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97화 (197/200)

외전 8화. 세상의 악 (3)

신과 운명, 천사와 악마, 요정과 뱀파이어.

그 어떤 괴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꺾이지 않았던 인간 찬가의 의지를 꺾은 것은, 누구도 아니고 그들 자신이었다.

그 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 1934년.

“제3제국(Drittes Reich)이라.”

일찍이 구대륙을 호령했다고 일컬어지던 신성 로마누스 제국, 바로 그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새롭게 떠오른 국가가 있었다.

그들 나라의 새로운 총통은 철십자와 쌍두독수리의 문장(紋章)을 내세우며, 그 시절 위대했었던 제국의 부흥을 꿈꾸었다.

바로 그 소식이 적혀 있는 신문을 접으며, 요한 나이트워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리 웃기시나요, 대부님?”

그의 곁에서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숙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나라에 위대했던 신성 제국의 영광을 다시금 되찾으려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며 요한이 앞을 볼 수 없는 린을 위해, 자신이 신문에서 읽은 제3제국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소식을 듣고 린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서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듬는다.

“여기 있단다.”

그러자 그 모습을 헤아린 요한이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손에 머그잔의 손잡이를 들려준다.

“고마워요, 대부님.”

린이 조용히 미소 짓는다.

붕대로 눈을 가린 그녀에게, 더 이상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는 통찰은 없다. 늘 자신의 일부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검(劍)도 없다.

그럼에도 린은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미소 지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친애하는 오라버니와 함께 지내는,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축복하며.

*  *  *

굉음이 울려 퍼진다.

철갑을 두른 폭격기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폭격을 내리꽂고, 땅이 폭발하고 그 위에 있는 인간들이 형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서져 내렸다.

총성, 비명, 고함,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춤추는 지옥도.

일찍이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라 불렸던 하나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세상에는 여전히 전쟁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성 제국과 베네토 공화국,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순간에도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전쟁에는 늘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돈이.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역사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는 방.

“오랜만이군요, 오라버니.”

바로 그 일실에서,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미소 지었다.

“그래, 라일라.”

요한 역시 미소 지었다.

“많은 것들이 오랜만이지.”

그 시절의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듯이.

“우리가 이렇게 ‘가족다운 일’을 위해 모이는 것도 말이야.”

“이 전쟁을 끝으로 ‘합중국’은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거머쥘 겁니다.”

“그들이 새로운 시대의 승자가 되겠구나.”

시엔의 말을 듣고 라일라가 대답했다.

아울러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루나가 말했다.

“듣자 하니, 이 전쟁을 대비해 극비리에 새로운 결전 병기를 개발하고 있다지.”

“맞아요.”

시엔이 대답했다.

1920년, 금주법과 대공황을 거쳐 혼란을 겪는 합중국에 홀로 들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이자 가족의 보금자리를 쌓아 올린 당사자로서.

*  *  *

금주법 당시 밀주(密酒)와 카지노, 우유 유통 사업을 통해 거금을 손에 넣은 그 남자는, 이미 이전부터 뒷세계의 거물로 이름 높은 존재였다.

그 후에는 자신에게 씌워진 여러 범죄 혐의의 무죄를 증명했고,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철강이나 석유, 금융, 군수(軍需) 사업에 발을 뻗으며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재벌로 거듭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세계를 아우르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은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  *  *

1942년,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

“베르나르트 후작에 대해 아십니까?”

“역사책에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하네요.”

무척이나 낯이 익은 이름. 동시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그 물음에 시엔이 어깨를 으쓱였고, 남자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괴자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머리카락이 발밑까지 흘러내린 장발에 조각상처럼 기품 있어 보이는 미남자였다.

그 남자는, 일찍이 제3제국 출신의 과학자였으며─ 합중국으로 망명(亡命)해 결전 병기의 개발을 담당하는 책임자 중 하나였다.

“알다시피 대륙 전쟁 당시 그가 펼쳤다고 일컬어진 마법, 아바돈(阿鼻沌)은 최후의 최후까지 그 비밀이 풀리지 않았지요.”

아울러 검과 마법의 신화가 사라진 이 시대에, 더 이상 그 비밀이 밝혀지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저도 어릴 때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베르나르트를 닮은 남자가 쓴웃음 지었다.

시엔 역시 침묵하며 베르나르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나는 죽어도, 이 땅 위에 새겨진 나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테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내 마법의 신비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겠지. 그날의 악몽을 기억하고 두려움과 경이에 떨며─.

결과적으로 베르나르트는 그의 바람을 이루었다.

그의 말마따나, 베르나르트 사후 아바돈의 비밀을 풀기 위해 온 세계의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누구도 그 해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진보하며 새로운 시대정신이 낡은 것들을 교체하는 사이,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은 그 비밀이 풀릴 일은 영영 없으리라.

그 남자, 베르나르트는 결과적으로 영생의 그림자를 손에 넣은 셈이다.

