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390)

50화.

할아버지가 흠, 헛기침하고 말했다.

“황도 아카데미도 나쁘진 않을 테지만, 내 지인이라고 해서 갈 필요는 없어.”

“음……. 저도 사실 혈족 교육이 좋아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드뷔시 자작님은 항상 아이들이 자주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좋은 방안을 모색해주시잖아요.”

나는 부장님의 혼을 쏙 빼놨던 열정적인 아부의 기술을 발휘했다.

가신들이 동시에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드뷔시 자작께서요? 슬하에 자식이 없으시니, 이리 훌륭한 교육자이신 줄은 또 몰랐습니다.”

드뷔시 자작이 환하게 웃었다.

평소에도 잘 웃는 사람이긴 한데, 오늘은 입꼬리가 약 15도 정도 더 올라가 있었다.

‘좋아. 드뷔시 자작 환심은 샀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또 아무리 좋은 아카데미라 한들 할아버지의 밑에서 배우는 것보다 훌륭한 것은 못 배울 테고요.”

가신들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동조했다.

“제 손주는 언제 저런 말을 해줄까요.”

“공작님께서 복이 많은 것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혈육 복까지도 좋으신지.”

좋은 방청객들이야!

* * *

나는 할아버지의 본성을 나와서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고.’

불꽃 손바닥 비비기를 했더니 현타와 함께 피로가 밀려온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데 통신석(통신의 가호석)이 반짝였다.

통신을 연결했다.

[어찌 되셨습니까!]

[아가씨!]

“기둥은 우리가 안 고쳐놔도 된대. 장틸 백작 건도 드뷔시 자작이 연락해본대.”

[끼얏호─!!]

[이야으앗호─!!]

통신석에서 서류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난다.

가여운 아저씨들.

[그럼 이제 돌아오십니까?]

“할아버지랑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어.”

[예. 오시면 푹 쉬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고 고용인들께 언질 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통신이 끊어졌다.

나는 통신석을 부드러운 천 주머니에 고이고이 잘 집어넣었다.

엄청 비싼 거니까.

가호석을 가득 넣은 마차보다 비쌌다.

“어, 에릴로뜨 톤신한다! (어, 에릴로트 통신한다!)”

호숫가로 네 살 먹은 친척 남동생이 뒤뚱뒤뚱 걸어왔다.

“안녕, 아르망.”

“톤신해따! 안 대는데, 안 대는데!”

아르망의 유모가 얼른 달려와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에릴로트 아가씨께선 상급교육실로 가시면서 통신 허가를 받으셨어요. 통학 교육으로 전환되셨고요.”

그렇다.

나는 상급교육실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혜택이 생겼다.

1. 통신 허가

2. 기숙 교육이 아닌 통학 교육

3. 월 4회 필수 통학. 그 외에는 과제로 대체 가능.

‘사람은 뭐든 진급하고 볼 일이라니까.’

나는 아르망의 뺨을 톡, 두드렸다.

“통신하고 싶어?”

“웅! 엄마…….”

“잠깐만이다?”

“와─!”

아르망은 신이 났고, 아르망의 유모는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아르망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숙부의 관할성으로 통신을 연결해줬다.

“도련님, 너무 그렇게 꽉 쥐시면 안 돼요.”

“아바지! 아바지!”

[오오, 아르망이냐!]

통신 중에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서 아르망의 모자가 날아갔다.

아르망의 유모는 통신석을 부숴버릴 기세로 쥐려는 아르망의 손을 잡고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르망을 보고 있어. 내가 가지러 갈게.”

저 통신석이 얼만데.

아르망은 흥분했을 때 어린이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애가 아니다.

모자는 꽤 멀리 날아갔다.

나무 뒤편까지 가서 나는 종종걸음으로 모자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주우려는데…….

“오.”

나무 그늘에 앉아있던 남자애가 날 쳐다봤다.

갈색 곱슬머리에, 뺨엔 여드름이 잔뜩인 깡마른 남자애였다.

‘누구지?’

직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방계도 아니었다.

고작해서 13-15살쯤?

어린애가 성에 올 일이 뭐가 있지?

“난 포슬로니 칼데레. 넌 누구야?”

‘멍청이로군.’

공작성에 있는 아이가 누구겠는가.

그런데 대뜸 말을 놓는 걸 보니 정말로 멍청이였다.

난 아르망의 모자를 주워서 일어났다.

“에릴로트 아스트라.”

