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96화 (196/200)

외전 7화. 세상의 악 (2)

루나는 비고와 더불어 대학에서 구대륙 사학(史學)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가장 고귀한 베네토 공화국」이란 이름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 지금, 교단 위에서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당대의 베네토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과두정 형태의 공화주의’를 지향했고, 실제로 당대 국가 중에서는 가장 공화적 형태에 가까운 체제를 이루었지.”

강의실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루나가 말을 잇는다.

여느 때처럼 지혜로운 목소리로.

“그러나 베네토 공화국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지.”

“나이트워커 가문이요.”

그곳에 있는 어린 신입생들조차 모를 리 없는 이름. 동시에 어느 순간 역사의 그림자 너머로 사라져서 자취를 감춘,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가문.

“그들의 가언(家言)을 말해보겠느냐?”

학생을 향해 루나가 물었고, 이내 대답이 들려왔다.

“가족이 전부다(La famiglia è tutto).”

“그래.”

그 대답에 루나는 흡족하게 웃고 나서,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들의 전부였지.”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  *

1920년, 요크(York).

파지직!

손끝을 따라 일렁이는 뇌전(雷電)의 전류.

시엔의 몸을 타고 흐르는 청색 마력은, 그러나 이내 형체를 잃고 입자가 되어 덧없이 흩어졌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시엔이 살던 시대의 마법은 의미가 없다. 오러 역시 마찬가지다.

그 시절 인간의 찬가(讚歌)를 상징했던 불굴의 의지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시대가 된 순간 의미를 잃었다.

인간의 찬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었던 까닭에.

그렇기에 시엔은 마력 대신 품에서 무엇을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되었지요.”

바로 그 총구를 겨누며 시엔이 말했다.

그 어떤 용기 있는 전사도, 인간 찬가의 의지로 넘쳐흐르는 기사도, 방아쇠가 당겨진 총을 막을 수 없다.

그 시절 신(神)과 천사, 악마, 뱀파이어에 맞서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고 인간 찬가의 의지를 부르짖었던 날들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그리고 그대는 이 좋은 세상을 끔찍하게 바꾸려 하고 있군요, 미스터 버질.”

“요, 용서해 주십시오, 돈 나이트워커!”

남자가 애걸했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대에게 밀주(密酒)를 허락했지, 마약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시엔의 말에 남자가 다시금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그, 그러나 이미 4대 패밀리가 함께 손을 잡고 프렌치 커넥션을…….”

“우리는 사업가들입니다.”

시엔이 말했다.

“사업가로서, 저는 마약이 악하다는 이유로 불허하는 게 아닙니다.”

“그, 그럼 어째서……!”

“위험하니까요.”

시엔이 말했다.

“지금 당장 수익을 가져온다는 이유 하나로, 새 시대의 중심이 될 합중국(合衆國)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세상의 악이 되어 손가락질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남자, 버질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과거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이라 불렸던 존재임을.

시엔 역시 과거에는 눈앞의 남자와 똑같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세상의 악보다 더 커다란 악, 그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정교하며 극악무도(極惡無道)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것은 깨닫지 못하는 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은 악이다.

뭐라 애걸하는 남자를 향해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아무 감정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알이 남자의 두개골을 꿰뚫고 뼈와 살점과 뇌수, 피가 흩뿌려졌다.

침묵 속에서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자신의 사람들을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견진성사(Confirmation)를 치를 겁니다.”

그것은 그 시절 나이트워커 가문의 성사(聖事)도, 그렇다고 교회에서 말하는 성사도 아니었다.

살해 후 시체를 그 자리에 남겨 경고를 전하는 이쪽 세계의 은어였다.

“알겠습니다, 대부님.”

그들이 시엔을 부르는 이명, 대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결코 시엔 나이트워커의 가족이 아니었던 까닭에.

*  *  *

브로드웨이 42번가.

그곳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에 어울리는 무대의 중심지였다.

“영화?”

그녀, 이자벨은 그곳에서 ‘미하일’과 함께 가장 잘나가는 남매 배우였다.

“그래. 요새 할리우드다 뭐다, 아주 말이 많던데. 그쪽에 역사에 길이 남을 새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말이야.”

미하일의 말에 이자벨은 커다란 시가를 머금고 불을 붙이더니, 조용히 그 맛을 음미하며 침묵했다.

“역사라.”

시가를 뻐끔거리고 나서 이자벨이 웃었다.

“연극이나 뮤지컬도 좋지. 그래도 내가 보기에 말이지, 영화야말로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진짜 무대’야.”

