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390)

60화.

옴브레를 보내고 난 뒤, 나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설마하니 오늘 밤에 당장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알리기오사 사람에겐 여긴 타국.

그것도 남의 집이다.

그런 데서 설마 왕손에게 무슨 짓을 할까.

옴브레를 보내둔 건 혹시 모른 예방 차원의 일이었다.

난 잠들 준비를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깨끗한 수건으로 뽀송뽀송하게 말렸다.

챱챱, 로션까지 야무지게 바르고 나서 잠옷을 입었다.

단추는 아래서부터 꼭꼭 잠근 난 뿌듯한 마음으로 거울을 봤다.

‘다 컸어.’

난 이제 단추도 잘 잠그는 어린이다.

크레파스를 쥐는 것도 어려웠던 세 살 때엔 항상 하녀들이 단추를 잠가줬다.

하지만 이제 난 단추는 물론 리본도 혼자서 잘 묶지.

꼭꼭 잘 잠근 단추를 흐뭇하게 보다가 침대로 향했다.

햇볕에 잘 말린 덕에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기를 얼마쯤.

막 잠들려는데,

덜컹덜컹덜컹─!!

서랍장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옴브레?’

나는 얼른 서랍장을 열었다.

그림자 속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옴브레가 보였다.

“왜, 옴브레?”

옴브레는 말을 못 하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덜컹덜컹!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자신만 보고 있으니 애가 탄다는 듯 그림자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마도 자신을 따라오라는 모양이다.

“알았어. 가자!”

곧장 방을 나섰다.

발바닥에 땀이 나게 복도를 달렸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잘 살펴봤다.

‘사람은 없어. 다행이다.’

행여나 아무런 일도 없는데 알리기오사 사람들의 숙소 쪽으로 드나들면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다.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밤이 늦기도 했고, 알리기오사 사람들과의 술 파티로 고용인들은 그쪽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심 좋은 1왕자는 가져온 술을 자신들을 접대하는 하인들에게도 나눠주었다.

그래서 고용인 휴게실에서는…….

“이때가 아니면 언제 알리기오사의 술을 마셔보겠어?!”

“알리기오사의 술이 그렇게 훌륭하다면서? 어디 나도 맛 좀 보자.”

“아,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알리기오사 산 위스키 구경으로 정신이 없었다.

아비노가 머무는 방 앞에서 옴브레가 빙글빙글 돌며 여기라고 알려주었다.

뛰어왔더니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약을 먹으면 몽롱하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독한 약을 먹으면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 쎄한 하인이 합쳐지면 말이 다르다.

만약에 하인이 먹인 약이 그냥 두통약이 아니었다면?

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니 움직인 것이었다.

내가 한 발짝 문으로 다가가자 옴브레가 내 발밑 그림자 안으로 쏙, 모습을 숨겼다.

문에 귀를 대자 아주 작게 소리가 들려왔다.

“……를……니까……세요.”

조그맣게 들리는 목소리.

하인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소리가 너무 안 들려.’

이렇게까지 방음이 철저하다니.

‘방음이 좋은 점은 내가 이용해 먹을 땐 좋았지만, 남이 이용해 먹을 땐 불편해.’

혹시나 싶어서, 열쇠 구멍에 눈을 딱 붙였다.

‘이런. 안 보여.’

몰래 훔쳐보는 게 베스트 플랜인데…….

‘에잇,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플랜 B로 가는 수밖에.

나는 심호흡하고 주먹을 야무지게 쥐었다.

그리고 두드렸다.

쾅! 쾅쾅!

그러면서 최대한 크게 외쳤다.

“왕손님! 몬스터를 보여드리러 왔어요! 아비노 왕손님!”

분명 안에서 목소리를 들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깨어있는 거 다 안다.

그런데 이렇게 한참 소리치는데도 아무도 안 나와봐?

보통이라면 습격일까 봐 무서워서라도 확인해보겠다.

소중한 왕손이지 않은가?

위험 요소는 확인하여 배제하는 게 맞다.

