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99화 (199/200)

외전 10화. 세상의 악 (5)

1992년 4월, 구대륙의 어느 반도(半島)에서 종교와 민족의 차이를 이유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발발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냉전을 통해 세상 사람 모두가 전쟁의 비극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상황에서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제국과 왕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공화국과 공화국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 속에서 공교롭게도 1차 세계 대전의 방아쇠가 되었던 그 도시, 보스니아 공화국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서 벌어진 비극은 특히나 참혹했다.

종교와 인종(人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도시 전체를 포위하고, 탈출하는 이들은 모두 죽였다.

그중에서도 적국 부대는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대로 일대를 장악하고, 그곳을 ‘저격수의 거리’라 부르며 보이는 이들을 족족 쏴 죽였다.

봉쇄된 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 아이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왔다.

사방에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 퍼지며, 뇌수가 흩뿌려지는 학살의 장.

그 참혹하기 그지없는 지옥 속에, 그녀가 있었다.

도처에 죽음이 넘쳐나고 있다.

그 지옥 앞에서는, 일찍이 《죽음의 성모》라 불렸던 그녀조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빌헬미나 아퀴나스.

어떻게 해서 그녀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받은 ‘운명의 저주’를 함께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대자 루카, 형제 디트리히, 그 외에도 살아남은 쌍두독수리의 가족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홀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녀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펼치는 역사와 함께하지 않고, 홀로 방랑길에 떠났다.

그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죽음을 지켜봤다.

속죄 같은 알기 쉬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어졌던 까닭이다.

그 시절의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끔찍하고 지옥 같은 짓을 벌여왔는지.

이곳에서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의 죽음에 가장 커다란 책임을 갖는 자들은, 정작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녀 역시 죽음의 책임자 중 하나였다.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책임자.

그 사실에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삶, 그 삶 속에서 아득바득 굶주린 아귀(餓鬼)처럼 발버둥 쳤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진 까닭에.

대체 무엇을 위해 과거의 자신은 그렇게나 치열하고 잔혹하며 극악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는지.

탕!

바로 그때, 고층 주택의 옥상에 매복하고 있던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곳 ‘저격수의 거리’ 위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빌헬미나를 향해서.

그러나 총알이 그녀의 두개골을 꿰뚫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저 운 좋게, 그녀의 뺨을 스치며 비켜나갈 뿐이다.

스친 총알이 그대로 시가지의 바닥을 꿰뚫는다.

처음에는 그저 잘못 맞췄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거리를 달리지도 않고, 모든 것을 체념하듯 홀로 천천히 걷는 빌헬미나를 보며 저격수는 생각했다.

그녀가 삶의 의지를 체념하고 저버린 사람이라고.

장기화된 포위, 물자 부족과 굶주림, 어디서 총알과 폭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그걸로 사람을 망가뜨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다.

그녀 역시 그렇게 망가진 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금 조준을 고치고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 어떤 의지조차 굴복시킬 수 있는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총성과 함께, 또다시 저격용 총알은 그녀를 꿰뚫지 못하고 스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머저리 새끼야, 저거 하나 못 맞추냐?”

“아니…….”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있는 병사가 조롱했다. 이윽고 조롱과 함께 저격용 라이플을 받아 다시금 조준했을 때였다.

“어……?”

─조준경 너머, 직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여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상황에 병사가 눈을 끔벅거린다.

“……어?”

“왜 그래?”

동시에 등 뒤에서 시린 냉기가 느껴졌다.

직전까지 저 멀리, 저격용 라이플을 통해 맞출 거리에 있어야 할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등 뒤로, 마치 죽음의 신을 떠올리게 하는 정체불명의 실루엣을 거느린 채.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물었다.

물론 그곳에 있는 이들 누구도 그녀의 이름은커녕 별명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 역시 개의치 않았다.

기약 없는 역사의 표류자로서, 빌헬미나가 물었다.

그곳에서 역사의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는 인간을 향해.

대답을 바라고 내뱉는 물음이 아니었다.

누구도 그 대답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차가운 죽음이 내려앉았다.

“빌헬미나.”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헬미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가족, 그녀가 사랑하는 전부.

함께 영겁의 저주를 받아 세상의 끝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녀를.

“……라일라 언니.”

빌헬미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 모두 나이트워커 가문의 짓이야?”

“아니.”

라일라가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을 바라지 않아.”

“그럼 뭘 바라는데?”

“평화.”

“…….”

