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390)

46화.

* * *

나는 복도에 쪼그려 앉아서 무릎에 턱을 괴고 있었다.

‘막상 갈 데가 없어.’

디오네라는 날 5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때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책이라도 가져올걸.’

알렉시스, 저 얄미운 놈을 주겠다고 짐을 바리바리 싸 오느라 책 한 권 넣을 곳이 없었다.

수감자 행색의 교관, 간수 행색의 교관들이 날 힐끔힐끔 쳐다봤다.

암만 훈련소라도, 감옥인 척하는 곳인데 내가 너무 대놓고 있었나 보다.

지나가던 수감자 행색의 아이가 날 보고 멈춰 섰다.

“어? 그 아가씨네.”

내가 처음 이그리츠 훈련소를 찾아왔을 때, 단장(방금 나와 대화한 간수 복장의 사내)과 함께 있던 아이다.

아이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렇게 보니까 엄청 어려 보이네.

알렉시스 또래로 보였다.

“누구?”

물어보니까 그 애가 빙긋 웃었다.

“종자요.”

종자란, 기사의 곁에서 심부름하며 검을 배우는 사람이다.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나?’

“아기인데.”

그 애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누가 누구더러 아기라고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천재거든요. 루카라고 해요.”

“안넝.”

“단장님 기다리세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요?”

“알레시스가 나가라고 해서 시간되길 기다리고 이써.”

“우와, 되게 심심하시겠네. 체스 둘 줄 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가 웃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같이 가세요. 제 방에 체스가 있어요.”

그렇게 말한 루카가 주변을 둘러봤다.

“너희도 갈래?”

그러자 코너 뒤에서 남자애들 얼굴이 뿅, 뿅, 뿅 튀어나왔다.

“치사해 죽겠네. 내가 말 걸고 싶었는데.”

“귀족 영애라면서 우리 같은 애들한테 대답해주네.”

“야, 우리도 기사가 될 거야.”

“형들 말이 여기 기사님들을 모시는 한 글렀다던데.”

그 아이들은 저들끼리만 떠들고 내게는 못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루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 부푠하면 시러. (나 불편한 거면 싫어.)”

“설마요. 이렇게 귀여운 영애님을 누가 불편해해요.”

허리를 조금 숙여서 나에게 얼굴을 기울인 루카가 씩 웃었다.

‘되게 대화하기 편한 애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고양이상의 호감형 외모.

크면 되게 인기 많을 스타일이었다.

“아가씨는 저 애들이 곁에 와도 괜찮으시겠어요?”

“웅.”

루카가 고개를 까딱하며 애들에게 말했다.

“와도 된다고 하셔.”

애들이 쭈뼛쭈뼛하며 다가왔다.

나도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나는 루카를 포함한 4명의 남자아이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우와…….”

“와…….”

애들이 자꾸 나를 보며 감탄해서 나는 좀 당황스러워졌다.

루카가 쿡쿡, 웃으며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귀족 영애는 처음 봐서 그래요.”

“종자자나?”

종자는 기사들의 잔심부름을 하느라 귀족 저택에서 지낼 거다.

“저희는 다 고아들이거든요. 부셰즈 장원에 있는 고아원에서 지냈는데, 불이 나서 있을 데가 없어졌어요.”

“…….”

“그런 저희를 이 훈련소 기사님들이 거둬주신 거고요.”

“…….”

“뭐, 정말 기사가 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루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루카의 방은 가까웠다.

내게 테이블의 한쪽 의자를 내준 그가 체스와 시계를 가져왔다.

직접 깎아서 만든 나무 체스판과 나무 말이었다.

남자애들 중 하나가 말해줬다.

“이거 루카형이 만든 거예요. 손재주가 좋아서. 우리 연필도 형이 다 깎아줘요.”

애들이 루카를 아주 잘 따르는 모양이다.

루카는 남자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웃는 모습이 아주 청량한 느낌이었다.

‘음, 이런 애들이 한국에서 환생하면 아이돌을 하는 거구나.’

아이돌 상이라고 생각했던 한지혁이 머릿속에서 쓱싹 지워졌다.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루카의 실력은 훌륭했다. 시야가 넓다고 해야 하나.

