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89화 (외전) (189/200)

189화. 거역할 수 없는 것 (3)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던 운명의 여신이 사라지고 나서,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었을 때.

그들 가문의 인간들은 새로운 운명의 재단사(裁斷師)가 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의 누구도 그들을 거역할 수 없게 된 까닭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신에게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새로운 ‘거역할 수 없는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  *  *

신성 제국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州)의 슈파이어 대성당.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미사 속에서, 홀로 예배당의 끝자락에 베일을 쓰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여성이 있었다.

제국 국교회의 추기경, 빌헬미나 아퀴나스.

그러나 그녀의 뒷모습에, 더 이상 죽음의 성모로서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며 세상을 호령하던 카리스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쌓아 올린 신의 제국은 몰락했고, 그 후로 제국은 수십 개의 영방(領邦)으로 쪼개지며 기회를 틈탄 제후들의 권력 다툼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그들은 늘 힘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빌렸다.

전쟁에는 늘 돈이 드는 까닭에.

그것도 아주 막대한 돈이.

무일푼의 농노들을 무장시킬 병장기(兵仗器)가 필요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여야 한다. 용병이라도 고용한다면 그들을 데리고 있는 일분일초가 곧 지출이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다면 빌려서라도 마련해야 한다. 패배하면 돈 몇 푼이 아니라 모든 걸 잃어버릴 테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전쟁으로 이득을 본다. 아니,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없는 전쟁조차 만들어낸다.

여전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라일라 언니.”

그리고 일찍이 그들 가문의 가장 강력한 숙적 중 하나였던 빌헬미나는, 더 이상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오랜만이구나, 빌헬미나.”

말없이 예배당 곁에 걸터앉으며, 마찬가지로 검은 베일을 쓴 여성이 미소 짓는다.

“보고 싶었어.”

“달리 할 말이 있지 않니?”

일찍이 성모의 언니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였고, 이제는 아버지의 어머니로 남아 있는 그녀가.

“라인란트팔츠주의 영주 몇 명이, 새롭게 제후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무장을 시작했어.”

그곳에 있는 동생의 ‘속삭임’을 들으며, 즐거운 듯이 미소 짓는다.

“영주 전원이 기꺼이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에 병장기를 거래할 의사를 타진했지.”

“잘해주었단다.”

어느덧 그녀가 넘겨준 비밀스러운 문서를 품에 넣고, 라일라가 대답했다.

그날,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그들 가문의 적이자 쌍두까마귀의 가족, 빌헬미나를 용서했다.

알기 쉬운 자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커다란 가치가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라일라가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은 진실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진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므로.

*  *  *

그날의 싸움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동시에 이 대륙을 피바다로 물들이고도 남을 정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죽었다.

일찍이 밤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 ‘운명’을 빼앗았듯이.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세상,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운명, 삶과 행복을 모조리 박탈하고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가축으로 삼는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전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비극, 그럼에도 그들은 일어나게 했다.

그저 그들이 그것을 바란 까닭에.

사랑하는 가족의 몸에 생채기 하나가 새겨지는 것보다, 알지도 못하는 무고하고 죄 없는 희생자들 수백만 명, 어쩌면 그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을 택했다.

그게 바로 그들이 다치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었던 유일의 이유였다.

*  *  *

저녁노을 아래서 굽이치는 파도가, 진홍색 물감을 마구 풀어놓은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그녀가 있었다.

인간처럼 새하얬던 두 다리가, 은빛의 비늘에 덮여 찬란하게 빛나는 꼬리와 지느러미가 되어서.

그녀는 시엔의 손을 잡고 바다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암초까지 이끌었고, 그곳에 몸을 걸치고 나란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느덧 밤의 어둠이 하늘을 구석구석까지 칠하고 있었다.

달은 보이지 않고, 이따금 별들이 창백하고 스산하게 빛을 뿜어내는 검고 어두운 밤이었다.

“인간이 싫었어.”

바로 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린이 그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간이 되는 게 죽기보다 싫었고, 하물며 인간의 아이를 갖는다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지.”

마치 철없고 우스운 과거를 돌이켜보는 목소리였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마린 나이트워커는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아이를 가지는 순간, 머메이드는 인간이 된다.

“네가 살아갈 곳은 바다 위니까.”

시엔의 말에 마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살아가야 할 곳 따위는 없어.”

미소 짓고 나서 대답했다.