“아스트라? ……아스트라?!”

눈이 동그래진 남자애를 두고 빙글, 돌아 걸었다.

그리고 아르망에게 모자를 가져다주자, 유모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혔다.

“있지.”

“네, 아가씨.”

“저쪽에 내 또래 남자애가 있던데. 칼데레라고 했어.”

“아……. 칼데레 백작가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부친이 아스트라에 영지를 넘기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나 봐요.”

“할아버지는 가신들과 다른 일로 회의 중이던걸?”

그런 일이 있다면 백작과 대화를 해야 할 텐데.

“말이 영지지, 시골에 있는 조그만 땅이라……. 칼데레 백작은 본인 영지에서만 살아서 시류를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아르망의 통신이 끝이 났다.

나는 아이가 돌려준 통신석을 주머니에 잘 넣어두고, 본성으로 돌아왔다.

마침, 딱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 * *

저녁 식사는 할아버지와 가신 몇, 그리고 그리미에 백부님이 함께였다.

“오랜만이구나, 에릴로트.”

“네, 백부님. 잘 지내셨나요?”

“나야 뭐.”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화했지만, 머리는 맹렬하게 돌고 있었다.

‘그리미에 백부가 왜 왔지?’

그는 원래 황도에서 지내서, 장원에는 잘 내려오지 않는다.

가족 행사에나 종종 얼굴을 비출 뿐.

마침 딱 드뷔시 자작이 물어보았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부탁하신 게 있는데, 곤란한 일이라 아버님의 지혜를 빌리러 왔습니다.”

“곤란한 일이요?”

“이번에 아살론의 왕자가 교역을 위해 제국에 들어왔습니다.”

“아살론이라면 철광석 광산을 여럿 가진 나라가 아닙니까.”

“예. 폐하께서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에 철광석이 필요한데, 도통 거래 물량을 원하는 만큼 내주지 않아서요.”

할아버지가 그리미에 백부를 쳐다봤다.

“한데.”

“아살론 왕자가 데이몬드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

나는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귀를 왕만 하게 키웠다.

“데이몬드는 왜.”

“데이몬드가 7년 전에 정벌한 티고르국 말입니다.”

티고르국이면 멜론이다.

아빠가 멜론을 특산물로 가진 티고르국을 정벌해 온 덕분에 멜론을 배터지게 먹었다.

“아살론은 20년 전 티고르와의 전쟁에서 왕비를 잃었답니다. 모친의 원수를 갚아준 데이몬드를 꼭 좀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가신들이 기겁하며 난색을 보였다.

아빠가 그런 자리를 갈 리 없으니까.

공작위를 노리고선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쇠심줄 같은 구석이 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데이몬드 님의 전부가 여기 계시는데.”

드뷔시 자작이 나를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가신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리미에 백부도 날 쳐다봤다.

‘어떻게 할까.’

아빠가 싫은 일을 하게 하는 건 나도 싫지만…….

‘황도에 갈 기회는 많이 생기는 게 아닌데.’

관할령은 잘 키워서 내실을 다져놨다.

이제 슬슬 외부로 영향력을 키울 때였다.

‘게다가 나도 복권을 하나 긁어야 하고.’

나는 슬쩍 백부에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까요?”

“그래 주겠니?”

그리미에 백부가 기뻐했다.

* * *

며칠 후,

아빠는 흙 씹은 얼굴로 마차 앞에 섰다.

기다리고 있으니 할아버지와 그리미에 백부가 함께 나왔다.

“왔구나, 데이몬드. 에릴로트도 와줘서 고맙다.”

그리미에 백부는 나도 황도에 초대해줬다.

아마도 아빠의 목줄로 쓰려는 거 같았다.

‘나야 좋지만.’

황도에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미에 백부는 본인의 마차를 타고 출발하고,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가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짐칸에 실린 커다란 상자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저건 무엇이냐.”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그림?”

“네. 마음에 들어서 같은 화가의 그림을 몇 개 더 구입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황도의 미술상에게 보여주려고요.”

저게 그림이란 걸 빼면 전부 거짓말이다.

미술엔 코딱지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왜 그림을 들고 왔느냐고 하면…….

‘저건 황태후에게 줄 조커거든.’

황태후의 모친이 그린 그림말이다.

난 이번 기회에 묵혀놨던 조커를 쓸 생각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같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정말이지 고요한 공간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황도에 가는 건 처음이시죠?”

