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달리아가 얼른 다가와 에릴로트의 손을 잡았다.
“저, 언니랑 화해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먼저 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에릴로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고 나서야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지난번엔 서로 오해가 있었어. 내가 널 싫어하는 건 아니─”
“꺄악!”
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
창가에서 파동이 날아와서 깨진 것이다.
에릴로트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달리아도 파열음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사람들이 모두 넘어져 있는 달리아에게 달려왔다.
달리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온 그리미에 백부가 문밖의 하인들에게 호통쳤다.
“의사! 당장 의사를 불러와!”
에릴로트가 어쩔 줄 모르고 입을 막은 체로 달리아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달리─”
“네 짓이지, 에릴로트!”
조프리가 에릴로트를 막아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뭐라고요?”
“네가 달리아의 생일파티에 온 것부터 이상했어. 일부러 구석에 자리 잡고, 달리아가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한 거야. 그렇지!”
“무슨…….”
“달리아는 착해서 네가 혼자 있는 꼴을 못 보니까. 달리아가 이쪽으로 올 줄 알았던 거야!”
에릴로트가 아니라고 해명할 새도 없었다.
저를 째려보는 사람들이 입에 칼날을 문 것처럼 날카로운 힐난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달리아의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서서히 물기가 어렸다.
달리아는 양쪽 눈가에 곧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언니…….”
“나, 나는, 난─”
변명하려는 순간, 모두가 에릴로트를 향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사라져!”
“사라져!”
“비천한 더러운 피!”
“선량한 달리아를 괴롭히는 악한!”
“사라져버려!”
손을 떨던 에릴로트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대로 에릴로트는 뒤돌아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에릴로트의 등 뒤로 화살촉처럼 모진 말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에릴로트의 걸음이 느려졌다.
바닥에 뚝, 뚝, 떨어진 눈물이 카펫을 적신다.
“바보 같아…….”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그녀가 서러운 숨을 뱉었다.
그러곤 복도에 있던 쓰레기통에 편지를 내던졌다.
툭.
편지는 통 안쪽에 맞고 쓰레기 더미 위에 떨어졌다.
[생일 축하해. 여름꽃을 닮은 너에게.]
쓰레기통 앞에 쪼그려 앉은 에릴로트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손 틈 사이로 에릴로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
“헉!”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머리칼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뭐지? 개꿈인가?’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런 장면은 소설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꿈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내가 한 편을 빼먹고 읽었나?’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빙.흑.손>의 에릴로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녜.”
말하자, 사람이 들어왔다.
세숫물이 든 트롤리를 밀고 들어온 하녀.
그녀를 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가씨…….”
본성 별관에서 지낼 때 나를 돌봐줬던 하녀인 그레타였다.
그레타는 종종걸음으로 침대 앞까지 다가왔다.
“고작 몇 개월 못 본 것뿐인데, 이렇게 쑥쑥 크셔선……!”
그레타는 “감격이에요!” 하고 훌쩍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레타의 차림새가 이상했다.
원래 그레타는 메이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잡일꾼의 옷이었다.
“그레타 옷이 왜 구래?”
“아, 담당 업무가 변경되어서요.”
“힐다눈?”
“힐다 님도요!”
원래 힐다와 그레타의 직급은 너서리 메이드(Nursery Maid)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로, 유모들을 보좌하며 일을 돕는다.
힐다와 그레타가 날 돌본 것도 그녀들이 너서리 메이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챔버 메이드(잡일꾼)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레타가 머쓱한 듯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좌천됐구나.’
아스트라에 어울리지 않게 순수하더라니…….
열린 문으로 하녀가 또 들어왔다.
들어온 그녀는 원래 힐다와 그레타가 입던 너서리 메이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어제 저녁때도 날 씻겨주고, 재워주러 왔던 하녀였다.
“자, 그럼 씻으실까요?”
하녀가 내 목에 턱받이를 둘러주고, 그레타가 가져온 세숫물로 얼굴을 박박 씻겨줬다.
“아욱!”
얼굴을 씻기는 하녀의 손이 억세서 아팠다.
그레타가 흠칫, 놀라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왜?”
“아가씨의 피부는 연약해서 살살하지 않으면 아프실 텐데…….”
하녀의 눈이 매섭게 그레타를 째려봤다.
그 하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네가 너서리인줄 알아? 아가씨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한 하녀는 날 쳐다보고 생긋, 상냥하게 웃었다.
