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390)

37화.

리앙틴과 조프리는 교수가 안 보는 틈에 서로의 시험지를 바꿨다.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쟤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제 시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끝날 거 같은데 조프리와 시험지를 바꾼다고?

리앙틴이 조프리에게서 가져온 시험지는 거의 백지로 보였다.

리앙틴은 조프리에게 받은 종이에 얼른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은 당연히 부족했다.

몇 개 쓰지도 못했는데, 교수가 시험지를 걷어갔다.

리앙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거면 시험지는 왜 바꿔줬대?’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험지를 모두 걷어간 교수가 말했다.

“테스트 성적에 따라 그룹을 지어 수업할 것입니다. 가장 성과가 높은 그룹은 특별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 모두 열심히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이 테스트로 편성되는 그룹이 중요하다는 소리였다.

‘보다 똑똑한 애들이 모인 그룹이 더 좋은 성과를 보이겠지. 당연한 일 인걸.’

오전 수업은 테스트를 보는 게 끝이었다.

나이 어린 애들이 많은 만큼, 수업을 짧게 하는 모양이었다.

조프리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교육실을 나갔다.

다른 애들도 하나둘 빠져나갔다.

“저기……. 안 가?”

디오네라가 계속 앉아 있는 내게 물었다. 나는 “가꺼야.” 하고서 그 애와 함께 일어났다.

막 교육실 문을 넘어가려는데, 리앙틴의 유모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말씀드린 대로 하셨지요?”

“…….”

“아가씨…….”

“했어! 했다고!”

빽 소리친 리앙틴이 책상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유모는 그런 리앙틴을 끌어안고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잘하셨어요. 잘하신 거예요…….”

“나, 나,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꼭 중급 교육실로 가려고 휴식기에 하루도 안 쉬었는데……!”

“알아요, 아가씨. 다 알아요.”

내가 그들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 디오네라가 살짝 내 손을 끌어당겼다.

“가지 않을래……?”

“녜.”

나는 디오네라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우리가 복도 끝으로 걸을 때까지 리앙틴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디오네라는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슬픈 일 이써?”

“어? 아, 아니…… 그냥 리앙틴을 보니까…….”

“왜?”

디오네라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바짝 죽였다.

“조프리와는 웬만하면 엮이지 마.”

“……?”

“조프리의 아버지인 발데릭 숙부님이 무서운 분이시거든.”

“수뿌밈?”

“응. 발데릭 관할령은 가장 비옥한 토지고, 상점 지구도 근처라서 엄청나게 부흥했어. 그래서 친척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줬나 봐. 우리 관할령에도 그렇고…….”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할아버지 습격 사건 이후로, 웬만한 관할령들은 다 대폭 예산이 삭감되었다.

거기다 올해는 이런저런 재해도 많이 터졌고.

그러니 조프리의 아버지에게 돈을 잔뜩 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들은 조프리가 하는 말이면 다 들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이 곤란해지시니까…….”

7서열권도 아닌 조프리가 왜 그렇게 활개를 치나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리앙틴도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험지를 바꿔준 거겠지.’

그 애는 못되긴 했어도 자기 부모님을 아주 좋아했다.

데콘스 숙부 부부도 외동딸인 그 애를 볼 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지 않았는가.

나는 흠, 신음했다.

* * *

점심 식사 후.

애들은 신관 앞 호수에 모여서 뛰어놀았다.

식당과 가까워서 점심시간이면 늘 붐빈다고 했다.

디오네라가 벤치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저기, 초콜릿 파이 좋아해?”

“조아!”

“잘 됐다.”

그러며 그 애가 라탄으로 된 피크닉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제 손바닥만 한 동그란 초콜릿 파이 두 개였다.

파이엔 부순 견과류를 잔뜩 뿌려놔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우유도 있어!”

“언니도 요기 안자. (언니도 여기 앉아.)”

내가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자 디오네라는 매우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파이를 옴뇸뇸 먹었다.

그때, 누가 내 어깨에 턱을 걸쳤다.

“나도.”

옆을 보니 발자크가 매우 피곤한 얼굴로 내가 든 파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조금 뜯어서 입에 넣어 주자 우물우물 잘도 씹는다.

입에 넣어 준 파이 조각을 삼킨 발자크가 기지개를 켜며 내 앞으로 왔다. 요슈아도 함께였다.

“아기, 너 점심 방금 먹지 않았어?”

