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거역할 수 없는 것 (1)
“나의 이름은 아트로포스, 「거역할 수 없는 자」다.”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너희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 너희가 저항할 수 없는 모든 것들, 태어날 때부터 너희를 정의하고 너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 너희가 거역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정하고 규정하고 재단하는 자다.”
운명의 재단사(裁斷師).
운명의 실을 짜고, 엮고, 자르는 절대적 초월자.
“시엔 나이트워커.”
바로 그 존재가, 눈앞에 있는 인간을 향해 담담히 읊조렸다.
마치 드높은 하늘 위의 신이, 직접 인간의 눈앞에 나타나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듯이.
“너는, 절대로 나를 거역할 수 없다.”
“─.”
그냥 말이 아니었다.
흡사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속삭일 때처럼, 마치 그 말 자체에 피할 수 없는 무엇이 깃든 절대적 목소리였다.
“이 자리에서, 너는 네가 사랑하는 전부를 잃고 상처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그 말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마치 쇠사슬처럼 시엔의 전신을 구속하고 속박하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 손가락 하나까지 휘감기며 까딱할 수 없게 꽁꽁 붙잡아두는 정체불명의 힘.
비유도 무엇도 아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힘 앞에서 시엔이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것들을 헤아렸다.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있다.
설령 어떤 극악무도한 악인조차 예외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탐욕스럽게 쌓아 올린 황금일 수도,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강철처럼 단단한 쇠사슬이 시엔의 육체를 묶어서 고정하려는 와중에도, 시엔이란 이름의 수레바퀴는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듯이.
낡아 해지고 스러져가는 시엔의 육체가, 의지의 가죽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는 수레처럼 힘겹게 움직였다.
후웅!
직전, 멈춰 있는 시엔을 향해 쇄도하는 운명의 창날 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을 알아라.’
그 남자, 아버지의 말이 옳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목에 스스로 밧줄을 거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다.
일찍이 고대 동방 대륙의 어떤 성자는, 그것을 일컬어 인생의 가장 커다란 고통 중 하나로 손꼽았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랑이 끝나고 헤어져 상처 입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때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끝이.
거역할 수 없는 자, 아트로포스.
아니, 설령 시엔이 운 좋게 이 순간을 극복하고 승리한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은 끝이 난다. 끝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나이트워커 가문도, 자신이 사랑하는 모두도, 언젠가는 상처 입고 헤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혼자가 아니기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렇기에 그 남자는 혼자가 되기를 바랐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까닭에, 자기 자신을 가장 아프게 상처 입히는 것이 사랑하는 타인임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까닭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엔 나이트워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를 거부했다.
그날 어머니의 손에 거두어진 시엔 역시, 이제는 어엿한 아버지가 되어 있던 까닭에.
그리고 그 아버지는, 세상의 누구보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누구도…… 나의 가족을 상처 입힐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싹둑.
어디선가 가위질을 하는 소리가 났다.
깨닫고 보니,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이 시엔의 몸을 따라 핏빛의 실이 휘감겨 있었다.
“!”
촤아악!
혈선(血線)을 따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피는, 시엔이 흘린 것이 아니었다.
시엔의 몸에 휘감겨야 할 핏빛의 실에 대신해서 휘감기기를 자처한 누군가가 있던 까닭에.
라일라가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
비록 더 이상 암살자들의 어머니는 아닐지언정, 여전히 그녀는 시엔의 어머니였던 까닭에.
“나는 괜찮단다, 시엔.”
흐르는 피와 상처 속에서 라일라가 고개를 돌린다. 여느 때처럼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짓고서.
“라일라!”
그 모습을 보자마자, 처음으로 평정을 지키고 있던 요한의 표정이 무너졌다.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내 칼자루를 고쳐 잡고 쇄도하려는 그를 제지하며, 시엔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나이트워커 공작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시엔.”
그 말에 요한이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시엔은 망설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앞에 나서서, 홀로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어머니?”
“조금 베인 상처를 가지고, 다들 너무 호들갑이구나.”
