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 *
제너는 기운을 차렸다.
처음엔 물도 못 먹었는데, 이제는 식사도 곧잘 할 정도였다.
“마니 머거.”
여물을 옮겨주니, 제너가 내게 얼굴을 문대며 푸르르 소리를 냈다.
난 제너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뭐야. 킹갓울트라제너레이션초원을달리는야생마가 저러는 건 처음 보는데.”
몬스터 대백과에 따르면 설원마는 사람 감정에 유난히 민감했다.
공포나 살의를 가진 자에게 제일 먼저 달려드는 습성이 있었다.
반면에 긍정적인 감정엔 아주 유하게 구는 생물이다.
“나 제너 조아하니까.”
말하자 발자크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긴, 자기 반려동물을 좋아한다는데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작다고 다른 사촌들은 무시해.”
발자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킹갓울트라제너레이션초원을달리는야생마가 얼마나 잘 달리는데. 걔들이 가진 서러브레드(혈통 있는 경주마)보다 훨씬 빠르다고.”
그야 그렇겠지.
설원마는 말들 중에, 아니, 몬스터를 통틀어도 빠르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제너 이제 엄청 커지 꼬야. 아직 아가라서 구래.”
발자크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치? 발이 커서 앞으로 크게 자랄 줄 알았다고!”
‘조랑말은 크게 안 자라지만.’
정체가 설원마이니, 앞으로 엄청나게 자랄 거다.
설원마는 성체가 되면 웬만한 말이 덤비지도 못할 크기가 된다.
발자크는 큼, 헛기침했다.
“크게 자라기 전에 조금…… 태워줄 수도 있는데?”
“웅?”
“아니, 뭐, 크게 자라면 너처럼 좁쌀만 한 녀석은 타보지 못할 테니까.”
“그치만 아가는 말 타면은 위험하댔는데.”
나도 말을 타보고 싶긴 했다.
12번째 탑에서는 아예 마구간이 없었고, 공작성에선 얌전히 지내야 해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데이몬드 관할령에 오고 나선 도전해볼까 싶었는데,
“아, 아이고…….”
“아직 등자도 못 밟으시는데…….”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통에 포기했다.
‘세 살이면 말을 타기엔 한참 어린 나이지.’
제너가 지금은 다른 조랑말보다 유난히 작더라도 무리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발자크가 말했다.
“킹갓울트라제너레이션초원을달리는야생마는 특별해. 너처럼 작은 애라도 탈 수 있어.”
“어떠케?”
“마법이 걸려있거든. 마법 알아?”
알지.
판타지 세계엔 없어선 안 될 그것인데.
난 한때 호X와트에 가는 게 꿈이었다.
어쨌든 간에, 이 세계의 마법은 특별하다.
‘연금술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불의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면 장작이 필요하다는 거다.
대부분 마법사들은 가호를 담아둔 가호석에 까다로운 수식을 적용하여 마법을 시동한다.
‘그러니까 가호가 특별하지.’
가호는 아무것도 없이 발현시킬 수 있으니까.
“제너가 태어나자마자 보호 마법을 걸어놨어. 어린애가 타도 다치지 않도록.”
그런 마법은 엄청나게 까다로울 텐데 용케 했네?
내가 눈을 깜빡이자, 발자크가 신이 나서 말했다.
“리시안 공이 내게 선물로 주려고……!”
─까지 말하던 발자크가 멈칫했다.
아차 싶은지 얼굴이 티 나게 굳었다.
그야, 양아버지(데이몬드)를 독살하려 했다는 친부(리시안)의 이야기는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여긴 데이몬드 관할령이니까.
‘어린애가 그런 걸 신경 쓰느라 힘들었겠다.’
나도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유혜민일 적에 실수로라도 친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양아버지의 기분이 상할까 봐서.
“리시안 수뿌밈 발쟈쿠 사랑해써. (리시안 숙부님 발자크 사랑했어.)”
“……어?”
“그래서 다치지 말라구 마법 건 거야. 그러치?”
“…….”
발자크는 조용했다.
한참 말을 못 하고 어물쩍거리던 그 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그런 건 아냐. 원래 괴짜라고 하니까, 내 핑계로 말을 실험해본 거겠지.”
“구치만 보오 마법 어려어.”
“…….”
“구론데 열씨미, 열씨미 해써. 발쟈쿠 다치지 안키를 바라서.”
“…….”
“아푸지 마라, 다치지 마라, 아가야. 그래쓸 거야.”
