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90)

22화.

한지혁이 이 시기 즈음에 클랭클린 제과점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건, <빙.흑.손>을 읽어서 알고 있었다.

‘정말로 딱 4시에 오네.’

사기꾼 주제에 성실하기도 하다.

방도 딱 맨 끝에서 두 번째.

가장 으슥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선호하는 귀족이 자주 찾는 자리가 아니다.

나는 케이크를 주문하며, 한지혁이 떠벌떠벌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쿤기사 선장이 워낙에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투자자를 받지 않는데……. 아, 저희가 어떤 사입니까. 제가 경의 자리를 마련해 놨죠.”

“내 자리를 말이오?”

“예. 하지만 금액은 정해져 있습니다. 십만 골드.”

“시, 십만?!”

“아, 그보다 큰 금액은 못 받습니다. 아무리 경이라도 그건 무립니다.”

“십만…….”

“어떻게, 투자하시겠습니까?”

한지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상대방은 고민하듯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상대방은 곧 탕! 테이블을 내리쳤다.

“좋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돈은 언제까지─”

“아내와 상의해 보리다!”

“……예?”

“아, 이런 건 아내와 상의해야 하더라고. 하지 말란 일을 하면 꼭 문제가 생겨서. 하하! 내 얼른 가서 물어보고 오겠소.”

그러더니 상대방이 얼른 짐을 챙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에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쯤 뒤.

“X발…….”

욕설이 들려왔다.

으득, 이를 간 한지혁이 중얼거렸다.

“멍청해서 홀랑 털어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부인이 뭐 이렇게 잘 교육해 놨어?”

한지혁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곤 수첩을 확인하는 듯 종이를 파라락,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호쿠 경은 실패. 그럼 마샤스 남작을…….”

“마샤스 남작한테 사기치몬 주글걸? (마샤스 남작한테 사기치면 죽을걸?)”

“뭐, 뭐야!”

내 말에 한지혁이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나는 의자 밑의 벽을 더듬었다.

손끝에 걸리는 것을 꾹, 밀자 아이 하나는 지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나왔다.

난 개구멍을 통해서 엉금엉금 기어갔다.

의자 아래서 뿅, 나타난 날 본 한지혁이 기함했다.

“너, 너, 너 뭐─”

“쉿.”

나는 얼른 한지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욘히 해. 하냐들이 듣는단 마랴. (조용히 해. 하녀들이 듣는단 말야.)”

고개를 털어서 내 손을 떼어 낸 한지혁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 어떻게 그 공간을 알지?”

“소설에서 바써.”

여기에 개구멍이 있어서, 일부러 이 방에 자리를 잡잖아?

사기를 치는 상대가 좀 위험한 사람인 것 같다, 싶으면 저 개구멍에 무기를 넣어 놓는다.

내 말에 한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콩알만 한 게 무슨 헛소리야. 어르신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썩 꺼─”

“너두 환생했는데, 내가 환생한 게 이상해?”

“뭐?!”

난 입을 떡 벌린 한지혁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말해 줬다.

“하나 골라 바.”

“무슨…….”

“1번. 지금까지 사기 친 상대들하테 네 정보를 다 넘겨서 개롭게 한다.”

“뭐라고?”

“2번. 나랑 같이 합법적인 밤법으로 한탕 한다.”

한지혁은 입을 딱 벌렸다.

나는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입도 떡 벌리느라 바쁜 그를 보고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미천은 네가 대는 고야. (물론 밑천은 네가 대는 거야.)”

사기 친 돈 좀 나눠 쓰자.

내가 세 살이라 돈이 별로 없거든.

* * *

한지혁은 팔짱을 낀 채로 날 노려봤다.

그리곤 문밖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여긴 소설이고, 난 소설 속 캐릭터이며, 넌 빙의자다?”

“웅.”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나는 한지혁이 시켜 놓고 손도 안 댄 아이스티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한지혁. 환생 전엔 스무 살. 신입생 오티에서 술부심을 부리다가 사망. 가장 큰 후회는 외장 하드를 비우지 않고 죽은 것……. 근데 외장 하드가 왜 후회야?”

내가 한지혁의 신상 명세를 줄줄 말하자, 그의 얼굴은 희멀게졌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읊어 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다.