“네 뜻대로 하렴, 미하일.”

“누님의 뜻은 어떠신지?”

“음, 나야 뭐.”

말하고 나서 이자벨이 고혹적으로 빛나는 적발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사랑하는 우리 동생이 하자는데, 달리 별수가 있겠니?”

*  *  *

“라일라 나이트워커.”

루나가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 그리고 베네토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명의 가주 중 하나지.”

강단 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진다.

“혹시 이 중에, 당시의 그녀를 부르던 또 하나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나?”

“암살자들의 어머니.”

어느 열정 넘치는 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갖는 가족의 특징과 형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볼 수 있지.”

그리고 그 대답에 루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  *

“역사는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펼쳐나가는 과정이고, 절대정신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철학을 다루는 젊은 교수가 말했다.

“역사의 변증(辨證)을 통해 인류의 이성은 진보하고, 실패와 부정의 과정조차 합일(合一)의 일부로 승화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이론이군요.”

말에 루나는 조용히 웃었다.

달리 그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고.

“요즈음 학계에는, 역사의 비극이 끝없이 반복되고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비관론이 넓게 퍼지고 있습니다.”

젊은 교수가 루나를 향해 말했다.

“교수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녕 우리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순환(循環)에 동의하십니까?”

“되풀이되는 비극도 있겠지요.”

루나가 말했다.

“그러나 필시 되풀이되지 않는 비극도 있을 겁니다. 혹은 전례가 없는 비극 역시 있겠지요.”

여느 때처럼 지혜로운 목소리로.

“누구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두 차례나 거듭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저 담담히.

“어느 쪽이든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할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진심을 억누르고 ‘역사 속에 기록될 정답’을 찾아 살아가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교수가 침묵했다.

“역사 속의 어떤 ‘절대정신’을 정답이라 규정하고, 자기 삶의 정답을 역사적 관점과 맥락 속에서 절대정신에 부합하는지 탐구하는 삶은, 누구의 삶입니까?”

루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역사가 될지라도, 역사는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

“훗날 역사에 당신의 삶이 어떻게 기록될지 두려우신가요?”

루나가 물었다. 교수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정곡이었다.

침묵하는 그를 향해 루나가 재차 물었다.

“하나 묻지요. 나이트워커 가문 최후의 가주, 시엔 나이트워커에 대해 교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십니까?”

“시엔 나이트워커…….”

젊은 교수는 침묵했다.

“글쎄요, 그에 대해서는 워낙 평가가 엇갈리는지라.”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사람이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루나가 웃었다.

“누군가는 그를 일컬어 진실한 애국자라 부르고, 누군가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는 존재로 볼 겁니다. 혹은 감정을 떠나 철저하게 그의 행적과 과오(過誤)를 판단하고, 그가 역사에 있어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탐구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루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정답.

“시엔 나이트워커의 삶을,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관점 속에서 어떻게 평가하실 겁니까?”

루나의 물음에 교수는 침묵했다.

“……루나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를 내리십니까?”

침묵 끝에 교수가 되물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답을 내린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루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시대, 그 순간을 살아가던 ‘시엔 나이트워커’가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역사적 상황이란 렌즈를 끼고 그 삶을 평가해서 답을 내린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답일 뿐이지요.”

루나의 말에 젊은 교수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교수님.”

젊은 교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입니까?”

루나가 생각하는 역사.

그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하고 나서, 여느 때처럼 지혜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이야기 속의 누군가가 옳은 결정을 내리든 틀린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지요. 거기에 정답이나 오답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째서 역사를 배우는 겁니까?”

젊은 교수가 되물었다. 많은 것을 부정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주는 희망을 긍정하며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은 심정으로.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니까요.”

루나가 대답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커다란 이야기를 기억하려는 겁니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자의 대답이었고,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  *  *

1939년, 할리우드.

이 시대에는 그 무엇도 신비하지 않다. 일찍이 세상을 호령했던 검과 마법의 이야기는, 그저 구닥다리가 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무엇도 신비하지 않은 이 시대에, 하나의 새로운 마법이 떠올랐다.

할리우드에서 개봉된 하나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였다.

영화는 흑백으로 시작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어느 소녀가 폭풍에 휘말리고, 그렇게 휘말린 끝에 문을 열고 어딘가로 나왔을 때.

흑백이었던 화면이 총천연색의 컬러로 바뀌었고, 하나의 마법 같은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해당 작품의 배우를 두고 여러 의견이 엇갈릴 당시, 대부(Godfather)라 불리는 남자에 의해 배우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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