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88화 (188/200)

188화. 거역할 수 없는 것 (2)

운ː명 (運命)

【명사】

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명운(命運). 숙명(宿命).

┈┈• 피할 수 없는 ∼

*  *  *

누구도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구도 운명을 극복할 수 없다.

운명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기에.

그리고 그 운명에 맞서─ 밤을 걷는 자들이 검을 고쳐 잡았다.

서로에게 공명하는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를 덧씌운 채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상처를 짊어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런 싸움이었다.

신(神)의 앞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재치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장의 수 따위는 없었다.

숨겨둔 무엇도, 이때를 위해 뼈를 깎으며 벼린 무엇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을 다할 따름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육체를 채찍질하며, 지쳐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절대 쓰러지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맞서 싸웠다.

필사적으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추하게 발버둥 치며 승리하고 위해 싸웠다.

운명의 여신과 그녀가 이끄는 운명의 실로 엮여 있는 꼭두각시들, 신의 군세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들이 평소 내세우는 어떤 진실도 그녀의 앞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운명 앞에서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 무모하고 일말의 승산도 보이지 않는 불가능의 싸움.

운명에 맞서는 것, 신에게 맞선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의미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길 수 없어 보여도, 아무리 불가능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모두가 함께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짊어지며.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운명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는 왕 시해자를 휘둘렀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다잡고, 격돌 끝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때마다 끝없이 시엔의 몸에 상처가 새겨졌고, 함께 상처를 나누는 가족들의 몸에도 똑같은 상처가 새겨졌다.

어깻죽지가 잘리고, 복부에 구멍이 뚫리고, 내장이 터질 것처럼 짓이겨지고, 전신의 뼈가 갈가리 부서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팠다.

그 누구도 이 모든 상처를 홀로 짊어지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꺼이 그 상처를 함께 나누었다.

이 아픔을, 자신 이외의 가족이 느끼며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은 까닭에.

함께 공명하는 인간찬가의 의지를 결속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고, 검을 쥐고 싸웠다.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그것은 그들 가문이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軌跡) 그 자체였다.

가족이 오래오래 행복해지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가족이 오래오래 행복해지기 위해 전쟁을 조장하고, 양측에 무기를 팔고, 공포와 경외로 군림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가족 모두가, 서로가 흘릴 피를 앞다투어 짊어지고 대속하기를 자처했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자 그들의 삶이었다.

카앙!

“의지로 운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시엔의 칼날이 ‘여신의 창’과 맞부딪치며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의지라고 믿는 모든 것들이, 애초에 정말로 너희들의 의지이기는 하더냐?”

운명의 여신이 조롱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정말로 네 마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더냐?”

그러나 그녀가 내뿜는 신의 힘, 운명의 기류 앞에서 시엔의 검(劍)은 결코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운명을 이기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결속되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시엔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너희가 나아가는 삶의 궤적이, 정말로 오롯이 너희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나의 삶은…….”

그 말 앞에서 시엔이 차갑게 말했다.

“그 어떤 때에도 나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그럼 누구의 것이지?”

“가족들의 것.”

시엔이 말했다.

그것이 시엔의 삶이었다. 동시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삶이기도 했다.

“설령 이 의지와 바람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결의를 담아.

“나는 그 어떤 진실보다도 이 거짓을 사랑할 테니까.”

설령 이 마음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마음이라고 해도.

여전히 시엔 나이트워커는 이 마음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조작하고 거짓된 의지를 심어준 존재 앞에서 기꺼이 감사를 표할 것이다.

“이 거짓 덕분에, 나는 가족들과 만날 수 있게 됐거든.”

그들의 거짓은, 그 어떤 진실보다 훨씬 더 붉은 피를 흘리고 있던 까닭에.

“어째서 그토록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운명의 여신이 되물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

푸욱!

바로 그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날이 살을 찢고 깊숙이 파고드는 소리였다.

흑조 티아 나이트워커의 칼날이, 여신의 몸을 뒤에서 꿰뚫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 우리는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

비고와 미하일의 손에서 펼쳐진 구속의 거미줄이, 여신의 전신을 휘감고 옭아매고 있었다.

“의지로 운명을 이길 수 있냐고 물었지?”

“시엔 혼자의 의지가 아니야.”

“우리 가족 모두의 의지지.”

어느덧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남매의 검이 휘둘러졌다.

밤을 걷는 자들의 의지.