나 또한 그와 같은 환생자라는 걸.

한지혁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중요한 자료가 많아서 그래.”

“중요항 고…… 아하.”

나는 히죽 웃었고 한지혁은 얼굴이 벌게졌다.

“팔뚝만 한 게 뭘 알아!”

“모르는 거로 해 주께.”

“인자한 표정 짓지 마!”

“그래, 그래.”

한지혁은 이를 까득, 갈았다.

그리곤 “소설에 별걸 다 쓰고 있어.” 하며 짓씹듯 말했다.

“협업하자는 것까진 알겠어. 하지만 내가 밑천을 대는 거라면, 비율은 9 대 1이야. 당연히 내가 9고.”

누가 사기꾼 아니랄까 봐, 비율이 엉망이다.

밑천을 저쪽에서 대긴 하지만, 내겐 정보가 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한 정보.

‘7 대 3으로, 나는 3만 먹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렇게 나오면 마음이 바뀐다.

“내가 9, 네가 1.”

그렇게 말하자 한지혁이 펄쩍 뛰었다.

“미쳤어? 어디서 날 호구로 보고─”

그가 벌떡 일어나려고 해서 난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외눈박이 욘병당이 널 아직 찾아다니지? (외눈박이 용병단이 널 아직 찾아다니지?)”

그가 사기 쳤던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자를 언급하자, 한지혁은 다시 조용히 앉았다.

그가 매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삼백만 골드. 네가 고잣 1의 비율로 가져가 쑤 있는 돈이야. (삼백만 골드. 네가 고작 1의 비율로 가져갈 수 있는 돈이야.)”

“거, 거짓말…… 너 같이 되바라진 어린애의 말을 어떻게 믿어!”

“난 되바라져찌만, 사기는 안 쳐.”

“…….”

“잘 생각해 보구 연라케. (잘 생각해 보고 연락해.)”

“네가 누군지 알고, 어디다 연락을 한단 말야.”

“난 아스트라의 에리로트야.”

“……!”

내 이름을 들은 한지혁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스트라의 성을 쓸 수 있는 부류는 딱 하나다.

아스트라 공작의 직계.

그리고 직계 중에 이렇게 어린애도 하나뿐이었다.

“데이몬드 아스트라의 딸…….”

난 생긋 웃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는 술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나무꾼 아비 밑에서 개고생하다가 탈출했는데, 누군 공작가의 영애님이냐…….”

투덜투덜하는 한지혁을 두고서, 나는 다시 개구멍을 통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런데.

“……아가씨?”

베티와 하이디가 개구멍에서 나온 날 보고,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한 두 사람이 내게 물었다.

“거긴 왜…….”

‘망했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 구게, 구로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이 안 떠올라서,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리로트, 멈머니야. (에릴로트, 멍멍이야.)”

귀염 떠는 척을 하자, 한지혁의 방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 들었나 봐.’

이제까지 엄청 멋지게 대화했는데…….

젠장.

* * *

나는 하녀들, 그리고 모스코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데이몬드 관할성으로 가기 위해, 상점 지구 검문소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왜케 안 가지? (왜 이렇게 안 가지?)”

하이디가 대답했다.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아서 검문하는데, 시간이 걸리나 봐요.”

“오늘 왜 사람 마나? (오늘은 왜 사람이 많아?)”

“아, 그렇지. 아가씨는 모르시겠군요. 곧 ‘평가의 날’이에요.”

“평가의 날……?”

베티의 말을 곱씹던 나는 흠칫했다.

‘맞아, 평가의 날!’

<빙.흑.손>에 그런 설정이 있었다.

공작성에서 각 관할성으로 사람을 보내 운영 평가를 하는 날.

관할령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다.

그리고 이 평가로 순위를 매겨서 하반기의 예산이 결정된다.

‘그래서 오늘 아버지가 같이 안 왔구나.’

엄청나게 바쁘니까.

그러고 보니 관할성에 돌아와서도 내내 서류만 붙들고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엔조의 보고를 받았고.

‘12번째 탑에서 평가의 날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잊고 있었네.’

나는 하이디에게 물었다.

“평가의 날이 얼마나 남아써?”

“가만있자……. 23일이니까 열흘 남았네요.”