하인이 놀라서 기척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모른 체하는 것도 통할 때가 있고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더더욱.

‘이렇게까지 시치미를 뚝 뗀다?’

불안이 점점 더 커졌다.

난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없는 척 해봐라. 어림도 없지.’

나는 일부러 더 소란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아비노 왕손님! 에릴로트에요!”

쾅!

쾅쾅!

쾅쾅쾅!

“에—릴—로—트예요! 아—비—노 왕손님!”

내가 하도 소란을 떨자 복도 저편에서 하녀들이 달려왔다.

우리 공작성의 하녀들이었다.

“에릴로트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나한테 몬스터를 보여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으셔!”

공작성의 하녀들이다 보니 외부 귀빈의 일에 간섭하기는 쉽지는 않을 터.

하녀는 고민하다가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잠드신 게 아닐까요?”

“그치만 걱정되는걸. 사실 아까 정원에 있을 때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셨거든.”

“아……!”

하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럴 만했다.

만약 내 말을 무시했다가, 다음 날 아비노 왕손이 밤새 아픈 채로 방치되었다고 하면 이 모든 책임은 하녀가 뒤집어쓰게 된다.

내게 들은 게 없으면 모를까, 들은 후에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시늉이라도 해야 책임을 면할 수 있으니까.

나는 정말 걱정돼 죽겠다는 듯이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머리도 아프다고 하셨고, 멍하다고도 하셨고. 혹시 안에서 쓰러지셨으면 어떡하지? 만약 쓰러졌다가 바닥에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그렇다면 안 되지요.”

하녀는 내 걱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 말씀드리고 의사를 불러오겠─”

벌컥!

마치 우리 말을 안에서 듣고 있었다는 듯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무슨 소란입니까.”

아까 아비노에게 약을 먹어야 한다던 하인이다.

‘역시 눈빛이 좀 별로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탁하고 불손한 눈빛.

저런 놈들이 꼭 배신자더라.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비노 님은 뭘 하고 계시지?”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내게 꼭 깨워달라셨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여자는 배짱이지.

아비노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일단 지르고 보았다.

“겨우 잠드셨으니 내일 다시─”

하인이 눈을 부릅뜨며 내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말했다. 약간 초조한 기색이었다.

‘확실히 이상해.’

나는 아스트라 공작의 손녀딸이다.

그런 내게 이렇게 불손하게 구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역시 안 되겠어.’

휙, 나는 날쌔게 움직여 하인이 가린 문틈으로 쏙 뛰어 들어갔다.

“아가씨!”

공작성의 하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비노의 하인이 황급히 날 뒤쫓으며 내 팔을 잡아채려 했다.

“옴브레!”

발밑에 숨어있던 옴브레가 찰떡같이 내 명령을 알아들었다.

하인의 그림자로 쏙, 들어가서 바짓자락을 확 잡아당긴 것이다.

“악!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니 하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인이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사이, 나는 얼른 침실 쪽으로 뛰었다.

“아비노!”

아비노는 소파에 추욱, 널브러지듯 앉아있었다.

딱 봐도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입을 헤 벌리고 있고, 눈에 초점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몽유병이라고 하기엔 뭔가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다.

그건 바로—

“기억…… 하면 나쁜 애…….”

—최면이다.

약을 먹인다고 했던 건, 두통약이 아니라 최면제였던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도록.’

아비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야 뻔하다.

행방불명되었을 때의 기억.

‘저 하인이 아비노의 행방불명에 얽힌 거야. 아니면 행방불명에 가담한 사람의 명을 받았거나.’

나는 아비노의 몸을 흔들었다.

“아비노 님. 아비노 님!”

일어나.

최면에서 깨어나!

아비노를 흔들어 깨우려는데 억센 손이 내 목덜미를 확 끌어당겼다.

“윽!”

“감히 어떤 존체에 손을 대시는 겁니까!”

그때였다.

“그쪽이야말로 어느 귀하신 몸에 손을 대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상급 고용인이 되어 심플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힐다가 보였다.

문밖에 있던 하녀가 재빨리 힐다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하녀 언니, 완전 최고!’