“발쟈쿠도 또 먹짜나.”

“나는 아직 점심을 못 먹었고.”

“왜?”

“훈련이 늦게 끝나서 지금 먹으러 가.”

그러며 그는 “이번 검술 교수는 사람을 죽인다고.” 하며 질린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콘라드에게 검술 스승이 깐깐한 편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다.

발자크가 내게 시선을 맞추다 내 옆의 디오네라를 힐끔 쳐다봤다.

“뭐야, 너도 있었어? ”

“아, 아, 안, 안, 녕…….”

너무 작아서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였다.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크게 말해.”

디오네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가엾게도 쪼꼬미 야수들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는 디오네라를 끌어안고 쌍둥이에게 말했다.

“언니 무서께 하지 마. (언니 무섭게 하지 마.)”

“내가 언제! 디오네라, 내가 널 무섭게 했어?”

“아, 아, 아, 아, 아, 아, 니!”

“…….”

“…….”

“…….”

나와 쌍둥이는 벌벌 떠는 디오네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요슈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에릴로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거든.”

“으, 으, 응.”

그래도 디오네라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발자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초급 교육실은 오후 수업에 실전 훈련을 한다면서?”

“그게 모야?”

“몰랐어? 조별로 실전처럼 훈련하는 거야. 2세들이 참관한대.”

“아밤미도?”

“응, 어제 다들 성에서 주무셨다고 하니까.”

“우와.”

“조프리 녀석은 벌써부터 신나 있더라. 조부님도 잠깐 들르신다고 하셔서. 이번에 잘 보일 생각인가 보던데.”

요슈아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심해, 에릴로트.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기권하고.”

“응!”

그렇게 말한 쌍둥이가 내게 인사했다.

식사하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줬다.

쌍둥이가 간 후에야 디오네라는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 갠차나?”

“으응.”

하나도 괜찮지 않은 표정이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여전히 얼굴이 하얗다.

내가 쳐다보니 디오네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바, 발자크와 요슈아만 무서운 게 아니라 난 사촌들이 좀…… 껄끄러워.”

“…….”

“놀림을 당했더니 불편해져서……. 난 머리가 이렇게 새카맣잖아. 어둡고, 우울해 보이니까 애들이 날 까마귀라고 부르거든…….”

우물쭈물 말한 디오네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오후 수업이 실전 훈련이라면 조 편성이 나왔겠다. 난 확인하러 갈게!”

그러며 아이가 얼른 뛰어갔다.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가야겠다.’

오후 수업을 할아버지가 참관한다면 어느 정도는 준비해두는 게 좋겠지.

호수를 나와서 신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나는 침대에 앉아서 “아고고.” 신음했다.

‘매일 놀다가 긴장해 있으니 조금 힘들어.’

그리고 무심코 옆을 봤는데,

‘……뭐야.’

침대맡 협탁 서랍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나는 어제 협탁을 만진 적이 없다.

하인들이 협탁에 넣어둘 만한 것을 널브러뜨린 적도 없었다.

유혜민일 적의 경험으로 난 이런 걸 쉽게 넘기는 애가 아니었다.

이부동생이 내 방을 뒤집고서 뭘 홀랑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뭘 훔쳐 갔나?’

그럴 린 없는데?

난 소중한 물건을 전부 손가방에 쏙쏙 넣어 다닌다.

내 몫으로 조금 남겨둔 강화석도 그렇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가져온 보석도 그렇고.

‘훔쳐 간 게 아냐.’

누구도 세 살짜리 방에 훔쳐 갈 만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넣어둔 거다.’

나는 일어나서 방을 뒤졌다.

협탁은 아니고.

서랍장도 아니고.

장식장도 아니고.

‘설마…….’

얼른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걸려있는 옷의 주머니를 하나씩 뒤졌다.

중간쯤에 걸려있던 외투 주머니를 매만지자 뭔가 뭉툭한 게 걸린다.

꺼내 보니 만년필이었다.

[조프리 아스트라]

─라고 쓰여있는 아주 호화로운 만년필이었다.

나는 이 물건을 알고 있다.

<빙.흑.손>에서도 나왔던 물건이니까.

조프리 아스트라는 서류에 서명할 적이면 언제나 품속에서 자랑스럽게 황금색의 만년필을 꺼내곤 했다.

자신의 6번째 생일을 맞아, 부친이 천문학적 금액을 들여 제작한 만년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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