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95화 (195/200)

외전 6화. 세상의 악

이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엔이 생각했다.

생각하고 나서는, 이내 쓴웃음을 짓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

*  *  *

저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저녁노을을 등지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마린이 서 있었다.

차박, 차박.

발바닥에서 발목까지, 발목에서 무릎 위까지. 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두 다리를 출렁이는 바닷물이 조금씩 깊게 휘감는다.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마린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더 이상 예전 같은 젊고 아름다운 미성(美聲)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왜 인간이 되는 걸 그렇게 죽기보다 싫어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네.”

“그렇구나.”

마린의 말에 시엔이 웃었다.

“시엔, 너는 계속해서 살아가겠지.”

마린이 말했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너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마린이 등을 돌린다. 수정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가볍게 흐트러지며 춤을 춘다.

“그러니 너도 아름다운 내 모습을 기억해주길 바라.”

“기억할 거야.”

시엔이 말했다.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네 모습을.”

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줍은 듯 웃고 나서는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어느덧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바다 위로 은빛의 광채를 흩뿌린다.

어느덧 서녘 하늘 너머로 스러지는 저녁노을은 빛을 잃고, 창백하고 시린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무척이나 검고 어둡고, 절대 끝나지 않을 밤이었다.

*  *  *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자동차의 경적에, 시엔이 조용히 눈을 떴다.

시엔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어 같은 것은 전설이나 동화 속의 존재로 치부될 정도로 계몽(啓蒙)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시엔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밤바다 위에서 흩뿌리는 비늘의 이채, 바닷속을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자유로운 모습, 그날의 약속처럼 세상의 끝이 다가오는 그날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돈 시엔.”

남자는 그곳에 앉아 있는 시엔을 보고, 온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를 마주하는 것 같은 경외감에 몸을 떨었다.

“예상대로 대통령께서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재상정을 거쳐 법률이 무사히 의회를 통과할 전망입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웃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유라진 속에서 넘실거리는 핏빛 포도주를 홀짝이며.

“사업은 예정대로 차질이 없도록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재차 고개를 숙이고, 시엔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짧은 대화 끝에 남자가 물러났다. 그리고 남겨진 시엔 역시, 등 뒤에서 햇빛이 스미는 창밖을 내다보다 이내 몸을 일으켰다.

*  *  *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금 냄새가 스며들어 있는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증기선의 기적(汽笛)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머지않아 갑판에서 하나둘씩 손님들이 항구를 향해 내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검고 어두운 드레스 위로, 칠흑의 챙 모자를 쓴 숙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보게 되어 기쁘단다, 시엔.”

“오랜만이에요, 어머니.”

그리고 기품 있는 숙녀의 앞에서, 정장 차림의 남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여기가 바로 꿈의 대륙이구나.”

검정 일색의 숙녀, 라일라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시엔 역시 웃었다.

“다들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죠.”

웃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낯설고 적응이 되질 않아.”

“뭐가 말이죠?”

“전화, 무선통신, 철도와 자가용, 여객선, 비행기…… 세상 모든 것들이 말이야.”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철이 바다 위를 가르고, 땅 위를 질주하고,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세상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됐으니까요.”

“모두가 아름다운 미래를 의심치 않고, 인간의 찬가(讚歌)를 멈추지 않지.”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우리가 태어났던 세상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죠.”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다들 잘 지내고 있단다.”

시엔의 물음에 라일라가 대답했다.

“오히려 가족들 모두, 누구보다 네가 이 땅에서 홀로 잘 지내는지를 걱정하고 있지.”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늘 어려운 일을 맡아주는 네게 염치가 없구나.”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시엔이 말했다.

어떤 세상이 되어도, 가족 모두가 무사할 수 있는 미래를 대비하는 것.

여전히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수장으로서 주어진 의무였다.

“이곳 신대륙은 1세기 이내에 세상의 새로운 중심이 될 거예요.”

“확실히, 좀처럼 찾기 힘든 활기가 느껴져.”

그 말에 라일라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그곳에 세워진 헤아릴 수 없는 마천루들, 마치 신을 향해 도전하는 것 같은 인간의 끝없는 의지 앞에서 전율하며.

“세상이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을 믿니?”

라일라가 물었다.

“아뇨.”

그 말에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세상은 여전히 끔찍했고, 앞으로도 더 끔찍해질 거란 걸 믿죠.”

젓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머지않아 이 나라에 새로운 법이 통과될 거예요.”

“법이라, 무슨 법이니?”

“금주법(禁酒法).”

시엔이 대답했다.

“이 나라의 사법권이 미치는 모든 영토 내에서 주류의 제조, 판매, 운송, 수입, 수출이 금지되죠.”

“술을 법으로 금지하다니, 참 멋진 세상이 되겠는걸.”