“아프셨나요? 죄송해요. 주의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지, 손이 자꾸만 거칠어졌다.
5분도 안 되어 옷까지 다 갈아입힌 하녀가 재빨리 문을 탁, 닫고 나갔다.
거울 보자 머리가 폭탄 맞은 것마냥 너저분했다.
나는 금발에다 곱슬머리라 잘 묶지 않으면 이렇게 지저분해 보였다.
그레타가 샥, 샥, 주변 둘러보더니 내게 조심히 다가왔다.
“혹시 머리를 다시 묶어 드려도 될까요?”
“응!”
대답하니, 그레타가 얼른 내 머리를 다시 손봐줬다.
혹시 너서리 메이드가 다시 들어올까 봐 엄청나게 조급한 표정인데도, 머리를 빗겨주는 손은 아주 부드러웠다.
귀밑에 양 갈래로 머리를 곱게 땋아준 그레타가 “자.” 하며 빗을 내려놓았다.
“아주 귀여워요.”
“나도 조아.”
그레타가 헤헤, 하고 활짝 웃었다.
그 순간, 뎅─뎅─ 종이 울렸다.
아침 시간이 끝난다는 소리였다.
그레타는 얼른 밖으로 나가며 나에게 인사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타두!”
나도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그레타에게 인사해줬다.
나는 오늘도 옆으로 메는 조그만 손가방을 메고 쫑쫑쫑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는데, 내 머리를 지저분하게 묶어 주었던 너서리 메이드가 어느 방 앞에 서 있었다.
‘저긴 조프리 방인데.’
메이드가 장식 없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대화 중이었다.
“아침마다 오실 것 없이 제가 챙기면 되는데요. 역시 사라 부인의 정성은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가 없군요~”
“도련님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지. 아무튼, 늘 조프리 도련님을 살뜰히 챙겨줘서 고맙네.”
“무슨 말씀을요!”
메이드가 입을 가리며 호호호, 하고 웃었다.
대화를 듣자 하니 저 녹색 드레스의 여성은 조프리의 유모인 것 같았다.
메이드의 목소리에선 꿀이 뚝뚝 묻어나왔다.
‘아아.’
금세 상황 파악이 됐다.
조프리의 유모는 입김이 세기로 이곳에서 아주 유명했다.
황도 출신이고, 워낙 여러 귀족가에서 유모를 한 터라 너서리들한테 유모 자리를 주선해준다고 했다.
‘뭐, 나야 상관없지.’
손이 거칠면 집사에게 말해서 바꿔 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난 이번 학기를 7서열권에서 시작한 어린이다.
한마디만 해도 집사가 얼른 메이드를 바꿔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던 중에,
퍽!
“아!”
등으로 무언가가 날아와 나를 맞추고 땅으로 떨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조프리가 비식비식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신발을 내게 던진 것이다.
‘저놈이…….’
“아푸자나.”
말하자 조프리가 어깨가 으쓱 솟았다 내려왔다.
“피하지 못한 네 잘못이지.”
나는 바닥의 신발을 읏챠, 하고 주워들었다.
그리고 퍽!
“악!”
신발이 조프리의 얼굴에 명중했다.
“세상에, 도련님!”
“꺄악!”
신발이 조프리의 얼굴에서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피하지 못한 조프리 잔못이야.”
“저게……!”
조프리가 씩씩거리며 나를 향해 발을 바닥에 쾅쾅! 찍으며 걸어왔다.
그때.
양쪽에서 조프리의 목에 팔이 걸쳐졌다.
“뭐야…… 헉!”
요슈아와 발자크였다.
“잠깐 따라올래?”
“웃어, 웃어.”
양쪽에서 잡히다시피 어깨동무를 당한 조프리의 얼굴이 희멀게졌다.
쌍둥이는 조프리를 돌려세우곤 내게 말했다.
“아기는 먼저 가 있어.”
“녜!”
조프리는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가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모…….” 하고 부르면서.
조프리의 유모인 사라 부인이 허둥지둥 애들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어서 교수님을 불러오세요!”
메이드가 황급히 교수실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끌려가는 조프리를 보다가 다시 빙글, 돌아 교육실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난 초급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으음, 초급 교육실이 어디더라…….’
동쪽 복도랬나, 서쪽 복도랬나.