“그 전에 몇 번.”

“갈 때마다 난리가 났었지.”

할아버지가 매우 마뜩잖은 얼굴로 말했다.

“저를 결혼시키려고 그렇게 닦달만 하지 않으셨어도 소란은 없었을 텐데요. ……아버님.”

아빠는 창밖을 응시한 채 말했다.

아버지는 이제 할아버지를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몇 년 전에, 매일 ‘아빠’를 스무 번은 부르는 날 보고 사람들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빠라는 단어가 그리 좋으십니까?”

“녜.”

“어째서요?”

“아빠가 공잔미가 되면 이제 못 부르니까. 많이 불러나야지.”

그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아빠는 물었다.

“왜─! 왜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는 거지?”

“아빠두 하부지 공잔미라구 하자나요.”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데, 며칠 후부터 아빠는 할아버지를 노려보고 다녔다.

“이번엔 왜 또 난리냐.”

“…….”

“데이몬드.”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아…….”

“뭐?”

“아버…… 님.”

할아버지의 얼빠지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아지면 좋지, 뭐.’

초신속의 마차로 하루를 꼬박 달려서 우리는 황도에 도착했다.

그리미에 백부가 관리하는 저택은 아주 멋졌다.

좁은 땅에 있는 만큼 당연히 공작성이나 관할성과는 크기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뒤에 숲이 있다든지, 저택을 따라 인조 강이 흐른다든지…. 엄청나게 잘 꾸며놔서 위세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고용인들이 아주 친절했고, 내어준 귀빈룸은 공작성이나, 관할성과는 다른 맛으로 멋졌다.

“와, 예뻐요.”

“좋아해 주니 기쁘구나. 황도에는 아이들이 아주 많으니, 불러서 놀아도 괜찮단다. 내 주변에 아이들이 있는 자들에게 연락해 줄 테니—”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족히 일주일은 있어야 할 텐데. 심심하지 않을까?”

“네. 저는 지인을 만날 거라서요.”

“황도에 지인이 있어?”

“몇 년 전에 예절 수업을 하러 와주신 고날롱 부인과 편지하고 지내거든요. 오늘은 쉬고, 내일 만나 뵈러 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나는 그리미에 백부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등 뒤로 한지혁이 따라붙었다.

“넌 거짓말을 무슨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게 하냐.”

그는 이제 청소년에서 완전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이런저런 일로 써먹기 아주 제격이었다.

열 받는 화법이 여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입 다물게 할 방법은 있지.’

“모스코를 데려올 걸 그랬네.”

나이가 들어서도 3미터 거구의 사나이인 모스코에게는 꿈쩍도 못 했다.

한지혁이 움찔하며 속삭였다.

“모스코랑은 상극인 거 알잖아.”

“모스코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 다음엔 너와 목욕을 같이 하겠대.”

“가죽 벗겨질 일 있어?”

나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에게 지시했다.

“고날롱 부인에게 연락해.”

“뭐라고?”

“오늘이야말로 일전에 했던 부탁을 들어줄 차례라고. 그림도 잘 준비해놔.”

한지혁은 “어.”하고 대답하다가, 다른 하인이 지나가자 허리를 깊이 숙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가씨.”

나는 한지혁에게 인사받고서 방에 들어왔다.

아빠는 할아버지, 백부와 얘기하기 바빠서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침대에 앉은 나는 내 발밑의 그림자를 쳐다봤다.

“모르는 곳에 와서 무섭지?”

그러자 그림자가 일렁이며, 검은 연기가 튀어나왔다.

“미안. 일주일이면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그러면서 백경나무 피리를 불어주자 연기는 스스슷, 하고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이 애가 바로 최근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몬스터인 ‘옴브레’다.

겁이 많은 애긴 하지만, 그리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라서 달래기 어렵지 않다.

‘옴브레는 이 정도로 달래줬으면 됐고.’

그다음은 가호의 차례였다.

나는 가호를 활성화했다.

눈앞이 빛나며 커다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소설을 쳐다봤다.

<아빠는 세계관 최고 미남>

불운하게 살아온 데이몬드 아스트라.

난데없이 생긴 딸로 인해 변화한다?!

입양한 자식들과의 관계도 점점 개선되어 가는데…….

사랑스러운 딸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슈퍼 대디.

공작이 되어 자식의 미래를 수호하라!

#딸랑구덕질 #내사전에사위란없다 #과일지도제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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