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기회를 통해 쌓은 밑천으로, 우리는 이 나라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거예요.”

“멋진 계획이구나.”

“이제 시작이죠.”

*  *  *

모두가 술을 마시지 않는,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세상 같은 것은 없었다.

금주법은 신대륙의 가장 어리석은 법이 되었고, 당시의 밀주(密酒) 사업을 통해 시엔은 신대륙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거기에 결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이름이나 별과 단검의 상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 나이트워커 가문은 더 이상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까닭에.

그러나 그들은 늘 그곳에 있었다.

역사의 무대,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거기에는 늘 그들의 그림자가 있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전체가 휘말리는 커다란 전쟁이 시작될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La Der des Ders)」.

암살을 통해 시작된 이 전쟁은 대륙 전체를 다시금 전화(戰火) 속에 몰아넣었고, 그 전쟁은 어느 때보다 충격적이었다.

야포와 기관총, 참호의 등장은 그 어느 때보다 전장을 끔찍하고 지옥 같은 곳으로 바꾸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조차 감히 그 전장에서 활약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 헤아릴 수 없이 무고하고 죄 없는 젊은이들이 조국과 명예의 이름으로 죽어 나갈 때, 그들은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 되었구나.”

바로 그 자리, 그림자 속에서 이 세상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고 의논하는 그 자리에서.

*  *  *

어떤 음모론이 있다.

금주법 당시 밀주 산업을 통해 막대하게 쌓아 올린 부를 기점으로, 이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군수 산업 등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재화를 쌓아 올린 어떤 ‘결사’의 이야기다.

「패밀리(Family)」라 불리는 그들은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전쟁을 기획하고 관리하며, 그를 통해 벌어지는 이익을 통해 세상의 패권을 조율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죠?”

이메일로 바로 그 ‘패밀리’의 음모론 제보를 받았을 때, 요크포스트의 신입 기자 낸시 리는 메일을 보여주며 허황하다고 웃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티아 선배?”

그곳에 앉아 있는 그녀의 선임 기자를 향해서.

“글쎄.”

그 말에 티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보는 게 좋지 않겠니?”

“네?”

티아의 말에 낸시가 황당하다며 눈을 끔벅거린다.

“아무리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도, 그게 꼭 진실이 아닐 거란 보장은 없거든.”

“그래도…….”

재고할 가치도 없는 정신병자의 횡설수설이다.

그러나 아무리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라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는 티아의 모습을 보고, 낸시 역시 깨달았다.

“함께 조사해보자꾸나.”

저게 바로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의 모습임을.

“네, 티아 선배님!”

*  *  *

이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장 고귀한 베네토 공화국」이란 이름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을 때.

황제와 왕과 귀족, 제국이란 말이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옛말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쥐새끼’를 통해 속삭일 필요도 없이, 대륙의 끝에서 끝을 향해 속삭이는 게 1초도 걸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을 때.

그 시절, 세상을 전율케 했던 결전 마법 아바돈(阿鼻沌)의 위력조차 어린아이처럼 느껴질 파괴와 소멸이 대수롭지도 않게 되었을 때.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뀌고 또 바뀔 세상 속에서, 무심코 시엔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

몸을 떨고 나서 시엔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손에는 낡은 판본(板本)의 동화책이 들려 있었다.

『인어공주』.

여전히 시엔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허황하기 그지없는 전설이라 치부하는 그녀의 존재가, 희고 부드러운 살갗이, 시엔의 손끝에 닿고 느껴졌던 그 순간을.

*  *  *

겨울 공기가 시린 어느 날 밤이었다.

“어서 와, 시엔!”

새벽 밤이 깊었으나, 저택 전체는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에 휘감겨 있었다.

모처럼 가족 전부가 모여 파티를 열기로 했던 까닭에.

“시엔이 꼴찌야!”

“오랜만이에요, 그레텔 이모.”

가장 처음, 헨젤과 그레텔이 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시엔을 마주했고, 저마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 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고 형도 오랜만이야.”

“시엔.”

비고는 인류학을 가르치는 대학의 교수였다.

“티아.”

“오라버니.”

수정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의 여성, 티아가 미소 지었다.

미하일도, 이자벨도, 린도, 요한도, 루나도, 가족 모두 그곳에 있었다.

바뀌는 세상 속에서 적응하며 저마다의 삶을 사는 가족들.

세상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그 어떤 미래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존재들.

“어서 오렴, 시엔.”

그들을 향해 시엔 역시 머플러를 풀고 시린 입김을 내뱉으며, 그곳에 있는 가족의 온기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다녀왔어요, 어머니.”

그곳에 있는 자신의 전부, 사랑하는 가족들을 향해서.

*  *  *

인어공주는 보이지 않게…… (중략) 왕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구름 위 공기의 딸들에게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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