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발데릭이 제 아들의 말을 듣고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만년필을 훔쳐?’
데이몬드의 딸이?
발데릭의 한쪽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그렇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시합을 망친 핑계도 되고, 저 재수 없는 데이몬드와 그 딸을 엿 먹일 수도 있었다.
발데릭이 데이몬드의 품에 안겨있는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옮겨 조프리를 냉랭한 눈으로 보고 있는 데이몬드를 쳐다봤다.
“들으셨겠지요. 형님.”
“네 아들은 개소리를 사람 말처럼 하는 재주가 있구나.”
발데릭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형님의 조카입니다.”
“넌 네 조카를 도둑으로 몰고 있고.”
“도둑이라니요. 단지 사촌 간에 오해가 없도록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게지요.”
데이몬드의 품에 안겨있던 에릴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나 아냐! 도둑 아니에요!”
“확인해 보면 알 일이지.”
에릴로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데이몬드 관할령의 사람들이 험악해졌다.
쌍둥이 또한, 흉흉한 기세로 조프리를 노려보았다.
“아기가 왜 네 만년필을 훔쳐!”
발자크가 소리치자 조프리가 제 아버지 뒤에 쏙 숨었다.
그리곤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말했다.
“그 만년필은 엄청나게 비싸고 귀한 거니까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내 만년필이 사라졌을 때 숨겨갈 만한 걸 가지고 있던 사람은 에릴로트 하나니까.”
요슈아가 천천히 조프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싹할 만큼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프리는 그런 요슈아가 저를 바라보며 다가오자 손과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눈을 데구룩 굴리며 애써 모른 척했다.
“결국 정황뿐이잖아.”
“그건…….”
“정황만으로 에릴로트를 한낱 좀도둑 취급하는 거야.”
쿠구구구.
요슈아의 주변으로 땅이 잘게 요동쳤다.
쩌적, 소리와 함께 갈라진 땅의 잔해가 공중으로 떠올라 응축됐다.
요슈아의 가호인 <압축>의 영향이었다.
응축된 잔해는 점점 커졌다.
조프리는 요슈아가 다가갈 때마다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치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발데릭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뭣 하는 짓이야─!!”
쩌렁쩌렁한 고함에 훈련장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그들을 주목했다.
단상 위에 있던 아스트라의 혈족들도 심각한 분위기였다.
발데릭이 성큼성큼 걸어가 요슈아의 멱살을 잡으려 하던 찰나,
“내 아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그 목이 더는 붙어있지 못할 것이다.”
데이몬드가 낮게 읊조리며 경고했다.
발데릭이 왈칵 미간을 구긴 채, 데이몬드를 노려보았다.
쾅─!
단상 쪽에서 바닥을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발원지를 향했다.
아스트라 공작이 싸늘한 얼굴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잘들 하는 짓이구나.”
발데릭이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아버님, 청컨대 조프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가 자신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떠밀었다.
조프리에게 혈족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조프리가 쭈뼛거리는 틈에 에릴로트는 데이몬드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거진말! 조프리 거진말쟁이야! (거짓말! 조프리 거짓말쟁이야!)”
조프리는 울컥, 에릴로트를 노려보곤 곧장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에릴로트가 제 만년필을 훔쳐 갔어요! 그래서 저는 시합에 집중할 수 없었고요! 그러니까 이번 시합 결과는 엉터리예요!”
“너희는 말의 무게를 아느냐.”
공작의 낮은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움츠린 조프리가 웅얼웅얼 대답했다.
“아, 압니다…….”
“정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그게…….”
발데릭이 겁먹어서 움츠린 아들에게 속삭였다.
“무엇하느냐.”
“저어, 저…….”
“거짓이 아니잖아. 하면 말씀드려야지.”
“…….”
조프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게 이렇게까지 된다고?’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아냐. 일이 잘못될 리 없어.’
메이드는 분명히 만년필을 그 계집애의 방에 잘 숨겨놨다고 했다.
원래는 교수에게 일러바쳐서 성적을 망칠 셈이었지만,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
‘재수 없는 저 계집애를 영영 쫓아내는 거야.’
조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당당히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발데릭이 소리쳤다.
“보십시오. 사실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에릴로트도 입을 열었다.
“나 도둑 아니에요. 까마기하테 맨세해! (나 도둑 아니에요. 까마귀한테 맹세해요!)”
