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세상이 암전되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빙의가 아니고 회귀였어.’
개꿈도, 성배가 보여준 꿈도 아니고, 내게 있던 내 기억.
어째서 이 일을 기억하지 못했는지는 짚이는 게 있었다.
‘저주를 풀어준다던 성배.’
저주를 받은 거다.
성배가 내 저주를 풀어주어서 기억이 돌아온 것이고.
내 안에 남았던 저주들이 조금씩 녹아 내려갈 때마다 그 자리를 기억이 채웠다.
주변은 온통 영화 필름처럼 잘린 기억들 천지였다.
필름이 눈앞으로 촤르르 펼쳐진다.
그 앞을 걸어갈 때마다 몇 가지 장면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들어왔다.
“에릴로트. 이 아이의 이름은 에릴로트라고 해주시오. 어미가 미안하다고, 너무나 미안하다고 전해주시오.”
“…….”
갓 태어난 내 어깨에 올라온 손.
손이 닿은 부분부터 쇠사슬 같은 문양이 펼쳐진다.
태어나자마자 저주에 당한 것이다.
가호를 발현할 수 없도록.
“너지. 네가 발자크의 물에 마비제를 썼지.”
“아니라니까……! 난 그냥 발자크가 목이 말라 하길래 내 물을 나눠준 거야!”
“됐어. 저 녀석이 준 물을 그냥 마신 내가 멍청했으니까.”
발자크, 요슈아와 사이가 틀어진 건 모두 오해 때문이었다.
시합 전날, 발자크는 마비제를 먹는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시합에 나갔다가 조프리의 검이 어깨를 꿰뚫었다.
쌍둥이는 내가 발자크에게 건넨 물에 마비제가 들어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억울했는데, 정말로 억울했는데…….
‘누가 내 물에 마비제를 타 놨었던 거야.’
[곧 만나러 가마. 생일을 축하한다. 에릴로트.]
아버지가 죽는 당일 내게 보냈던 편지였다.
이제 돌아가니 마음껏 표현해도 2세들에게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편지는 내게 도착하지 못했다.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쳐들어온 적군.
적과 마주한 순간, 아버지의 저주가 발현되었다.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검에 찔려서 죽어갔다.
“드뷔시 자작의 거처를 발설한 게 너이냐.”
“저, 저는…… 전, 우리 성의 행정관이어서……! 모습을 바꿨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멍청한……! 어떤 행정관이 직계에게 가신의 위치를 묻는단 말이냐!”
나는 할아버지에게 예쁨 받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분장한 세작의 꼬임에 넘어가 드뷔시 자작의 위치를 노출 시켰다.
그 탓에 드뷔시 자작은 사망했고, 할아버지는 날마다 새하얀 얼굴로 창밖만 응시했다.
이 모든 장면이 글자가 되어 날아들었다.
나를 기준으로 글자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그리고 나를 지나쳐 날아가 서로 조합되어 문장이 만들어졌다.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었고, 문단이 모여 소설이 됐다.
소설이 된 그것은 거대한 스크린 속으로 날아가 안착했다.
그리고…….
<에릴로트 아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