존재하지 않는 운명과 가능성, 무(無)의 확률을 뚫고 어느덧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그녀의 몸에 칼날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곳에서 펼쳐진 오러의 결속과 공명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여신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하게 결속된 의지는, 그녀가 존재하고 나서 처음 봤던 까닭에.

어떤 고결하고 올곧은 신념을 가진 의지도 아니고, 악(惡)에 맞서 정의를 관철하려는 의지도 아니며,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황혼의 의지도 아니다.

이 대륙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군상들이 펼친 온갖 의지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그녀가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결속이었다.

동시에 그 결속에는, 그 어떤 정의도 고결함도 선량도 긍지도 이상도 없었다.

추할 정도로 자신밖에 모르는 사악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의지였다.

오직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안위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행위도 기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구역질이 나는 악.

그들은 악의 화신(化身)이었다.

이내 깨닫는다.

의지가 운명을 이긴 것이 아니다.

악이, 운명을 이긴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한 세계다.

한 명의 인간이 모여, 수많은 인간이 살아가는 곳.

“아, 이래서 인간들이란.”

처음 그녀가 운명의 실을 짜고 엮고 끊으며 세상의 운명을 재단(裁斷)했을 때.

이 세상을 엮는 아름다운 실과 옷감을 떠올렸다.

그리고 운명의 재단사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상은, 악의 손에 짓밟히고 흙탕물에 젖은 발로 짓밟혀져 더럽혀질 것이다.

바로 그곳에 피어난 악의 꽃에 의해.

“신으로서…….”

피와 상처투성이가 되어 힘없이 무릎 꿇고, 운명의 여신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희 악인(惡人)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겠노라.”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위태로운 촛불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흔들리는 목소리로.

“너희에게 내릴 형벌은…….”

바로 그때였다.

촤악!

그렇기에 그 순간, 암살자들의 아버지는 더더욱 망설이지 않았다.

촤아악!

그저 그녀의 몸에 꽂아 넣은 칼날을 뽑고,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잡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그을 따름이다.

로젤리아 샤를의 형상,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따라 칼날이 내리꽂히고 그어지며 피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잘린 목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너무나도 덧없고 허무하게.

“……자유다.”

그리고 잘린 목이, 나지막이 그들에게 내릴 최후의 형벌을 속삭였다.

자유.

일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녀의 육체와 그녀가 부리고 있던 운명의 실, 거기에 묶여 있던 꼭두각시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흡사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  *  *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  *  *

대륙 전체를 아울렀던 커다란 전쟁이 끝나고, 여전히 대륙 전체에 치유될 수 없는 상흔을 남겼던 전란(戰亂)의 여파 속에서 세상이 신음하고 있을 때.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일실.

공화국 함대의 대원수이자 ‘대륙 전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맹활약을 떨친 명장이 그곳에 있었다.

그날 그녀가 했던 약속처럼, 이제는 문자 그대로 「바다의 여왕」이란 이명을 얻은 시엔의 아내가.

“일어났구나, 시엔.”

마린 나이트워커.

시엔이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 그녀는 여느 사이좋은 부부처럼 시엔의 곁에 함께 누운 채였다.

“응.”

얼핏 평범해 보이는 동시에,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보통의 풍경.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을 구속하고 있던 운명의 굴레, 운명의 쇠사슬은 사라졌다.

더 이상 그들 가문을 속박하는 규칙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저택에 이끌리는 밤의 아이들은 없다.

그저 이곳에 있는 이들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부였고, 그 이상의 ‘새로운 전부’가 늘어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방식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은 무고하고 죄 없는 희생자들이 피를 흘리고, 상처 입고, 그들이 쌓아 올린 시체와 유해 위에서 자신들의 제국을 꾸려나갔다.

*  *  *

며칠 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 내 광장.

솟구치는 분수 줄기 너머, 흑색의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장엄한 기마(騎馬)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후원을 받은 어느 명망 높은 조각 거장의 작품이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결하고 용맹 넘치는 기사와 말이 아니었다.

훗날 이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을 때, 재앙을 이끌고 나타날 거라 불리는 묵시록의 4기사 중 하나.

죽음의 청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Pale Rider).

바로 그 기마상을 따라 시엔과 라일라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세상에 끝없는 전란을 가져오고 끝없는 정복과 승리를 손에 넣는 묵시록의 기수(騎手)로서.

“참으로 평화롭구나.”

동시에 라일라가 말했다.

여전히 세상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각지에서 끝없는 약탈과 파괴와 살육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남의 일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요.”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평화를 가로막을 수 없는 까닭에.

그렇기에 신의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이 내려진 그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이 세상의 승리자로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의 제국을 세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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