에릴로트가 단상 위 깃발에 새겨진 아스트라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조프리는 무엇을 걸 수 있느냐.”
발데릭은 아스트라의 문양을 가리키는 맹랑한 계집아이를 보고 울화가 치밀었다.
저 꼴이 마치 데이몬드의 어렸을 적을 보는 것 같았다.
발데릭은 제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제 관할령의 절반을 걸고 맹세합니다.”
“……!”
“……!”
“……!”
혈족들이 모두 놀라 발데릭을 쳐다봤다.
‘데이몬드에게 그리 열등감을 가지고 있더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오는 걸 보면 정말로 에릴로트가 만년필을 훔친 게 아닐까.’
사람들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에릴로트를 쳐다봤다.
에릴로트가 나서려는 순간, 데이몬드가 한쪽 팔로 아이를 가로막았다.
그가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관할령 전부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발데릭의 입매가 비틀렸다.
데이몬드 관할령의 땅 자체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의 군이라면 말이 다르다.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가진 정예병들.
그들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이 아스트라 최고로 비옥한 땅과 최강의 군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차기 가주가 정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발데릭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공작은 드뷔시 자작에게 명했다.
“에릴로트의 방을 조사해라.”
“예.”
* * *
본성의 고용인들이 에릴로트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 수업에 들고 나간 가방부터 서랍, 욕실과 드레스룸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검사가 이뤄졌다.
조프리는 방문 앞에 선 에릴로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죽었어.”
“…….”
“데이몬드 관할령은 너 때문에 망하는 거야. 알아?”
내 만년필을 가져갔다는 증거는 곧 발견될 것이다.
그러면 저 계집애가 울고불고하며 자지러지겠지?
이번 시합은 백지가 되고, 계집애는 쫓겨날 거다.
조프리는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발데릭도 무감한 표정의 데이몬드를 힐끗 보곤 비웃었다.
그때, 조사를 마친 집사가 방에서 나왔다.
발데릭이 데이몬드에게 말했다.
“그나마 있던 관할령까지 잃으시면 이제 어찌하시려고……. 그래, 집사는 어서 결과를 형님께 말씀드려라.”
“만년필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만년필이 발견되지 않았…… 뭐?!”
발데릭의 얼굴은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든 곳을 뒤져봤지만, 만년필은 없었습니다.”
“헛소리!”
발데릭이 집사를 확, 밀치고 에릴로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시트를 모두 잡아끌어 내던지고,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열어젖혔다.
책상에 있던 펜통까지도 거꾸로 들어서 와르르 쏟아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조프리의 만년필은 발견되지 않았다.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 조프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넣어놨다고……!’
조프리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드레스룸에 있던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전부 다 뒤집어 보았다.
그거로도 모자라 옷을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에게 안겨서 난리 통이 된 방 안으로 들어온 에릴로트는 아무도 모르게 씩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 * *
‘내가 네 만년필을 아직까지 내 방에 둘 줄 알았냐?’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조프리의 비열한 성격에 시합에서 지면 또 변명할 것 같았다.
‘거기에 만년필은 딱 좋은 핑곗거리지.’
그래서 만년필은 잘 꼭꼭 숨겨두고, 시합에 나선 것이다.
‘생각 외의 소득도 있었고 말야.’
조프리가 나를 범인으로 지목한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거 잘만 하면 저 못된 부자도 혼내주고, 이득도 한몫 챙길 수 있겠는데?’
그래서 판을 더 키운 거다.
“거진말! 조프리 거진말쟁이야! (거짓말! 조프리 거짓말쟁이야!)”
─라는 말로 자극해서.
조프리는 예상대로 할아버지에게 내가 만년필을 훔쳐 갔다고 말했다.
거기서 난 아스트라의 상징인 까마귀를 걸고 맹세했다.
그러면 조프리도 무언가를 걸 테니까.
“제 관할령의 절반을 걸고 맹세합니다.”
발데릭이 한 말을 떠올린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관할령 절반이라니. 땡잡았다!’
발데릭 관할령은 부유하기로 유명하다.
가져올 수만 있으면 앞으로 우리 관할령은 탄탄대로란 말이지.
모든 조사가 끝나고, 집사와 아버지는 보고하기 위해 본성으로 출발했다.
그 모습을 본 발데릭이 사색이 되어 그들을 쫓아갔다.
“이, 이봐!”
