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90)

16화.

‘어떻게 할까.’

특기인 일러바치기를 잠깐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증거도 없이 그랬다간 역풍 맞기 딱이지.’

내가 딱 보니까 하녀들을 때린 건 날 겁먹게 하려고 한 거다─ 라고 말했다간 나만 우스워질 거다.

세 살짜리가 그런 기 싸움을 어떻게 알겠어?

‘하녀들이 맞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한다면…… 아니지.’

하녀를 교육하기 위해서였다고 핑계를 댈 거다.

하녀들에게 듣자 하니, 레이첼 부인은 윗사람에겐 그렇게 좋은 사람일 수 없다고 했다.

“따님의 첫 파티라고요? 그럼 제가 응당 도와야지요. 관할성의 하녀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화훼 사업을 시작하셨더군요. 하면 제가 그냥 있을 수 있나요. 그렇지 않아도 관할성의 정원수를 바꿀 예정이었답니다.”

“세상에, 무구가 어쩜 이리 낡았담. 경의 것이라도 살짝 바꿔 드릴게요.”

호의를 사기 위해 내정 자금을 펑펑 써 댔다.

그 탓에 관할지로 오는 예산이 줄어들기 무섭게 성이 휘청거리는 거다.

하지만, 그녀의 덕을 본 높은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병사들도 그렇고.’

아버지는 서군 사령관인 만큼 병영을 제일 신경 썼다.

그러니 레이첼은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병영은 각별하게 챙겼을 것이다.

지금도 보면,

“오오, 레이첼 부인! 이거 진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전장에서도 공을 많이 세우셨다고요?”

“당연하죠! 부인은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이라면…… 최근 드레스를 구매하러 갔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은 정도랄까요.”

“아, 그런 일 있으면 우리한테 말씀하시라고! 식구 좋다는 게 뭡니까!”

“호호, 아스트라의 정예병들이 지켜 주신다면 든든하네요.”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들을 보던 중에 아버지가 나왔다.

정복을 입은 아버지는 아주 근사했다.

“장군님!”

레이첼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평안한 외출 되시기를. 돌아오시면 바로 피로를 푸실 수 있도록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해 두겠습─”

그런데 아버지는 레이첼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게로 다가왔다.

“에릴로트.”

“녜.”

“몬득이가 아냐.”

“……녜?”

“데이몬드다.”

‘무슨 말을…… 아.’

나는 공작성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어린애인 척 글씨를 쓴다고 아버지의 이름을 [몬득이]라고 썼지, 참.

‘그게 신경 쓰였나.’

나는 눈을 깜빡였고,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돌아올 때까지 연습해 놔.”

‘어?’

내 교육을 봐준다는 건가?

보통 귀족의 교육은 교사의 영역이다.

부모가 봐주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건 ‘자식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확실한 표시였다.

‘우와─!’

표정이 밝아진 나는 소리쳤다.

“녜!”

“그래.”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픽, 웃었다.

병사들은 껄껄 웃었는데, 레이첼 부인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에게 무시당한 게 매우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밤엔 돌아올 거다.”

“녜.”

나는 아버지와 병사들을 배웅했다.

그런 날 노려보던 레이첼 부인은 쿵, 쿵, 발을 구르며 안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난 어젯밤에 보았던 마음에 꼭 드는 정원에 자리를 잡고 글씨 연습을 했다.

‘데이…… 몬…… 드.’

좋았어.

종이에 커다랗게 글씨를 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아버지가 와서 확인해도 제법 잘 썼다고 생각하겠지.

뿌듯한 맘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찰나였다.

“왜 이렇게 굼떠!”

사내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정원사가 웬 노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가지치기해 두란 게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고함치는 정원사를 본 하인들이 속닥거렸다.

“자기가 언제 가지를 치랬다고.”

“쉿─, 듣겠어요.”

“저놈은 왜 아침 댓바람부터 성질이야?”

“화풀이죠. 레이첼 부인의 기분이 안 좋다잖아요. 괜히 말 걸었다가 한 방 먹었대요.”

“노인만 안 됐지.”

하인들은 쯧쯧, 혀를 차고 지나갔다.

나는 정원사와 노인을 쳐다봤다.

정원사는 씩씩거리며 노인에게 삿대질했다.

“뭐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일꾼으로 써 줬더니만. 마음에 차는 구석이 있어야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노인은 베레모를 끌어안고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수풀 담부터 정리해! 나는 좀 쉬다 올 텐데, 뺀질거릴 생각은 하지 마라.”

“예.”

콜은 쯧, 혀를 차고 등을 돌렸다.

그때, 바람이 휭─ 불더니 노인의 모자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난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어서 노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내게서 모자를 받은 그가 인사했다.

‘어?’

인사하는 자세가 완벽하다.

오른쪽 발을 뒤로 빼고, 왼팔을 명치와 배꼽 사이에 둔 채, 허리를 45도로 굽히기.

이만큼 완벽한 자세는 공작성에서도 못 봤다.

‘엄청 남루한 차림새인데?’

겉보기엔 완벽하게 가난하고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가 쥐고 있는 종이를 보고 말했다.

“공부 중이셨군요.”

“응.”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곧 에벤(소나기)이 올 겁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귀족의 단어를 쓰잖아.’

그것도 이제는 노인들만 쓰는 예스러운 귀족의 단어였다.

‘뭔가 있어.’

난 놀란 척 숨을 들이켰다.

“하부지, 마법사다! 어떠케 알지?”

비가 오기 전엔 관절이 아프거나 하는 이유로 아는 것 같았지만, 난 놀란 척했다.

그리고 슬쩍 원하는 바를 말했다.

“마법사밈. 이름 알려 주세요. (마법사님. 이름을 알려 주세요.)”

노인은 그런 내가 귀여운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미켈란입니다.”

‘미켈란?’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빙.흑.손>에 이런 인물이 나왔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거의 다 알고 있는데, 그 중엔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좋은 하루 되십시오, 아가씨.”

“으응.”

나는 미켈란의 뒷모습을 보며 갸웃했다.

‘흔한 이름은 아니야.’

어디서 봤더라.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미켈란의 말처럼 소나기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들어가자.’

그렇지 않아도 데이몬드 관할성으로 온 후 몸이 좋지 않았다.

최근에 일이 많아서 피곤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비까지 맞으면 감기는 떼놓은 당상이야.’

난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돌아와서도 내내 노인의 이름을 곱씹었다.

‘미켈란, 미켈란, 미켈…….’

한참 이름을 곱씹던 난 눈을 번쩍 떴다.

맞아, 그 사람이다!

“요새는 사람 부리기도 어려운 일이 되었어요. 글쎄 이번에 저희 하인이 ……(중략)…… 어디 미켈란 같은 수족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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