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90)

31화.

나는 한지혁을 호출했다.

병영에서 꽤나 고생했는지, 화장으로 꾸며내지 않아도 눈 밑에 다크써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한지혁은 얼굴이 해쓱하고 반쯤 얼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으윽, 꾸린내…….”

“투구 때문에 그래. 내가 요새 투구 손질을 하고 있…… 크흑.”

서러운지 한지혁이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병사들은 실전을 대비해 투구를 쓰고 훈련한다.

종일 고된 훈련을 받느라 투구엔 땀 냄새가 잔뜩 뱄을 것이다.

그런 투구를 손질하니 냄새가 안 날 수가 없지.

“나쁜 새끼들……. 돈 많이 벌면 암살자 살 거야.”

“훙년하느라 힝드러. 냉새 어쩔 쑤 엄써. (훈련하느라 힘들어. 냄새는 어쩔 수 없어.)”

“원래 투구 담당은 나 아니었거든?! 투구 손질 좋아하는 변X 새끼가 하나 있었다고. 그런데 병사들이 나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투구나 닦으라잖아!”

분장하지 않은 한지혁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힐끔 쳐다볼 만큼 매우 곱상하게 생겼다.

병사들이 싫어할 상이긴 하지.

한지혁은 엄마한테 이르는 어린애처럼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서러움을 호소했다.

“아라써. 미케란하테 파트를 바까달라구 해보께.”

“정말?”

“웅. 그 전에 넌 사란들 좀 만나구 와.

“사람? 어떤 사람?”

“니가 사기 칠라구 발판 깔아나떤 사란들 이짜나. 호쿠 경이라등가. (네가 사기 치려고 발판 깔아놨던 사람들 있잖아. 호쿠 경이라든가.)”

“만나서 뭘 하는데?”

“소뭉 좀 내. (소문 좀 내.)”

“무슨 소문을 내라는 거야?”

“요샤 저주가 가호 있눈 사란들하테 저념된다구. (요슈아의 저주가 가호 있는 사람들한테 전염된다고.)”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한지혁이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황도를 오가는 촉새들을 위주로 새 모이처럼 소문을 촥 뿌려댔다.

당연히도 촉새들은 소문을 열심히 물어 날랐고, 덕분에 소문이 퍼지는 데는 사흘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데이몬드 관할령의 저주가 전염된다!

그 증거로 성에 있던 발자크 아스트라,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두문불출.

귀족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상점 지구에 나들이를 나간 적이 있다지요?”

“예. 상점 지구에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는 귀족을 타겟으로 한 유명 제과점에까지 다녀왔다던 걸요.”

“마주친 귀족이 몇이나 될까요?”

“그 귀족이 황도에 올라오지는 않았을까요?”

원래 권력층에 문제가 생기면 방안 모색은 더 빨라지는 법.

이 소문은 귀족 회의에까지 의제로 올라가게 되었다.

“저주가 전염된다는 이야기가 도는 이상 이대로 둘 순 없습니다.”

“데이몬드 관할령을 조사해서 전염 저주의 실체를 확인해야 합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서둘러 진행해야지요.”

귀족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부셰즈 후작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황궁에서 데이몬드 관할령을 조사하면 저주 술식이 드러나는데…….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됐지?

저주를 한 것은 단순히 아스트라에 균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데이몬드와 데콘스가 치고받는다면, 아스트라의 분란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터.

고대의 돌로 귀족들을 포섭하지 못하게 된 이상, 가문이 위태롭다는 것을 보여서 제 편의 귀족들이 탈주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다.

‘애초에 목적은 데이몬드 아스트라였다.’

성인에게 가야 할 저주가 하필 아이인 요슈아에게 발현했다.

그러니 생사를 넘나들 수밖에.

‘이 정도로까지 갈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데이몬드는 아스트라 최강의 무력이었다.

그가 나서면 데콘스는 금세 무너질 것이 분명하기에, 저주 정도는 받아야 둘의 싸움을 오래 끌 수 있었다.

“정말 전염성을 가진 저주인지는 모를 일이오.”

“그러니 황실 수색대들을 보내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스트라 공작이 아스트라를 조사하는 것을 두고 보겠소?”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전염력이 있다는 저주입니다. 이마저 조사를 거부한다면 제국의 안전에 큰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셰즈 공,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평소라면 공께서 먼저 조사를 주장하셨을 터인데.”

흠칫, 제 발 저린 부셰즈 후작이 어물쩍 입을 열었다.

“어, 어찌 되었건 우리와 계파가 같지 않소.”

조사를 막는 게 우선이다.

귀족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부셰즈 후작을 바라보았다.

평소, 아스트라 공작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부셰즈 후작이었는데.

난데없이 태도를 바꾸는 게 무척이나 수상했다.

그때, 귀족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아스트라 공께서 데이몬드 관할령의 조사에 동의하셨습니다─!”

뭐라고?

부셰즈 후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손톱을 물어뜯다, 회의가 파하자마자 쏜살같이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당장 대전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알현실에서 누군가가 먼저 나오고 있었다.

아스트라 공작과 처음 보는 남자 하나.

남자는 아주 훤칠하게 생긴 미남자였다.

금발, 적안, 장신의 키, 공작과 닮은 눈빛.

