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가족이 전부다 (1)
신은 남자다.
적어도 제국 국교회에서는 신(神)의 모습을 상상할 때, 교리로 그렇게 정하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당장 신이 자기 모습을 본떠 사람을 창조했을 때, 그것을 남자의 형상이라 일컫지 아니했나.
그러나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신’은, 절대 교회나 인간이 상상하는 알기 쉬운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신은 여자였다.
심지어 ‘로젤리아 샤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로젤리아 샤를과 무관하다는 것을,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보자마자 ‘신’이란 말 이외에 달리 형용할 방법이 없는, 압도적이고 까마득할 정도의 위압감.
“아…….”
여신(女神)이 그곳에 있었다.
신이 흘린 피, 성배. 바로 그 성배를 손에 넣은 성혈의 뱀파이어─ 로젤리아 샤를의 몸을 빌려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여신이.
“또 너희들이구나.”
바로 그녀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또 너희들이야.”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끝도 없이 운명을 거스르며 이 세상을 악(惡)으로 물들이는 썩은 뿌리이자, 별의 종양이.”
그곳에 있는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모두를 지칭하듯이.
바로 그때였다.
“너는 누구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 뜻밖의 목소리에, 라일라가 나직이 고개를 돌린다.
운명의 여신과 더불어, 그들 가문을 운명의 수렁에서 구해준 그녀의 아들이 있었다.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가족을 구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기 쉬운 기계장치의 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가족을 믿고 그들과 함께 상처를 나누고 싸우기 위해서.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지?”
로젤리아 샤를의 형상을 한 운명의 여신이, 그곳에 있는 시엔을 보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곧 너희들의 운명이다.”
“운명이라고?”
“그렇단다, 아이야.”
시엔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리고 아이야. 네가 어째서 이 순간, 나의 의지를 거스르고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알고 있느냐?”
“글쎄.”
시엔이 남의 일처럼 담담히 대답했다.
“그날, 뒷골목의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지고 숨을 거두었어야 할 네가, 왜 내 의지를 거스르고 아직도 살아 숨 쉬는지 알고 있느냐?”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네.”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과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빼앗긴 운명, 빼앗긴 행복, 애초에 빼앗긴 진짜 가족이나 ‘진짜 삶’ 같은 것은 없었다.
뒷골목의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지고 숨을 거뒀어야 할 운명.
그게 시엔의 운명이었다.
그것이 시엔이 그 남자의 손에 빼앗기고 박탈당한 운명의 정체였다.
“정말로,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구나.”
여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잇는다.
“너희는 마치 잡초와도 같다.”
잡초.
그 말에 무심코, 어린 시절 라일라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아울러 이제는 지금의 시엔이 가문의 어린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과 같단다.’
‘그리고 우리는 이 커다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들이지.’
“잡초는 아무리 뽑아도 금세 자라나지만, 그렇다고 잠깐만 내버려 두면 눈 깜짝할 새 뿌리를 내리고 밭을 뒤덮지.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말의 답을, 굳이 그녀의 입에서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제 와서 정원사 노릇이라도 할 셈이신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운명의 여신이 대답했다.
어느덧 그곳에, 더 이상 로젤리아와 그녀가 거느린 천사, 밤과 피의 군세(軍勢)는 침묵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들 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된 까닭에.
그저 끝없는 당혹 속에서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나는 실을 잣는 자다.”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동시에 실을 감는 자이자, 끊는 자이기도 하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고하듯이.
“그리고 너희 모두가, 나의 실이다.”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운명의 꼭두각시, 실에 묶여 춤추는 존재. 일찍이 시엔 나이트워커는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일컬어 운명의 가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줄에 매달려 춤추는 인형(人形)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실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손끝을 벗어나 멋대로 춤추고, 내가 원하지 않는 실을 감고 끊으며 아름다운 옷감을 어지럽히는 것이냐?”
그리고 그 실들이 주인의 뜻을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처음 실이 엉켰을 때, 나는 너그럽게 너희를 용서했다.”
실의 주인이 말했다.
“그 실이 멋대로 다른 실들을 끊기 시작했을 때조차, 나는 너그럽게 그것을 용서했다.”
“…….”
“깨닫고 보니 내가 아무리 너그럽게 너희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해도, 너희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더구나.”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그저 어느덧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엉망진창이 된 실타래가 있을 뿐.”
정말로 유감스럽다는 듯이.
“이제는 무엇이 어디부터 엉켰는지도 알 수 없는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고 수습해야 하겠느냐?”
싹둑.
직후, 무엇을 가위로 자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내린 답이기도 했다.
일대에 서 있던 모든 존재가 마치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밤과 피의 귀족, 천사, 제국의 인간들, 모두가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무너져 내렸고─.
오직 ‘그들’만이 예외였다.
“아, 역시.”