‘망했다.’

열흘 동안 어떻게 준비하지?

평가 위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역시 관할성이다.

관할성의 살림이 엉망이면, 인상부터 나빠지는 것이다.

가뜩이나 상반기에 예산이 삭감되었는데, 하반기까지 그러면…….

‘우리 관할령, 망한다.’

관할령이 망하면 직계들이 날 우습게 보겠지. 그러면 또다시 괴롭힘의 위기에 놓일 것이다.

겨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가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관할성을 점검하자. 하이디와 베티가 도와주면 얼추 평가 위원을 대접할 정도는……. 으으음, 안 되겠지.’

난 조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하이디와 베티는 손이 빠르고, 꼼꼼하긴 하지만, 카리스마는 없다.

경력도 그리 길지 않고.

하인들을 휘어잡는 일은 어려울 거다.

무엇보다 하인들의 인원이 너무 적다. 도저히 그 인원으론 성을 굴릴 수 없을 만큼.

‘그러면…….’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마차가 데이몬드 관할성에 도착했다.

벌써 밤이라 관할성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들어갔다.

그런데.

‘어?’

중정에 들어간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함께 온 하이디와 베티, 모스코도 눈이 동그래져서 중정을 돌아보았다.

중정에 길게 깔린 카펫으로 누군가 걸어왔다.

그러곤 나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귀가하셨습니까, 아가씨.”

충성과 능력의 아이콘, 미켈란이 연미복을 입은 채로 나를 반겼다.

그의 가슴에 데이몬드 관할령의 상징인 독수리와 장미 배지가 달려 있었다.

미켈란이 말했다.

“데이몬드 관할성의 집사장, 미켈란 로그입니다.”

“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나는 얼굴이 확 밝아져서 미켈란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선황비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게 도와줬기 때문에, 은혜를 아는 그라면 우리 성의 집사가 되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선황비가 준 땅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주변 정리가 되어야 하니까.

“왜케 일찍 와써?”

“일찍 이 성에서 할 일이 있을 듯하여서요.”

평가의 날을 아나 보다.

‘크으으.’

역시 미켈란이야.

성은 매우 깨끗해졌다.

“하잉들 타이가 생겨써. 다 색이 다르네?”

내가 말하자, 미켈란이 짓궂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등급을 나눈 겁니다. 급료도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할 것이고요. 그래야 한 등급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한정된 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중정은 완벽했다. 먼지 한 올 없고, 진귀한 유물이라지만 보기 싫던 장식품도 다 치웠다.

대신에 아름다운 그림을 걸어 놨는데, 그쪽에 시선을 빼앗겨서 성 곳곳에 낡은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케란 최고!”

나는 미켈란의 품에 폴짝 뛰어들었다. 미켈란은 “아이쿠.” 하며 날 받아 줬다.

그러고는 그는 내 뒤에 하이디와 베티를 쳐다봤다.

“너희가 하이디와 베티구나.”

“예? 옛!”

“그, 그렇습니다.”

“대답은 한 번만, 말을 더듬지 않는다. 따라와라. 아가씨의 전담 하녀가 갖춰야 할 것들을 알려주마.”

미켈란은 나를 방으로 올려보낸 후, 하녀들을 데리고 갔다.

‘미켈란이 있으면 평가 위원 접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나는 히죽히죽 웃었다.

공작성엔 콘라드.

관할성엔 미켈란.

이렇게 능력 좋은 조력자를 배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외부에 배치할 한지혁뿐이다.

* * *

며칠 뒤, 밤.

한지혁은 머물고 있는 여관방에서 창밖을 내다봤다.

바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무도 없다. 좋아.’

한지혁이 서둘러 가방에 짐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내가 순순히 손을 잡을 줄 알았냐.’

뭘 믿고.

밑천이라고 돈을 받아 놓고 입을 싹 닦아 버리면?

만에 하나 일이 틀어져서 투자에 실패라도 한다면?

번번이 죽을 위기를 겪으며 긁어모은 소중한 돈이, 이대로 공중 분해될 것이다.

‘빙의든, 환생이든 난 몰라. 내가 아는 건 이제 귀족놈들과는 절대로 엮이지 않겠다는 거야.’