“살고 싶은 곳이 있을 뿐이지.”

그리고 마린 나이트워커 역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그렇기에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마린이 수줍게 말을 잇는다.

*  *  *

“돈 나이트워커.”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을 뵙습니다!”

이 나라와 대륙의 헤아릴 수 없는 유력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공화국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수십 개의 영방으로 쪼개진 제국과 왕국의 온갖 제후들, 그 외에도 약동하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떠오르는 세력들,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자’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손등에 입을 맞춘다.

여전히 이 세계에서 공화국의 영토는 좁쌀처럼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트워커 가문은 대륙 전쟁의 여파 속에서 기울어진 제국과 왕국의 영토, 그 무엇도 넘보지 않았다.

그 대신, 이 대륙의 모든 국가를 갈가리 난도질하고 좁쌀처럼 작은 소국으로 찢어놓았다.

하나의 강대했던 제국은 헤아릴 수 없는 영방 국가들이 난무하는 군소 국가로 거듭났고, 샤를마뉴 왕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은 세상의 운명을 재단(裁斷)하고 있었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다이닝 룸.

시종들이 은으로 된 촛대에 촛불을 밝혔고, 정찬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가 포도주와 함께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시엔 나이트워커,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곁을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이곳까지 걸음을 해주신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그 자리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일제히 멎고, 흡사 무덤가를 거니는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지요.”

핏빛의 포도주가 담겨 있는 유리잔을 쥐고, 시엔이 말을 잇는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이 쓰러지고,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라니.”

시엔이 우스꽝스러운 농담처럼 말했고, 그러나 그 말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이닝 룸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한 인파가 들어차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함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설령 그곳이 공화국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자리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마치 남자가 죽음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벌벌 떨며 겁내고 있었다.

어떤 용감한 기사나 오만한 귀족도 예외가 아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용납되지 않는 적막이 깃털처럼 내려앉을 뿐.

“우리 가문과 이 나라 역시, 언젠가는 쇠하고 노쇠하며 멸망해 스러질 겁니다.”

침묵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재차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때가 왔을 때,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는 노쇠해진 우리 가문과 가족들의 등에 칼을 꽂으려 들 테지요.”

몇몇 제후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아닙니다.”

웃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내일도 아니고, 모레도 아니지요.”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고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리고 그 기약도 없는 ‘언젠가’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의 등에 칼을 꽂으려는 자는…….”

그 말과 함께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침묵 속에서 몇몇 손님들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내며, 그림자 기사들이 그들의 목을 따라 내리그었다.

촤악!

목이 잘리고 피가 튀었다. 비명조차 울려 퍼지지 않았다.

“정말로 운명의 여신이 자신과 함께하는지, 신중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겁니다.”

그저 시엔의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 퍼질 따름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동요하거나 패닉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찔리는 구석이 없는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은 결코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죽을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저 멍청이들이 죽는 이유는 딱 하나, 죽을 짓을 했기 때문이다.

죽을 짓을 하는 자가 죽고, 죽을 짓을 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기준을 결정하는 것, 그 기준을 재단하는 것은 오직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다.

*  *  *

“빨리 촛불 켜!”

“티아, 티아는 어디 있어?!”

“호들갑 좀 떨지 마, 이 바보 그레텔!”

그날 새벽.

대낮에 벌어진 참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이 깊은 와중 어수선하게 들떠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테이블을 따라 나란히 앉아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 그들이 함께 모여 탁자 중앙의 커다란 케이크에 가느다란 양초를 하나씩 꽂아 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초대받을 리 없는 뜻밖의 손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린.”

시엔의 부름에 마린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팔을 뻗었다. 수줍게 시엔의 손을 맞잡고,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케이크 앞에 앉는다.

“시엔, 마린.”

“어머니.”

“어머님.”

라일라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슬쩍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특히 마린의 모습은 더더욱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렴, 마린.”

젓고 나서 라일라가 말했다.

“우리는 가족이잖니.”

“…….”

그 말에 마린 나이트워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시엔과 손을 맞잡을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내린 결정이자 자유였다.

“고마워요, 모두.”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가족이 되고 싶니?’

그날, 빛도 희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내밀어준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을 떠올리며.

그리고 이 순간, 곁에서 함께 맞잡고 있는 마린의 온기를 또렷이 느끼며.

시엔이 말했다.

“가족이 되어줘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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