처음부터 운명을 빼앗긴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만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의 가족으로 거듭난 빌헬미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빼앗겨야 할 운명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에.
웃기는 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삶과 운명의 전부를 그 남자에게 빼앗겼던 비극이, 역으로 그들을 운명의 여신에게 지켜주는 비호(庇護)가 되다니.
“실로…… 공교로운 운명의 장난이로군요.”
누구보다 빠르게 그 의미를 헤아린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눈앞에 있는 신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무릎 꿇지 않고, 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그녀를 마주 보며.
일찍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린 여자, 라일라.
그 곁에 하나둘씩 모이는 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유감스럽지만, 운명은 장난 따위 치지 않는단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로젤리아 샤를의 형상을 둘러쓴 실의 주인.
그녀가 다시금 팔을 뻗자, 그녀의 손끝에 엮여 있는 무형의 실들이 춤추며 일대에 퍼져나갔다.
마치 나이트워커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를 펼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알기 쉬운 죽음의 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 하나하나에 거스를 수 없는 힘과 이치와 섭리의 정수가 깃든 무엇이었다.
그 상태에서 운명의 여신이 헤아릴 수 없는 실들을 조종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손으로 팔을 뻗는다.
그러자 일대의 공기가 휘몰아치며 무척이나 낯익은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이었다.
완성된 운명의 창.
그 창과 함께 일대를 휘감는 운명의 실들이, 꼭두각시처럼 쓰러진 이들을 휘감고 일으켜 세운다.
새로운 군세(軍勢)가 그곳에 있었다.
로젤리아 샤를이 이끌었던 밤과 피의 군세도, 제국이 자랑하던 천사들의 군세도, 그렇다고 밤의 아버지가 자랑했던 가족들조차 아니었다.
인형의 군세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인형과 실의 주인이, 손에 쥐고 있는 창을 가볍게 고쳐 잡는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느냐?”
그와 함께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기류가 시엔의 숨통을, 나아가 가족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마치 온 세계가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운명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임을.”
“…….”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갖고 운명의 기류를 조작하는 최강의 신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안배임을.”
심지어 그 신기를 조종하는 것은 어설픈 참칭자(僭稱者)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800년 전 그날, 밤의 아버지가 운명의 창을 손에 넣고 뒤틀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모든 것들을 바로잡고 실타래를 끊어내기 위한 때를.
지금에 이르러 그 무대는 준비되었다.
“나이트워커 가문, 운명을 벗어나 발버둥 치는 너희들의 잡초 같은 역사도 이 자리에서 끝날 것이다.”
그렇기에 운명의 실과 인형의 군세를 거느린 그녀가 말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던 것처럼.
밤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 아버지에 의해 운명을 박탈당했던 나이트워커 가문, 바로 그 강자들 모두가 바로 이 자리에 모여 있다.
여기 있는 이들의 실을 끊어내는 것으로, 그녀를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잡초는 뿌리째 뽑힐 것이다.
“잘못된 모든 것의 역사를 바로잡고, 처음부터 다시금 새로운 실을 짤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겠는데.”
그 말에 시엔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구도 우리가 쌓아 올린 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이냐?”
운명의 여신이 우습다는 듯 조롱했다.
마치 아랫것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목소리, 동시에 그녀의 실에 묶여 있는 꼭두각시들이 움직였다.
인간도 천사도 뱀파이어도 아니다.
그저 두 팔과 두 다리에 실이 걸려 춤추는 인간의 형상(人形) 그 자체였다.
‘!’
그리고 실에 매달려 춤추는 꼭두각시가 비고 나이트워커를 향해 쇄도했을 때, 그 손에 들린 검을 막기 위해 비고가 움직이려는 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마치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막으려 해도, 피하려 해도 몸이 굳어 그럴 수 없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조차 없다.
“위험하잖니.”
촤악!
그 일격 앞에서 비고를 지키듯 거미줄이 휩싸였고, 어느덧 비고의 앞을 가로막은 대부 미하일이 검을 사출했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며 상처 입는 골검이, 그의 배를 찢고 튀어나와 꼭두각시의 정수리를 꿰뚫고 있다.
“대부님!”
당황하며 비고가 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미하일이 고개를 젓는다.
“늘 네 곁에 가족이 있다는 걸 기억해라.”
“─알겠어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고, 그 전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손에 들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여전히 부상이 크다. 밤의 아버지와 싸운 그 상처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상처가 아니다.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을 상흔이 되겠지.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곳에 가족들이 있다. 시엔의 전부가 있다.
결코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보호의 대상도 무엇도 아니며, 함께 싸우고 상처 입고 나아가야 할 그들이.
그렇기에 그곳에 있는 꼭두각시들, 운명의 실로 결속된 그들을 향해 시엔이 나직이 읊조렸다.
“La famiglia è tutto(가족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