅을 박찬다.
마찬가지로 라일라의 거미줄이 흩뿌려지며 그녀를 엄호하듯 휘감았다.
죽음이 실고리를 엮듯 엮이고 엮이며, 그곳에 있는 신의 피를 가진 뱀파이어를 향해 휘몰아친다.
‘나의 왕자님은 어디에 계실까.’
그 모습을 짐짓 무심하게 바라보며, 로젤리아가 되뇌었다.
시엔 나이트워커가 밤의 아버지를 쓰러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전을 펼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믿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시엔은 절대 패배하지 않고, 어떤 상처와 부상을 입든 가족들을 위해 이곳에 나타나 줄 것임을.
‘아아, 나의 왕자님.’
바로 그때였다.
촤아악!
깨닫고 보니, 그녀의 곁을 지키던 고위 뱀파이어 하나의 육체를 따라 핏빛의 실이 내달린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격에 로젤리아가 일순 숨을 삼켰다.
“─.”
“마음씨 곱고 지혜로우신 공주님, 로젤리아 샤를.”
그런 그녀를 보며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싸울 때는 늘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그녀가 펼친 죽음의 실을 따라, 일대 뱀파이어들의 육골이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나며 찢어진다.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허황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공상하는 게 아니라.”
이내 깨달았다.
그 참격(斬擊)은 방금 이 순간에 펼쳐진 게 아님을.
“거미줄…….”
“「죽음의 장막」.”
라일라가 나지막이 읊조린다.
어느덧 사방이 탁 트여 있는 그곳 일대에, 부서진 벽돌의 잔해와 저 높이 솟은 교회 첨탑(尖塔)의 끝자락에, 벽에서 벽에,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거미줄이 촘촘하게 엮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심지어 그것은 칼날 같은 것으로 쉽사리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실을 유지하는 것은 오러,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찬가의 의지 그 자체였으니까.
“설령 어떤 강대한 힘을 얻고 취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경계를 조여야 하는 법이니.”
“…….”
그 모습에 로젤리아가 조소했다.
“참으로 우습네요.”
조소 끝에 그녀가 말했다.
“인간의 섭리 따위로…… 정녕 저를 어쩔 수 있다고 믿는 그 신앙(信仰)이.”
동시에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핏빛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어느덧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마저 갈가리 찢어지고, 피로 된 날개가 터지며 순백의 육체 위를 진홍이 구석구석까지 적시더니─ 그대로 타올랐다.
화르륵!
일대를 집어삼키는 불과 피.
그 순간, 로젤리아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폭발하는 혈류 속을 뚫고 들어오는 성모와 죽음의 천사.
그것에 맞서 성배의 힘을 휘감고 자신을 지키려는 찰나, 그것을 찢고 들어오는 또 하나의 칼날을.
라일라 나이트워커의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스틸레토 단검.
그 칼날에 깃들어 있는 의지를.
인간의 의지에 선악 따위는 없다. 오직 의지의 강함과 나약함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단검에 휘감긴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그 의지에서 비롯된 끝없는 찬가였다.
“!”
암살자의 검, 그것도 일찍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렸던 그녀의 검.
바로 그 검과 의지가 성혈의 뱀파이어를 향해 내달린다.
처음으로 생살을 찢는 소리가 났다.
피를 뒤집어쓴 진홍색의 피부 위로, 살갗을 찢고 서슬 퍼런 날붙이가 깊숙이 파고드는 감촉이었다.
로젤리아의 목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칼에 베여 상처 입는 인간의 아픔과 고통.
내지르고 나서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쇠붙이의 무게를.
아울러 그 당대의 괴물들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던 자신이야말로, 평생 전장(戰場)과는 인연이 없는 새장 속의 새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생 이 나라, 샤를마뉴 왕국의 기사들을 증오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꽃밭과 기사도밖에 없는 멍청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의 생살을 찢는 날붙이의 고통 앞에서 깨달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을 거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고서, 나약한 인간은 절대로 전장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평생에 걸쳐 조롱해온 그녀의 조국, 샤를마뉴 왕국은…….
바로 그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겁쟁이들의 용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지켜져 왔다.
“─아.”
오만에 빠져 있던 것은 그녀였다.
평생 손끝에 핏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탁상 위에서 정략을 논하며 전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던 오만.
그제야 자신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빠져 있던 것을 깨닫는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사람을 죽일 각오가 아니다.
고통받고 죽임을 당할 각오였다.
아울러 샤를마뉴 왕국의 기사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때, 언젠가 자신도 똑같은 고통을 받을 거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기사도(騎士道)였던 까닭에.
“아파…….”
고통 속에서 로젤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밤과 피의 여왕도, 성혈의 뱀파이어도 무엇도 아닌 나약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아프신가요?”
그 고통 앞에서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 앞에 있는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가주(家主)의 자리를 잃었든 아니든, 그 여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괴물이며 그녀의 손을 통해 이 밤의 제국을 지탱해왔는지.
그 곁에 있는 빌헬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제국을 쌓아 올린 당사자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로젤리아 샤를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째서 이토록 당돌하게 그들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지?
어른 앞에서 어른이 된 흉내를 내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모습이 우습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는 신이 흘린 피, 성배의 힘이 깃들어 있다.
성혈의 뱀파이어, 여전히 그녀가 가진 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고통과 두려움, 공포와 아픔 속에서 로젤리아가 자세를 다잡는다.
“더 큰 힘을…….”
─그리고 기도했다.
자신의 안에 깃든 신의 피, 신의 힘 앞에서.
신의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어린 양처럼, 자신을 구원해줄 힘을 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후우웅!
직후,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두 명의 죽음이 거리를 벌린다.
로젤리아의 발밑에서 휘몰아치는 혈풍(血風) 앞에 기이한 위화감을 느끼고.
“궁지에 몰린 인간은 늘 신을 찾는 법이지.”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빌헬미나가 조롱했다.
“신의 힘과 피를 손에 넣어도, 여전히 죽음이 두려운 법이니까.”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 인간조차, 또다시 필사적으로 신을 찾아 애걸하는 그 모습에 조롱할 뿐.
바로 그때, 휘몰아치는 피의 소용돌이가 어느덧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빛과 마주친다.
핏빛의 와류(渦流)가, 마치 신이 내린 것 같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고 로젤리아의 존재를 휘감았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울려 퍼지는, 귀를 찢을 것 같은 인간들의 비명.
그 속에 살과 피와 뼈가, 갈가리 찢기고 부서지는 소리가 섞였다.
* * *
촤아악!
움직임이, 멈춘다.
미망공 스칼렛의 움직임이 멈춘 바로 그때, 웃는 남자와 사냥꾼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뒤를 호위하고 있던 마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세례가 내리꽂혔다.
“─아.”
요한과 헨젤의 손에 들린 칼, 그레텔이 조종하는 칠흑의 칼날이 마치 그녀를 고슴도치처럼 꿰뚫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어머니, 로드 스칼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통에 아픈 소리를 내뱉는 일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저 조용히 말을 이을 따름이다.
“눈을 떴구나.”
그녀.
처음에는 그곳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로 직후, 저 멀리서 휘몰아친 힘의 폭풍을 느끼지 못할 그들이 아니었다.
“운명의 여신을 본 적이 있니, 아이들아.”
피의 어머니, 미망공(未亡公) 스칼렛이 말했다.
“여신이라고?”
“이제 보게 될 거란다.”
로드 스칼렛이 조소했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듯이.
“너희가 그토록 부르짖는 진정한 신(神)을.”
“…….”
“그리고 그 어떤 때도, 결코 인간을 사랑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 신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