환생하고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는 한지혁이었던 자신의 예전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침대 밑에서 슈트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열자 번쩍번쩍 빛나는 그의 귀여운 금화들이 보였다.

‘백만 골드만 더 모으면 오백만 골드.’

오백만 골드를 모으면 이대로 여길 뜨는 거다.

휴양지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귀족처럼 사람을 부리면서 살 거다.

헤죽헤죽 웃은 한지혁은 짐가방을 둘러메고 슈트케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서둘러 여관 로비로 나갔다.

로비에서 꾸벅꾸벅 졸던 여관 주인이 부스스 눈을 떴다.

“뭐유.”

“아스트라 밖으로 나가는 마차가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옵니까?”

“이 밤에 마차는 무슨 마차. 타고 싶거든 새벽에나 나오시우.”

그러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는다.

한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말이라도 못 구하겠습니까?”

“여관에 있는 건 짐 옮기는 조랑말이 다유. 그런데 지금 나가려고? 여관비는 정산했수?”

“……했습니다.”

한지혁은 쯧, 혀를 차고 등을 돌렸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상점 지구까지 나가서 말을 사자. 비싸긴 할 테지만, 어쩔 수 없…….’

“우리, 정산할 게 있지?”

한지혁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관비는 다 정산했다니…… 헉!”

고개를 돌린 그는 여관에 막 들어오고 있는 덩치들을 발견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찬 외눈박이가 끌끌 웃었다.

“여관비만 내면 쓰나. 내 돈 십만 골드도 내줘야지.”

“다, 단주…….”

외눈박이 용병단.

그가 처음으로 사기를 쳤던 상대였다.

용병단의 덩치들이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한지혁이 여관 주인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여관 주인은 모른 척 식은땀만 흘렸다.

결국, 한지혁은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용병단의 덩치들이 그를 바닥에 거세게 내던졌다.

“으악─!”

“감히 내 돈을 삼키고 무사히 살 수 있을 성싶었어?”

‘크, 큰일이다.’

외눈박이가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저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작자였다.

그런 놈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쳤으니, 아마도 끔찍한 꼴을 당할 터였다.

“단주, 일단 제 말을 좀 들어 보십…….”

“거, 손에 든 건 뭐냐?”

외눈박이가 슈트케이스를 가리키자, 한지혁은 흠칫하며 슈트케이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 이건 별게─ 으악!”

한지혁의 어깨를 발로 찬 외눈박이가 슈트케이스를 빼앗았다.

그러곤 케이스를 열어젖히자,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용병단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이게 다 얼마입니까, 두목.”

“이야…….”

외눈박이는 씩, 웃고 슈트케이스를 그대로 닫아서 어깨에 둘러멨다.

“사기 친 값은 이거로 대신 받는다. 덕분에 산 줄 알아.”

그러고 돌아가려는데, 한지혁이 외눈박이를 붙잡았다.

“줘! 달라고!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데……!”

“미친놈이 어딜 감히! 네가 사기 친 대가라고 하잖아!”

“장장 4년을 부려 먹고 돈 한 푼 안 줬잖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한 시도 쉬지 못하게 했으면서─! 난 내가 받을 돈 챙겨서 간 거야!”

외눈박이가 한지혁을 걷어찼다.

“큭……!”

한지혁이 바닥을 나뒹굴자, 외눈박이는 등에 지고 있던 도끼를 꺼냈다.

“오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으니 지옥으로 보내주마.”

외눈박이가 도끼를 치켜들기 무섭게 한지혁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

누군 사기 치고 싶어서 사기 친 줄 알아?

귀족 밑에서 죽도록 굴려졌고, 용병단에서 뼈 빠지게 고생했다.

자신을 잔뜩 이용해 먹었으면서 제대로 된 대가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밀린 급료를 달라고 말하자,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사기를 치고 살기로 한 거다.

이제 당하지 않고, 당하게 해 주려고.

‘빌어먹을……!’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지혁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건,

‘거인?’

족히 3미터는 되는 남자가 외눈박이의 도끼날을 잡고 있었다.

거인은 말했다.

“네가 한지…… 한…… 뭐랬더라.아무튼 에릴로트 아가씨의 친구냐?”

“……예?”

에릴로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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