‘데이몬드 아스트라로구나.’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아스트라 공.”

장딴지가 덜덜 떨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황실 수색대들이 데이몬드 관할령에 간다지요? 언제부터 아스트라가 황실의 요청에 이다지도 쉽게 순응했단 말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어떻게 해서든 데이몬드 관할령의 조사를 막아야 했다.

부셰즈 후작이 손등으로 이마에 주륵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하하, 웃고는 말을 이었다.

“손주가 저주에 걸렸다는 건 가문의 수치지 않습니까. 제가 도울 테니, 황실의 조사는─”

“혀를 길게 놀릴 필요 없다.”

“예?”

“조사는 피차 네 놈을 찢어 죽일 명분일 뿐이니.”

아스트라 공작이 무색무취의 시선으로 부셰즈 후작을 쳐다봤다.

부셰즈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오장육부가 다 쥐어짜지는 것 같은 눈빛이다.

아스트라 공작이 천천히 걸어 부셰즈에게 다가갔다.

부셰즈 앞에 선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누이가 어디까지 널 지켜줄 수 있을지 보자꾸나.”

“무, 무슨 말을, 나, 나는 오셀리아 황비의 오라비이며, 이 황실의 장자이신 1황자님의─!”

그때였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데이몬드가 말했다.

“얘기 끝났으면 제 볼일을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데이몬드가 부셰즈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셰즈가 데이몬드를 올려다본 순간.

퍽─!

힘을 실은 주먹에 얻어맞은 부셰즈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위가 제 머리를 내리치는 줄 알았다.

고통과 놀람으로 굳어진 부셰즈가 제 볼을 부여잡고 데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목덜미를 느릿느릿 주무른 데이몬드가 말했다.

“일어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부셰즈 후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사색이 된 그 시각.

황제로부터 명 받은 황실 수색대들은 데이몬드 관할령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도착하기 무섭게 저주의 매개가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정원을 살펴보았다.

황실 수색대엔 <추적>의 가호를 가진 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 마법사가 찾지 못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정원에 남은 잔여 마력을 추적한 결과, 부셰즈의 짓이라는 게 금세 밝혀졌다.

황궁 수색대의 증언 때문에 부셰즈 후작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지도 못했다.

* * *

며칠 후, 데이몬드 관할령.

나는 책을 보며 끙끙, 고심하고 있었다.

정원이 저주의 매개를 없애느라 공터가 되어버려서 새로 심을 꽃을 정하는 중이었다.

양 주먹을 머리에 올리고 열심히 고민하는 나를 보며 하이디와 베티가 싱긋, 웃었다.

하이디는 펼쳐져 있는 책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백합도 예쁘고요, 이 튤립도 좋아요.”

“제비꽃처럼 소담한 꽃은 어떤가요?”

‘아, 다 예쁜데.’

백합이나 튤립은 화려한 맛이 있을 것 같고.

제비꽃 등의 들꽃류는 귀여울 것 같고.

“아가씨께서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세요?”

하이디와 베티가 차례로 물어보았다.

난 여전히 책에 시선이 꽂혀있는 채로 대답했다.

“잔미. (장미.)”

“그럼 장미를 다시 심으시면 되지요.”

“그치만 요샤 잔미때매 아파써. 잔미 보면 기분 나빠.”

내 말에 하녀들이 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양쪽에서 날 꼬옥 껴안았다.

“사려 깊으셔라.”

“다정하셔라.”

하녀들의 콩깍지는 이제 한 50겹쯤은 되는 것 같다.

나는 흐린 눈을 뜨고 둘의 애정 공세를 버텨냈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놈은 사라졌으니까. 부셰즈 후작이 자살했거─”

“베티.”

하이디가 인상을 쓰자, 베티가 “아차차.” 하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난 괜찮은데.’

부셰즈 후작이 자살한 건 이미 한지혁에게 전해 들었다.

아스트라 직계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게 탄로 나서 겁을 먹고 자살했다나 뭐라나.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그렇게 되도록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압박한 거겠지.’

그 증거로 오셀리아 황비는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부셰즈는 후작의 이름을 인명록에서 지웠고, 아스트라에 천문학적 단위의 보상금까지 내어주게 되었다.

나 말고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압박을 눈치챈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들은 아스트라가 지독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독하긴 뭐가 지독해.’

이쪽은 어린애가 저주에 당했는데.

애한테 그런 짓을 하는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놈 때문에 심혈을 기울인 관할령 평가도 엉망이 되고.’

소란 때문에 평가 자체가 백지화되었다.

결국 예산은 동결이란 말이다.

‘뭐, 우리는 부셰즈의 보상금을 잔뜩 받았으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2세들의 관할령은 타격이 좀 있을 거다.

할아버지 습격 사건 때문에 예산이 많이 깎여서, 이번 평가에 엄청나게 공들였을 테니까.

‘이제 슬슬 전부 정리된 것 같으니까 댓글을 확인해볼까.’

하녀들이 책에 정신을 빼앗긴 틈에 난 가호를 발현했다.

금세 눈앞에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빙의했는데 흑막의 손녀였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나.

평소 즐겨 읽던 소설 엑스트라에 빙의했다.

하필이면 고아라 온갖 고생을 다 했건만, 알고 보니 내가 최종 흑막인 아스트라 공작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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