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94화 (194/200)

외전 5화. 자유

그것은 실패했던 과거의 기억이었다.

불패의 기사, 검성 오스카마저 쓰러뜨렸다.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의 강자들이 시엔의 손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 남자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시엔의 검이 닿지 못했던 상대. 시엔의 검보다 더 날카로운 악의와 살의로 가득 찬 상대.

최초의 밤을 걷는 자, 카산 나이트워커.

“네 모습을 봐라, 시엔 나이트워커.”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에게 패배하고 나서 무릎을 꿇었을 때.

더 이상 시엔을 위해 희생해줄 가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시엔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나 출혈,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저 앞서 떠나버린 가족 앞에서 얼굴을 들 낯이 없었다.

살아, 시엔.

그 약속은 끝끝내 지켜지지 못할 것이다. 시엔은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증오스러운 적들의 손에 산 채로 사로잡혀, 죽는 것보다 끔찍한 고통을 겪고 죽음을 애걸하며 결국에는 죽음이 자비처럼 느껴질 정도의 꼴을 맞이하겠지.

그것이 시엔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였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심지어 죽음을 애걸할 정도의 고통조차 두렵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해 희생하며 쓰러진 가족들 앞에서, 고개를 들 낯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엔이 입술을 악물었다. 이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다시금 손에 들린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아니,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엔이 자신의 의지를 쥐어짜며 채찍질을 했다.

상처 입을 대로 입어 피투성이가 된 육체가,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움직이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촤아악!

“!”

칼끝이 닿았다.

남자의 뺨 위를 찢고 생채기를 그었고, 일적(一滴)의 핏방울이 흘러내린다. 그게 다였다.

여전히 시엔의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의 빛에 휩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 세상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까닭에.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부딪쳐도, 결국 부서지고 부러지는 것이 세상의 냉혹함이니까.

“……닿을 수 있었는데.”

닿지 못했다. 아니, 닿기는 닿았다. 그저 충분히 깊게 닿지 못했을 뿐.

남자의 뺨 위에 그어진 상처를 뒤로하고, 시엔이 헛웃음을 흘렸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닿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촤악!

그와 동시에 휘둘러진 검이, 칼을 쥐고 있는 시엔의 손가락을 잘랐다. 칼과 함께 잘린 손가락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까지 벼리고 벼린 최후의 의지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더 이상 시엔을 지탱해줄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낡은 수레를 이끌어줄 가죽끈도, 저주처럼 시엔을 옥죄는 가족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깨달았을 때 시엔은 홀로 남겨져 있었다.

남자의 손에 패배하고, 산 채로 제국에 사로잡혀 일찍이 시엔의 가족들이 당했던 고통을 겪으면서, 끝없는 절망과 공허와 허무가 시엔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시엔이 사랑했던 것은 오직 가족들이 사랑했던 자신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을 사랑해줄 가족은 없다.

그렇기에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산 채로 두 눈이 뽑히고 전신의 힘줄을 끊고 뼈가 마디마디 부러져 으깨져도, 비명 하나 내지 않고 침묵했다.

“괴물 같은 놈…….”

자신의 고통 따위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의 고문 기술자들은 더 이상 시엔에게 주는 고통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일류였다.

인간에게 주는 육체의 고통이 얼마나 하찮은지, 진정으로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이상 시엔에게 ‘파괴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고통 앞에서 초연하게 달관하고 있는 자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남자, 시엔 나이트워커는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갈가리 찢어지고 상처 입어도 무엇 하나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다.

이미 그는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많은 고통을 겪었고, 더 이상 그에게 줄 고통 따위는 없음을.

그렇기에 제국의 고문 기술자들은 더 이상 시엔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었다.

*  *  *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짙은 어둠, 더 이상 시엔의 눈동자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세상에 시엔이 볼 것, 보고 싶은 것 따위는 없었다.

아무것도 볼 필요가 없으니, 눈동자가 없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전신의 신경이 갈가리 찢어지고 뼈마디가 분쇄되어도 개의치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스쳐야 할 살갗도, 느껴야 할 온기도 없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이다.

가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들의 희생, 그들의 마지막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기도에 보답하기 위해,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이를 악물고 살아남았다.

여기가 그 종착점이다.

부서지고 부러져 실패해버린 시엔을,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황금으로 빛나는 옥좌 위에 앉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검성 그란델 대공 및 7인의 제국기사단장들.”