체스는 귀족의 전유물 같은 거로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나 보다.

‘이 정도면 공작성에서 제일 체스를 잘 두는 요슈아랑 붙어도 되겠다.’

내 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여기다 두면 퀸이 잡힐 테고, 저 쪽에는 룩이…….’

시간은 똑딱똑딱, 계속 흘렀다.

내 턴이 끝나가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퀸을 뒤로 물려서 보호했다.

하지만 두고 나자마자 “으.” 하고 신음했다.

‘나이트로 잡히는 위치에 뒀네.’

체스를 잘 두는 루카라면 바로 치고 들어올 만한 허점이다.

질 게 뻔해져서, 나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루카가 나이트가 아닌 비숍을 움직였다.

‘어?’

몰랐나?

아닌데, 아까 힐끔 나이트를 쳐다봤는데.

루카가 아쉬운 척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 나이트로 잡을 수 있었네.”

‘봐줬으면서.’

여기 애들이 다 루카를 잘 따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한참 체스를 두던 때.

“아얏.”

체스 기물을 만지다가 소리쳤다.

나무 거스러미에 찔렸는지 손가락이 따끔했다.

루카가 얼른 체스판을 밀어두고 내게 다가왔다.

“어디 저한테 보여─”

루카가 말하던 찰나,

“에릴로트.”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알렉시스가 보였다.

“다쳤어?”

“……쪼끔 찔려써.”

“봐도 돼?”

아까는 가라더니?

하지만 저렇게 어린 애한테 투덜거려봐야 뭐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웅.”

알렉시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펼쳤다.

“피는 안나. 돌아가서 약을 발라.”

“…….”

“가자. 앞까지 데려다줄게.”

그러면서 알렉시스는 날 기다리듯이 문 앞까지 먼저 나가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저 똥고집.’

소설을 볼 때도 고집 세다 싶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까 정말 쇠심줄이다.

나는 루카랑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이써.”

애들이 아쉬운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나는 알렉시스랑 복도를 걸었다.

“나한테 돈 쓰지 마.”

“어?”

알렉시스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놀고 있을 정도면 돈을 많이 썼겠지. 이 장원의 주인이라니까 뭐든 할 수 있을 테고.”

꽁꽁 잠겨있는 정문 쪽으로 가자, 간수(인 척하는 단장)가 막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말했다.

“가.”

“…….”

“다시 여기 오지 말고.”

“그러케 나 미어?”

“오지 말라면 오지 마. 너는 밝은 데서 살아야 하니까.”

“…….”

“이렇게 어두운 곳에 오지 마.”

나는 알렉시스를 빤히 쳐다봤다.

‘얘를 어쩌면 좋아.’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게 가엾더니, 실제로 보니까 더 그렇다.

“또 오꺼야.”

“오지 말라니까…….”

“알렉시스 있눈 곳 하나도 안 캄캄해.”

“…….”

“또 바.”

난 손을 붕붕 흔들고 간수에게 말했다.

“이제 갈래.”

“예.”

나는 단장과 함께 문을 나섰다.

등 뒤로 알렉시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 * *

디오네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언니 고마어.”

성 앞에서 말하자 디오네라가 얼른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도 상점 지구에서 즐거웠어. 어머니께 드릴 선물도 사고! 아, 에릴로트 것도 샀는데…….”

그러며 디오네라가 내게 스케치북을 건넸다.

평범한 스케치북보다 종이가 훨씬 많았다.

“겨울 휴식기는 길잖아. 그거면 겨울 동안 쓸 수 있을 것 같았어!”

디오네라가 쑥스러운 듯 헤헤 웃어서 나는 스케치북을 끌어안았다.

‘참 상냥하다니까.’

“그럼 에릴로트는 들어가! 나는 마차에서 짐을 옮기는 걸 보고 갈게.”

“응.”

디오네라와 인사한 후에 복도를 걸었다.

“아가씨.”

등 뒤에서 콘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홱, 고개를 돌리자,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외출하셨던 건가요?”