설령 육신이 죽어 스러져도 그 의지는 사라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러 계승되고 있으니.

그게 그들의 삶이었다.

그 시절, 저마다의 이상과 신념을 끌어안고 살아갔던 이들을 떠올렸다.

비록 그들 모두가 이제는 역사의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추었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계승되고 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말에 베르나르트를 닮은 남자가 눈을 끔벅거렸다.

“누구의 말입니까?”

“죽기 전, 베르나르트가 남겼던 마지막 말입니다.”

시엔이 말했다.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정말 그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뭐, 저도 어쩌다 들은 이야기라서요.”

그렇기에 시엔 역시 어깨를 으쓱였고, 베르나르트를 닮은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야 수백 년도 전에 죽은 남자의 마지막 말, 심지어 그 죽음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자의 마지막 말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을 리 없다.

아마 어디서 들은 허구의 이야기거나 착각이겠지.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시엔의 말은 남자의 마음을 깊게 이끌었다.

*  *  *

1945년, 전쟁이 끝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합중국이 극비리에 개발을 마친 결전 병기─ 핵무기가 떨어진 곳은 과거 베르나르트가 폭격을 감행했던 제국 북동부였다.

과거에 대륙 제일의 학업적 명성을 가진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가 세워진 유서 깊은 배움의 전당이 있던 자리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 시각, 연구소의 집무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베르나르트를 닮은 남자가 속삭였다.

폭격이 떨어진 그곳에, 일찍이 베르나르트가 펼쳤던 것 같은 궁극의 무(無)는 없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던 까닭에.

폭발과 함께 폭심지 일대의 산소가 불타고, 충격파와 함께 고온의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직격을 맞은 이들은 차라리 나았다.

특히 끔찍했던 것은 아슬아슬하게 직격에서 비껴나, 자비로운 죽음마저 허락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화상으로 피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폭발로 휘몰아치는 유리와 돌 조각 따위가 몸 곳곳에 박혔으며, 눈이 불타 칠흑 같은 동공밖에 없는 이들이 거리를 헤매었다.

남자는 바다 너머 대륙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펼친 파괴의 참상을 똑똑히 듣고 목격하고 있었다.

비극 속에서 남자는 침묵했다.

침묵하며 그가 아꼈던 가장 오래된 위스키를 개봉하고, 병째로 몇 모금을 홀짝였다.

홀짝이고 나서는, 서랍 속의 권총을 꺼내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른 총성이 울려 퍼졌다.

*  *  *

하나의 전쟁이 끝이 났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강자를 가리기 위한 전쟁이었다.

제3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던 두 동맹, 합중국과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일명 연방(蓮邦)이라 불리는 두 나라 사이의 전쟁.

일명 ‘냉전(Cold War)’이라 불리는 그 전쟁은, 직전에 벌어진 전쟁처럼 뜨겁고 파괴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전쟁보다도 조용하고 소리 없는 전쟁에 가까웠다.

동시에 그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이 세상 누구보다 잘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  *  *

“그러니까 그 남자가 금주법 당시 밀주 사업으로 자금을 끌어모으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냉전을 걸쳐 군수 사업까지 확장해 이 나라를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요?”

“마, 맞아요!”

그곳은 도시의 여느 평범해 보이는 카페였다.

“이, 이 나라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을 조정하고 있어요! 세계 대전도 냉전도, 모두 그들의 짓입니다! 저는 알아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시종 주위를 둘러보며 벌벌 떨고 있는 남자가, 술에 취하고 떨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 게다가 그들 조직의 원류(源流)는 수백 년 전, 베네토 공화국을 지배했던 나이트워커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야말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말에 요크타임스의 기사 낸시는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무슨 미치광이 같은 소리를 하나 싶었다.

“알겠어요, 존스 씨. 혹시 실례지만 존스 씨의 말씀을 믿을 증거나 자료 같은 게 있을까요?”

“벼, 별과 단검…….”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모두 몸에 별과 단검의 문신을 지니고 있어요! 그, 그리고…….”

“아, 그거요?”

바로 그때, 낸시의 곁에 앉은 선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목덜미 아래에 새겨져 있는 문신을 드러내며.

그리고 그것을 보자마자 남자의 표정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얼어붙고 나서는, 갑자기 광인(狂人)처럼 울부짖으며 고함을 외치고 날뛰기 시작했다.

*  *  *

“요즘 들어 세상 사람들이 이상해진 것 같아요.”

그날 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낸시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수정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의 여성, 티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섭지 않니?”

“뭐가요?”

“봐, 여기 패밀리를 상징하는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져 있잖니.”

티아가 말했다. 그 무엇보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서. 짧은 적막이 감돌았다.

“뭐예요, 선배님! 놀리기나 하고.”

침묵 끝에 낸시가 우습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검고 어두운 하늘을 따라 시린 별이 창백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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