“…….”

“대현자 바르무어 후작과 5인의 제국 마탑주.”

“…….”

“아퀴나스 추기경을 비롯한 최고위 이단심문관 12인, 신성군단장 8인.”

그것은 신성 제국이란 나라는 물론이고,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강자와 영웅들의 명단이었다.

“그들에 대한 암살 혐의를 인정하나?”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

침묵 끝에 시엔이 대답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전부 내가 죽였다.”

*  *  *

“네 모습을 봐라, 카산 나이트워커.”

전신을 덧씌운 수백 자루의 칼날 위로,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를 덧씌운 ‘칼날의 육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차갑게 조롱했다.

그 시절, 그 남자의 손에 쓰러졌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남자의 손에 사랑하는 전부를 빼앗기고, 결국에 자신마저 무릎 꿇고 패배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시엔이 패배했던 상대. 시엔을 무릎 꿇리고 절망을 깨닫게 해준 상대.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의 시엔에게는 잃을 게 없었다. 전부를 잃었으니까. 자신을 사랑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이상,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 어머니, 형님, 누님,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이 시엔의 ‘잃을 것’이었다.

그리고 잃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신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엔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다.

살고 싶었다.

살아서 지키고 싶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시엔 나이트워커는 진정으로 별과 단검의 주인이 되었다.

별이 점지해준 운명 따위는 없다.

오직 별을 향해 나아갈 뿐.

*  *  *

“나의 이름은 아트로포스, 「거역할 수 없는 자」다.”

운명의 여신이 말했다.

“너희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 너희가 저항할 수 없는 모든 것들, 태어날 때부터 너희를 정의하고 너희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 너희가 거역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정하고 규정하고 재단하는 자다.”

그녀는 운명을 점지하는 자였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들의 운명을 별의 이름으로 점지하고 나아가게 하는 존재.

그 앞에서 시엔 나이트워커는 비로소 그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를 이해했다.

자신의 의지로 별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  *  *

“신으로서…….”

피와 상처투성이가 되어 힘없이 무릎 꿇고, 운명의 여신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희 악인(惡人)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겠노라.”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위태로운 촛불이 되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흔들리는 목소리로.

“너희에게 내릴 형벌은…….”

바로 그때였다.

촤악!

그렇기에 그 순간, 암살자들의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았다.

촤아악!

그저 그녀의 몸에 꽂아 넣은 칼날을 뽑고,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잡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그을 따름이다.

로젤리아 샤를의 형상,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따라 칼날이 내리꽂히고 그어지며 피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잘린 목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너무나도 덧없고 허무하게.

“……자유다.”

그리고 잘린 목이, 나지막이 그들에게 내릴 최후의 형벌을 속삭였다.

*  *  *

더 이상 어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어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도 희생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하고 재단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으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제법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헤아릴 수 없이 쌓여가는 세월의 층첩(層疊) 속에서, 처음으로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시엔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을 향해 내린 최후의 형벌.

육체가…… 늙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육체라 해도, 이 육체는 결코 불멸(不滅)이 아니다.

일찍이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가 그랬듯, 그들 역시 나이를 먹고 늙고 노쇠해진다.

비록 지금까지 가문의 인간 중 침대 위에서 천수를 누리며 죽은 이가 없었을 뿐.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의 천수(天壽)를 방해할 자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들의 육체에 마땅히 내려야 할 시간의 세례가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뱀파이어 같은 알기 쉬운 불사(不死)의 형태가 아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불사의 역설’은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간.

누구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었다.

어떤 운명도, 시간의 세례도, 그 무엇도 그들을 이치로 속박하고 구속할 수 없었다.

“너는 여전히 빛나는구나, 시엔.”

그리고 어째서 그것을 ‘형벌’이라 일컬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린.”

시엔의 가족, 마린 나이트워커가 시간의 세례 속에서 점차 젊음과 아름다움을 잃고 늙어갈 때마다, 시엔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에 가득 찼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문득, 밤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을 알아라.

마린 역시 시엔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아울러 시엔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것은 시엔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전부가 천천히 늙어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

*  *  *

어느 시점부터, 나이트워커 가문의 존재는 역사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누구도 그들의 결말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의 끝이 다가오는 그날까지, 그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을 받을 운명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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