신관은 너무 넓어서 처음 교육실에 가는 나는 한참 헤매야 했다.
신관을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애들만 졸졸졸 따라가면 됐는데, 나 혼자 찾으려니까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다.
‘실험장을 개조해서 지어진 곳이라 확실히 구조가 복잡해.’
실험체가 탈출하지 못하게 복잡한 구조여야 하니까.
‘주말에 길을 익혀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며 걷는 중이었다.
“아!”
놀란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새카맣고 구불구불한 머리를 가진 여자애가 보였다. 많이 쳐 줘봐야 8세 정도 되어 보였다.
‘디오네라네.’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촌 언니다.
“아, 미안. 초, 초급 교육실은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라…….”
그렇게 말하고서 손가락을 꼼질대며 내 눈치를 봤다.
혹시 괜히 가르쳐 준 걸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고마어.”
말하니 디오네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으, 응.”
“언니두 초급교유씨 가?”
“맞아…….”
“가치 가자.”
나는 오도도 디오네라의 앞까지 걸어가서 손을 덥석 잡았다.
‘길 안내해줄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군.’
그러자 디오네라는 깜짝 놀라서 날 빤히 내려다봤다.
잡은 손과 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귓불이 발개져 있었다.
“그래…….”
나는 디오네라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서쪽 복도 끝에 다다르자, 커다란 문이 보였다.
경비병 둘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본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자, 먼저 온 애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들 어린애들이네.’
하긴, 초급 교육실은 원래 어린애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어, 자리가…….”
디오네라가 휙휙,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그 애의 손을 짤짤 흔들었다.
“쩌기 이써. 가치 앉아.”
“그, 그럴까…….”
디오네라는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다. 수줍은 모양이었다.
‘귀엽다.’
빈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앞에 익숙한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빙글빙글 말려있는 금발 머리의 여자애.
“리앙틴 언니다.”
내 가짜 육체 회귀제를 훔쳐서 할아버지 생신에 선물했다가 폭삭 망해버린 그 리앙틴이다.
그 애가 흠칫! 어깨가 솟았다.
내가 오는 걸 알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 같다.
‘리앙틴은 초급 교육실에 있을 나이가 아닌데.’
그러다가 일전에 리앙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성이 부족한 거야. 내가 직계들 중에 서열이 제일 낮다고 무시하는 거라고!”
딱 봐도 성적이 안 좋아서 초급 교육실에 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빙.흑.손>에서도 리앙틴의 성적은 늘 좋지 않았다.
‘공부는 잘해도 실습 성적이 매번 안 좋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마주치면 또 가시 돋친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조용하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곧 깨달았다.
‘내가 7서열권 안에 들어서 그렇구나.’
리앙틴은 서열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애니까.
어떻게든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서 서열을 올리고 싶어 할 만큼.
리앙틴이 책을 후다닥 챙겨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누가 쾅! 소리와 함께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조프리였다.
조프리를 보고 놀란 리앙틴이 다시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
‘뭐야, 조프리도 같은 교육실이네.’
조프리는 날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쉬이 다가오진 못했다.
창문 밖에서 요슈아랑 발자크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프리가 이를 악물고 남은 자리에 우당탕 앉았다.
리앙틴 옆자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입실했다.
곧 수업이 시작되어서, 창문에서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인사하고 있던 쌍둥이들도 본인들의 교육실로 떠났다.
교수는 우리에게 문제지를 한 장씩 배부했다.
“초급 교육실은 중급, 상급 교육실과 달리 각자 수준에 맞춰 개인적으로 수업을 진행합니다. 그에 앞서 여러분의 학업 수준을 확인하겠습니다.”
쪽지 시험이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맨 위에 삐뚤빼뚤 이름을 쓰고, 문제를 확인했다.
‘확실히 애들한테는 어려운 문제야.’
고대어로 된 어려운 문장을 해석하라고 하고, 세 자리 소수점 단위의 나누기 문제도 있다.
여기서 제일 큰 애가 10살이란 걸 생각하면, 문제 수준이 매우 높았다.
‘다 맞추면 좀 그렇지?’
대충 쉬운 거로 몇 개만 맞춰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험에 집중했다.
나한텐 문제 푸는 것보다도 필기구로 조그맣게 글자를 쓰는 게 더 어려웠다.
손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다 풀고 문득 조프리와 리앙틴이 있는 앞을 봤는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