내가 헤헤 웃으며 말하자, 발자크가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지?’
내가 말실수를 했나?
역시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발자크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곤 가슴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이상해.”
“웅?”
“왜 간지럽지?”
나와 발자크는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마구간에 자주 드나들어서 벼룩이 옮았나?
“약 바르까?”
“그래!”
“응!”
우리는 약을 바르러 또 달려나갔다.
* * *
발자크와 에릴로트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에릴로트가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발자크의 가슴에 약을 한 방울 톡 떨어뜨렸다.
발자크는 손가락으로 잘 문질러서 약을 흡수시켰다.
“오때?”
“아직 간지러운데.”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간지러움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특히 저 콩알만 한 게 좁쌀만 한 손을 꼼지락거릴 때는 더욱.
달릴 때 뒤뚱뒤뚱하는 것도 좀 간지럽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체 뭐가 든 건가 싶은 볼이 통실거릴 때는 최고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지?”
온실에 데이몬드가 들어왔다.
에릴로트가 들고 있는 약병과 발자크의 가슴에 발린 약을 본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밤미!”
“어디 다친 거냐.”
데이몬드가 묻자, 발자크가 대답했다.
“아뇨. 그냥 가려워서.”
“의사에게 진료는 받아봤고?”
“별거 아니에요. 벌레에 물렸나 봅니다.”
발자크는 그대로 약병을 들고 있는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약 더 줘.”
“응.”
에릴로트가 다시 열심히 약을 발라줬다.
약을 톡 떨어뜨리고 살살 문지르고 있는데, 데이몬드가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에릴로트는 주변은 신경도 안 쓴 채 집중하는 중이다.
데이몬드는 큼, 헛기침했다.
“나도 좀 간지러운 것 같은데.”
“글거. (긁어.)”
“…….”
약을 발라주는 건 어린애들한테 까지다. 성인은 혼자서도 잘한다.
에릴로트는 데이몬드 쪽은 보지도 않고, 발자크에게 물었다.
“이제 갠차나?”
“뭐…….”
발자크가 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얘는 내가 좋은가 봐.’
데이몬드 관할령에서 가장 센 건 장군인데, 나한테만 약을 발라주는 걸 보면.
“약 발라줬으니까 오늘 말을 타봐도 좋아.”
“말?”
데이몬드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에릴로트에겐 승마는 아직 무리야.”
“검은 포니를 타면 괜찮습니다.”
“보호 마법이 걸려있다는 네 말 말이냐.”
“예, 그러니까 안전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보호 마법이 걸린 작은 말이 있었지. 내가 태워주는 것도…….”
“아뇨, 제 말을 태우겠습니다.”
“내 말 쪽이 나아.”
“제 말이에요.”
“내 말이─!”
“제 말이─!”
두 사람의 시선이 파지직, 맞붙었다.
에릴로트는 그 중간에 앉아서 데이몬드와 발자크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였다.
“아가씨, 그림책이 새로 들어왔어요.”
“와─!”
에릴로트가 홀랑 뛰어나갔다.
“…….”
“…….”
발자크와 데이몬드가 부랑자의 표정으로 신나서 달려가는 에릴로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 * *
나는 하이디와 베티가 가져온 책을 얼른 촤르륵 펼쳐봤다.
‘와…….’
이번 책은 더 예쁘네.
이 세계로 와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책이 엄청 예뻐.’
귀족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 그런가.
어느 책은 검은 도화지에 금사를 수놓은 삽화를 넣고, 또 어느 책은 삽화가 아예 튀어나와 입체적으로 보였다.
얼른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하녀들이 말했다.
“책을 읽으실 거지요?”
“응.”
“어디서 독서 하시겠어요? 간식을 준비해가겠습니다.”
나는 으음, 하고 고민했다.
평소라면 온실이나 방이지만…….
‘날씨가 좋으니까 정원에서 읽을까.’
나는 책도 좋아하지만, 우리 성의 정원도 아주 좋아한다.
사시사철 싱싱한 장미가 가득 피어 있어서, 거기에 있으면 향긋한 장미 냄새가 나니까.
“정언!”
“네. 가제보로 간식을 가져다드릴게요.”
하이디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선 정원으로 나갔다.
꽃샘추위가 이제 지나가고 있어서, 낮엔 따뜻했다.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고 하얀 뭉게구름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와 내 곱슬한 잔머리를 간지럽혔다.
‘기분이 아주아주 좋아!’