목소리가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조프리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흉흉한 눈으로 조프리를 보던 쌍둥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기, 우리도 가자. 가서 구경해야지.”
“가자. 에릴로트.”
나는 쌍둥이 손을 잡고 뽈뽈뽈 방을 나섰다.
부지런히 걸어서 도착한 본성의 대회의장.
발데릭이 얼마나 급히 들어간 건지 회의장의 문도 안 닫혀 있었다.
문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발데릭이 보였다.
“아, 아버님, 저는 그저 제 아들을 믿은 것뿐입니다.”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두 손을 모으고 애걸하고 있었다.
“아비가 자식을 믿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오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조프리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사지를 벌벌 떨었다.
제 아버지의 꼴을 보고 이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났나 보다.
“조프리, 이놈! 뭐 하고 있어!”
발데릭이 꽥, 소리치자 조프리가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조부님. 잘못…… 잘못을……!”
“내가 받아야 할 사과이냐.”
할아버지의 말에 발데릭과 조프리의 어깨가 흠칫 솟았다.
“에릴로트를 들여라.”
쌍둥이가 나를 살짝 밀어줘서 나는 쫄랑쫄랑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던 드뷔시 자작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리에 앉자, 할아버지는 조프리 부자를 쳐다봤다.
내게 사과하라는 의미였다.
발데릭의 얼굴이 금세 모멸감으로 달아올랐다.
평민의 피가 섞여서 ‘더러운 피’라고 부르던 내게 고개를 숙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는 거다.
이를 악문 발데릭이 조프리에게 낮게 읊조렸다.
“사과해라.”
“예?! 아, 아버지……!”
“어서.”
제 아버지가 짓씹듯 말하니, 조프리는 부들부들 떨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오해했어…….”
“…….”
“……미안해.”
“응!”
나는 해맑게 말했다.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드뷔시 자작이 물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간할령 반 주꺼니까.”
“……!”
“……!”
조프리 부자가 사색이 되어 에릴로트를 쳐다보았다.
발데릭이 왈칵, 소리쳤다.
“사과했지 않으냐!”
“구치만 수뿌밈 나 도둑 아니면 간할령 주기로 해써요.”
“……!”
“에리로트 슬펐지만 참아써요. 약속이니까.”
발데릭이 벌떡 일어났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고작 이런 일로 관할령의 절반을 내줘야 한다니요!”
나는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하부지 앞에서 한 약속 지켜야 하지요?”
나는 일부러 ‘할아버지의 앞에서 한 약속’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가주의 권위 앞에 서약한 거잖아.’
그 서약이 깨지는 건 가주의 권위가 실추되는 일이다.
심지어는 그가 맹세하는 것을 아스트라의 직계들 대부분이 목격했다.
사소한 일이라고 넘어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아, 사소하니 넘어가 주시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걸 선례라고 부르는 거고.
할아버지는 발데릭을 빤히 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발데릭 관할령의 지도를 가져와라.”
“아버님……!”
발데릭이 절규하듯 소리쳤으나,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콘라드가 가져온 지도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쿡, 쿡, 지점을 찍었다.
“요기서부터 요기까지!”
딱 노른자땅만 가리키는 나를 보고 드뷔시 자작은 허헛, 웃음을 터뜨렸다.
친척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저마다 수군거렸다.
“데이몬드 관할령에 저 땅이 흡수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맙소사. 데이몬드 관할령엔 무슨 호재가 이리 많단 말인가. 꼭 에릴로트가 성에 들어온 이후로 그렇군.”
“행운의 상징인가…….”
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 악마처럼 웃었고, 아버지는 그런 날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 * *
나는 회의장을 나왔다.
발데릭과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땅 얘기를 하기 위해 남았다.
어느새 해가 다 졌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고용인의 복장을 한 사내가 걸어왔다. 한지혁이었다.
한지혁이 스쳐 지나갈 때 무언가를 건네서, 나는 그것을 가볍게 받았다.
[조프리 아스트라]
조프리 부자가 그렇게나 열심히 찾던 만년필이었다.
나는 만년필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휙, 돌렸다.
그리고 제 2관문에 있는 바늘개에게 던져줬다.
주식이 철이라는 바늘개는 만년필을 아주 맛있게 아그작, 먹어 치웠다.
“으흠, 음, 흠.”
난 콧노래를 부르며 신관의 내 방을 향해 폴짝폴짝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