빌헬미나는 침묵했다. 이제 와서 그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두 자매에게는, 진실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단다, 빌헬미나.”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전쟁을 통해 무기를 사고파는 푼돈 앞에 일희일비하는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거든.”

“그럼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뭐야?”

“악(惡)이지.”

라일라가 말했다.

“세상의 악.”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이 아니고?”

“과거에는 우리가 ‘세상의 악’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지.”

그렇게 말하며 라일라가 웃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자의식 과잉이자 오만(傲慢)이었단다.”

“…….”

빌헬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합중국 내에서 협정이 체결됐고, 머지않아 전쟁을 멈추기 위해 「조약기관(條約機關)」의 집행군이 참전할 거야.”

“평화의 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네.”

“그러는 너야말로 속죄의 고행이라도 하는 거니?”

라일라가 되물었다.

“나는 그저 답을 알고 싶은 것뿐이야.”

수백 년이 지났고, 어쩌면 수천 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치열하게 세상의 악을 자처하며 살아왔는지.”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 국교회의 추기경이자 죽음의 성모였다. 제국을 위해, 자신이 믿는 것들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을 장기 말처럼 다루고 필요가 없어질 때는 망설임 없이 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태어났던 제국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고, 다시 멸망하고, 그렇게 끝없이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같은 어리석음을 거듭하는 인간들 앞에서, 무심코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덧없는 찰나를, 마치 세상의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착하는 그 모습이.

“네가 답을 얻길 기도하고 있단다.”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빌헬미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  *  *

2001년 9월 11일.

희망 넘치는 새천년이 시작되었을 때, 신대륙의 합중국은 세상의 패권을 쥐는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

합중국의 힘을 상징하는 초거대 구조물, 일명 ‘쌍둥이 빌딩’이라 불리는 세계무역센터에 항공기가 충돌했다.

테러리스트에 의해 항공기가 납치되고, 그대로 무역센터 빌딩을 향해 충돌해버린 것이다.

그 어떤 역사 속에서도 절대 공격받지 않았고,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의 심장에 새겨진 최초의 상흔이었다.

비극 속에서 테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정치적으로 몰려 있던 대통령과 매파 의원의 입지는 극적으로 뒤집혔고, 온갖 음모론 속에 다시금 《패밀리》의 존재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  *  *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지?”

강단 위에서 루나가 물었다.

“끝없이 거듭되는 비극과 전쟁,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고통,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느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역사는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펼쳐나가는 과정이고, 절대정신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과거, 그렇게 말했던 젊은 교수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교수 역시 어느덧 늙어 죽고, 결국에 그는 그토록 바랬던 역사 속의 대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여전히 루나는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신분을 바꾸고 정체를 바꾸었으나, 여전히 그녀는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가르치고 있었다.

세상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이 세상을 살아가고 기록된, 혹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삶과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  *  *

꿈을 꾸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강철 같았던 의지를 가진 남자와 싸웠던 꿈이었다.

역사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 남자는 ‘아서 왕’이라 불렸다.

칠왕국을 통합하고 대륙 진출의 꿈을 이루며 나아갔으나,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꺾였던 남자.

“왕의 앞에 서지 마라.”

곰처럼 커다란 거구에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신기로 전신을 완전무장하고 있는 괴물 중의 괴물.

아버지 우서 펜드래곤의 투구 구스화이트(Goosewhite), 물푸레나무 창 롱고미니아드, 요정왕 멀린이 직접 엮은 마법의 사슬갑옷 위가르(Wygar), 단검 카른웬하이, 방패 프리드웬, 전설 속의 명검 엑스칼리버는 물론, 그와 더불어 자웅을 겨루는 명검 클라렌트(Clarent)까지.

이제는 그저 전설로 치부되는 ‘신기’로 몸을 감싸고, 그 어떤 역경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의지로 나아갔던 남자.

“왕의 앞을…… 막지…… 마라.”

시엔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문득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그 남자의 검이 기억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시대에는 그 누구도 더 이상 검을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검에 실린 무게, 그 의지를 느낄 일은 영영 없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나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공허했다.

그렇기에 시엔이 소맷자락 속에 숨겨 넣은 날카로운 스틸레토 단검을 뽑아, 가볍게 빙글 돌렸다.

그렇게 몇 차례 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나서는, 이내 과거의 향수를 느끼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 시절, 절대 선하지 않을지언정 찬란하게 빛나는 의지로 가득 찬 그 시대를.

그 시대에 써 내려갔던 검과 마법, 기사와 암살자의 이야기를.

*  *  *

더 이상 누구도 별과 단검의 의미와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별과 단검의 주인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내려진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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