라일라가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술을 깨물 따름이다.
그것은 조금 베인 상처 따위가 아니었던 까닭에.
“누구도 너의 가족을 상처 입힐 수 없다고 했느냐?”
동시에 그 모습을 보며 운명의 여신이 조롱했다.
“봐라, 너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모습을.”
마치 절대적인 승리를 확신하는 것처럼, 자신이 승리하는 운명을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처럼 오만할 정도의 여유와 느긋함을 갖고서.
아니, 그녀에게 있어 운명이란 믿고 믿지 않고의 개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운명의 재단사니까.
이 모든 운명이 그녀의 뜻이고 그녀의 의지다.
“그리고 상상해봐라, 네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전부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마치 그곳에 있는 시엔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듯이.
“너는 절대로 이것을 거스를 수 없다.”
신 앞에 도전한 인간의 오만함을 심판하듯이.
“그리고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자를 거스르려 한 대가다.”
그 말과 함께 다시금 가위질 소리가 울려 퍼지려는 찰나.
“누구도…….”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가족을 상처 입힐 수 없단다.”
그것은 일찍이 시엔이 기억하고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의 목소리였다.
촤아악!
그 말과 함께 검고 어두운 죽음의 실이 흩날린다.
“우리는 가족이란다, 시엔.”
그리고 그 실을 조종하며 라일라가 말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말렴.”
“─.”
“우리가 너의 상처를 나누어 왔듯이, 너의 상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렴.”
암살자들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어머니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너의 가족이듯, 너 역시 우리의 가족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주렴.”
그 말에 시엔이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소중한 까닭에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누군가가 시엔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진즉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려 했던 것일까.
어느덧 미하일과 이자벨이 시엔의 곁에 선다.
그들 모두,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다.
아니,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다.
가시나무의 자세를 구사하는 그들답게, 이미 전신에서 사출한 칼날의 뼈로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지경이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흉측한 몰골. 당장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괜찮아, 시엔…….”
그들의 어머니, 앨리스와 함께.
“다들 상처가…….”
그리고 당황해서 말을 흐리는 시엔을 향해 미하일이 말했다.
“그래, 많이 다쳤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나저나 네 모습을 좀 돌아봐라.”
미하일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이 순간,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많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지.”
“─.”
“네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자신을 돌보지 않기를 바라니?”
미하일의 곁에서 이자벨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없었다.
모두가 살아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랐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상처 입지 않기를. 누구도 죽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웃을 수 있기를.
설령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屍山血海)가 깔려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죄 없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소중한 전부를 빼앗고 상처 입힌다 해도.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세상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의지 없이는,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함께 살아남아요, 대부님.”
티아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비고 오라버니도, 라힘 삼촌도, 미하일 삼촌도, 이자벨 누님도, 이곳에 있는 가족 모두…….”
그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 미래를 바라고 있었다.
“다 함께, 우리의 운명에 맞서요.”
“티아…….”
시엔이 조용히 말을 흐렸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 이상, 시엔을 위하는 모두(올 포 원)는 없다.
오직 전부를 위하는 하나(원 포 올)이 있을 뿐.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도, 나이트워커 공작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끔찍한 미래를 알고 저지하기 위해 홀로 발버둥 치는 누군가도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 가족 중의 하나임을.
의지에는 선악(善惡)이 없다.
의지를 규정 짓는 것은 오로지 강함과 나약함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끝없는 인간의 찬가가 울려 퍼졌다.
질 거라는 걸 알아도,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적과 대적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리 무모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그저 마지막까지 의지를 관철하는 것.
“당신의 상처를, 제가 짊어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바로 그곳에서 티아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우리의 상처를 홀로 짊어지셨듯이.”
“─.”
그 말에 시엔이 웃었다.
웃고 나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이것이 가족이구나, 하는 커다란 만족과 행복감을 느꼈다.
시엔은 혼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그 어느 순간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나아갔던 적이 없는 까닭에.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함께 상처받기를 주저하지 않는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