“녜. 디오네라 언니가 조써요.”

스케치북을 내밀며 말하니 콘라드가 잘 되었다면서 웃었다.

“콘라드 어디가?”

“유물고에 갑니다.”

“유무고……?”

“예. 유물들을 모아둔 곳이죠. 원로 회합의 마튀아디 백작님의 생신이셔서요.”

아, 할아버지가 유물을 좋아하는 마튀아디 백작에게 뭐 하나 던져주라고 했구나.

“아가씨는 한 번도 안 가보셨는지요?”

“녜.”

“나중에 수업하실 때 보시게 될 겁니다. 역사 수업에서 열람 요청이 종종 오곤 해서요. 가보시겠어요?”

곧 역사 수업이 있으니 한 번쯤 보고 올까. 딱히 할 것도 없고.

“녜.”

나는 콘라드와 함께 2층 복도 끝으로 향했다.

하인들은 벌써 유물 창고를 열어서 정리 중이었다.

콘라드가 가져온 목록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주화는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저게 고대 주화였구나.

주화는 동그란 것만 봤는데, 특이한 모양이다.

면이 볼록하게 오른 삼각형의 형태였다.

콘라드가 테이블 위에 목록을 올려두고, 고대 주화의 상태를 살폈다.

“깨끗한 것들로 모아둬라. 그 호리병도…….”

콘라드가 하인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유물들을 구경했다.

‘유물은 왜 이렇게들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성물처럼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겐 그저 장식품 같은데, 금액이 천문학적 단위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콘라드가 내려놓은 목록을 봤다.

성물과 유물이 함께 기재된 목록이었다.

성물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치. 역시 성물이 좋아.’

‘제단장의 팔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담아둔다니 신기하네.

이런 것도 아스트라에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뒷장을 넘겼다.

성배 그림이 있었다. 성물로 체크까지 되어있다.

“콘라드.”

“네, 아가씨.”

“여기 왜 가이표야? (여기 왜 가위표야?)”

이 성배만 가위표가 되어있다.

“그건 사라진 가보라서요. 선대 시절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가보? 그런 게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기에 고개를 기울이며,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성배였다.

‘어디서 봤더라…….’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별안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

‘어? 이거……!’

내 방 지하에서 본 성배잖아?

보석이 다 떨어지고, 엄청나게 녹이 슬어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이게 없어진 가보라고?

“이거 몬데?”

“‘진실의 성배’라고 부릅니다. 그릇된 힘을 사라지게 하는 성물이라고 합니다.”

‘그게 그런 힘이 있어?’

방에 가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나는 그림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나 이제 재미엄써. 갈래.”

말하자, 콘라드는 빙그레 웃었다.

어린애가 보기엔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표정이다.

“예, 좋은 저녁 되십시오.”

“안넝.”

그렇게 말한 나는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꼭 닫고, 잘 닫혔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한 다음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미리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숨겨둔 랜턴을 챙겼다.

그리고 지하창고 문이 열리는 버튼을 달칵, 눌렀다.

랜턴을 밝히고 지하창고로 천천히 들어갔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여느 때처럼 성배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 성배를 손에 쥐었다.

들고 온 랜턴으로 성배를 가까이 비춰보았다.

‘그림에서 본 성배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망가져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만약 이게 진짜 그 성배라면…….’

생각하자 눈이 절로 반짝인다.

활용처가 무궁무진하잖아!

그릇된 힘이란 건 보통 저주를 말한다.

저주를 파훼하는 도구라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권력이 될 것이다.

‘확인해보자.’

성물은 마력과 공명한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마력을 끌어모아 성배에 서서히 흘려보냈다.

“…….”

지하창고는 잠잠했다.

‘복제품인가? 뭐야?’

하긴, 복제의 가호석도 있었지.

유물, 성물의 복제는 흔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 성배를 이런 꼴로 보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싱거워진 난 성배를 다시 내려두고 계단 위로 쫑쫑쫑 올라갔다.

사용한 랜턴을 다시 드레스 룸 안에 넣어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가씨, 언제 귀가하셨어요?”

“거기 계셨어요?”