가제보 벤치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책을 놓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정원사들이 하나도 없지?
요새는 일교차가 크다.
‘마도구만으로는 온도를 조절하기 어려워서 각별히 신경 쓰고 있을 텐데.’
점심 먹을 시간은 아니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정원 밖으로 정원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었다.
정원사의 안색이 흙빛이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
“이찌! (있지!)”
소리치자 뛰어가던 정원사가 나를 홱 돌아봤다.
“아, 아가씨…….”
“오디가?”
“저, 그게, 그러니까…… 호출이 있어서…….”
“누가? 아밤미? 미케란?”
“아, 아뇨…….”
저 정원사의 타이는 빨간색이다.
상급 고용인이란 소리였다.
그런데 아밤미와 미켈란이 부르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서두르지?
머뭇거리던 정원사가 말했다.
“평가 위원들의 호출입니다.”
평가 위원?
그들이 현재 데이몬드 관할령에 머무는 중이긴 했다.
근데 왜 정원사를 호출하지?
벤치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나두 갈래.”
“예?!”
“갈래.”
“아……. 예.”
정원사는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아주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정원사를 뽈뽈뽈 따라갔다.
호출했다는 곳은 아주 외진 데였다.
코너 뒤로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정원을 파보라잖아……!”
“아이구, 그게 무슨 말이래유. 마도구로 피운 꽃은 연약해서 한번 뒤집히고 나면 못쓰게 되는디요…….”
“이것들이 어디서 말대답을—”
이어서 퍽!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코너로 돌아가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이 든 정원사가 평가 위원으로 온 자하뱅 남작에게 발로 차여서 웅크리고 있었다.
“파보라면 파지 무슨 말이 이렇게—!”
퍽!
정원사를 꿇어 앉혀놓은 평가 위원의 머리에 돌멩이가 명중했다.
“악!”
비명을 내지른 자하뱅 남작이 돌멩이가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누가 이따위……! 아, 아가씨?”
“구로니까.”
“예?”
“누가 이따위 지슬 해. 주인 허라뚜 엄씨. (누가 이따위 짓을 해. 주인 허락도 없이.)”
제비 꼬리 같은 수염을 가진 자하뱅 남작이 당황해서 날 쳐다봤다.
“저, 이건……. 그…… 아니, 어리신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요슈아 도련님의 명이시니까요!”
요슈아?
아까 들은 걸로 봐선 정원을 파헤치라는 얘기인 듯했다.
요슈아가 정원을 왜 파헤치라고 해?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하뱅 남작을 쳐다봤다.
그때.
“벌써부터 주인 행세인 거야?”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돌리니, 요슈아 였다.
입매는 다정하게 말아 올라가 있는데, 눈은 차갑게 날 보고 있었다.
“저 아조씨 정언사 때려써.”
“그런데?”
“머?”
“하인들의 체벌은 여기선 당연한 일이야. 그게 내 대리인에게 돌을 던질 이유가 돼?”
아버지는 5년이나 멀리 전장에 떠나 있어서, 발자크와 요슈아에겐 봉신 중에서 보호자가 붙었다.
발자크에게 크로네츠 자작.
요슈아에겐 자하뱅 남작.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다.
‘발자크는 말을 치료하려고 이곳에 왔어. 요슈아는 왜 왔지?’
요슈아가 발자크를 위해서 이곳까지 따라왔을 리는 없는데.
형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조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슈아는 힐끗 자하뱅 남작을 쳐다봤다.
“남작은 돌아가.”
“아, 예……!”
자하뱅 남작이 서둘러 빠져나갔다.
나와 요슈아는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슥, 훑어보던 요슈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에릴로트.”
“…….”
“네가 장군의 친딸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넌 사생아야. 평민의 피를 타고난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
“…….”
“이건 부탁인데, 제발 거슬리게 굴지 마. 난 아직 평화롭고 싶거든.”
요슈아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곤 등을 돌려 나갔다.
난 멀어지는 그 애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정원사들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가씨……!”
“저런 말 듣지 마셔유. 아직 어리셔서 나오는 대로 말씀하시는 거니께.”
어려서 나오는 대로 하는 말?
‘아니.’
뭔가 이상하다.
요슈아는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앞에선 다정하게 굴고, 뒤에서 음흉한 계략을 꾸미는, 뱀 타입이었다.
그런데 요슈아가 정원사들이 다 있는 데에서 내게 그런 말을 한다고?
‘아버지 귀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