침실 쪽엔 하녀들이 있었다. 힐다와 그레타였다.

흠칫한 난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 나 방금.”

“저희가 시간을 잘 맞춰왔네요.”

드레스룸에서 나온 걸 특별히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힐다와 그레타는 내가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레타가 가져온 물그릇에 손도 잘 닦았다.

“식당에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 오늘 메뉴는 어떤 게 좋으세요?”

“나, 고기가 조…… 윽!”

갑자기 현기증이 찾아왔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나는 헉, 허억,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아찔해진다.

머리가 빙빙 돌고 귓속엔 이명이 울려 퍼졌다.

‘왜 이러지? 성배 때문인가?’

너무 욕심부렸다고, 벌 받나?

“아…….”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시야가 좁아졌다.

마지막 기억은,

“아가씨!”

“꺄악! 의사!”

─기겁하여 소리치는 하녀들이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땐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여러 번 이런 감각을 느껴본 난, 바로 깨달았다.

'또 꿈이다.'

꿈을 대체 몇 번을 꾸는 거야.

이제는 알겠다.

‘성배에 닿을 때마다 에릴로트의 꿈을 꿔.’

이건 개꿈이 아니란 뜻이었다.

에릴로트는 감옥 안에 있었다.

익숙한 것으로 보아 공작성의 지하 감옥이다.

그녀는 체념한 듯 힘없이 벽에 기대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궁금했지만, 에릴로트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늘은 어떻지? 죽기 전에 협력할 생각이 드느냐?”

목소리마저 일그러져 들린다.

알 수 있는 건, 말하는 이가 성인 남성이라는 것 정도였다.

에릴로트는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체념해서 힘이 빠진 것과는 다른 감각이 느껴진다.

생각이 제어되지 않는 몽롱한 기분.

그렇게 느꼈을 때, 남자가 말했다.

“얼마 안 남은 모양이군.”

‘이것도 소설엔 나오지 않는 장면이야.’

남자는 쯧, 혀를 찼다.

그가 돌아가려는 듯 몇 걸음 멀어졌을 때였다.

“내…… 인생을…… 얼마나 휘저은 거야……?”

에릴로트가 힘겹게 말하자, 남자는 픽 웃었다.

“휘젓다니. 그저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지.”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 다고.”

목소리가 금세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고도 감흥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뭣 하러 그런 가호를 가지고 태어나. 거슬리게.”

‘그런 가호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에릴로트는 가호가 없는 무능력자이지 않았던가?

물어볼 새도 없이 남자는 옥사를 떠났다.

시야가 점점 희뿌옇게 변한다.

남자의 말처럼 에릴로트는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소설에선 사형을 당하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타닥, 탁!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빨리 좀 해봐!”

“서두르고 있잖아!”

두 명이 옥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날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야! 에릴로트! 정신 차려!”

“에릴로트. 의식을 잃어선 안 돼.”

뿌옇던 남자들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적발과 검은 눈.

금발과 푸른 눈.

‘……발자크, 요슈아.’

“미안하다고 못 했단 말야……. 다 네 짓인 줄 알았단 말야!”

“정신 차려봐. 치유사에게 데려갈 때까지만─”

그러나 두 사람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에릴로트의 몸에선 점점 힘이 빠져갔다.

이윽고, 그녀는 두 사람의 품에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에릴로트─!”

비통한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그 순간,

‘끄악─!’

내 혼은 튕겨져 나오듯 에릴로트의 육신에서 벗어났다.

이어서 에릴로트의 몸에선 붉은빛이 빠져나왔다.

천지가 요동치며 세상이 어그러진다.

빛무리가 내게 밀려들어서, 난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이고, 딱해라. 출산 중에 남편이 죽었다며?”

—병원이었다.

그것도 원래 세계의 병원 말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생아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으로 보아 산부인과인 듯싶었다.

그런데 어느 아이 앞에 에릴로트가 죽기 직전 흘러나왔던 붉은 빛이 고여있었다.

나는 무심코 요람에 붙은 아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름을 본 순간, 헛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이의 이름표에 쓰여있는 건…….

[유혜민]

─내 이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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