아비노를 확인해야 한다는 내 말에 논리적인 허점이 없으니 들어주고, 상황이 커지자 바로 상급자를 불러오는 이 센스!

모든 사회인이 본받아야 할 자세다.

힐다의 뒤로는 마치 지원군처럼 다른 하녀들도 여럿이 붙어있었다.

하녀들은 알리기오사의 하인이 내 목을 덥석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아비노 왕손이 그랬어도 민감해질 일을 감히 하인이 저지르다니?

하녀들의 눈초리가 하나같이 매서웠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왕손께서 쉬시는데 떼거리로 몰려오다니요! 아스트라 가문의 손님 접대는 이런 식입니까?”

사람이 많아지자 당황한 하인이 우리 가문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바보야? 그 말이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걸 몰라?’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인이?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상황 판단이 이렇게 안 되나.

힐다는 크게 한 걸음 다가오며 외쳤다.

“왕손께 무례한 것을 따지는 알리기오사의 하인은 타국의 귀족에게 어찌 이리 무도합니까? 당장 아가씨를 내려놓으세요!”

힐다의 목소리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속에서 절로 손뼉이 쳐진다.

힐다, 너무 멋져!

내가 어릴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아비노는 이런 소란에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안…… 돼…… 나쁜, 아이…… 아니, 야…….”

‘불쌍하게도.’

아비노의 상태를 널리 알리는 편이 나았다.

“힐다, 할아버지를 모셔와! 아비노님이 최면에 당하셨어!”

“예?”

“칫!”

힐다는 깜짝 놀라 되물었고, 하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녀들이 황급히 움직이려 하자 하인이 버럭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날 인질로 삼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하인의 팔뚝을 콱, 깨물었다.

“아악!”

그가 놀란 사이 난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힐다 뒤에 있던 하녀 하나가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재빨리 뛰어나갔다.

“젠장! 이 계집애가!”

날 매섭게 노려본 그가 이를 악물었다.

잠시 주춤한 그는 황급히 아비노에게 향했다.

그러곤 아직 최면 상태에 빠진 아비노를 둘러업었다.

‘아, 죽이려는 건 아니구나.’

칼부터 들이미는 것은 아니라 일단 안심이 되긴 했으나, 최악만 면한 것이다.

상황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인은 아비노를 업고 창가로 달렸다.

“어딜 가!”

나는 얼른 그 뒤를 쫓았다.

오늘따라 뜀박질을 많이 해서인지, 평소보다 발이 느렸다.

이래서 평소에 운동 좀 열심히 해 놔야 하는데!

“꺼져!”

하인이 나를 향해 발차기했지만, 옴브레가 매달려있는 터라 정확히 맞추지 못했다.

“제기랄!”

욕설을 뱉은 하인은 아비노를 업은 채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얼른 호루라기 목걸이를 꺼냈다.

휘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라곤이 날아왔다.

라곤은 공작성에선 항상 내 주변에 있도록 대기시키고 있다.

게다가 낮에 정원에서 포도와 밥을 야무지게 챙겨 먹은 터라, 먹이를 구하러 가서 타이밍이 어긋나는 일도 없었다.

“라곤! 이리 와!”

나도 하인을 따라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라곤을 타고 싶긴 했지만 이런 일 때문에 타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라곤의 등 뒤에 올라타서 균형을 잡았다.

“저쪽이야!”

라곤의 털을 쥐고 왼쪽으로 당기자 라곤이 왼쪽으로 날아갔다.

라곤의 등에 올라타서 날았던 건 딱 한 번이었지만, 그 놀라운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마물을 조련하고 길들이는 게 정말정말 좋았다.

왜냐면.

“히익, 비, 비켜─! 이 몬스터─!”

하인이 기겁하며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그래봤자 무용지물이었다.

‘사람의 신체 능력은 절대로 마물을 따라갈 수 없거든.’

도망에 특화된 가호를 지닌 귀족이면 모를까, 일반인은 절대로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강철 까마귀는 그 육중한 무게와 튼튼한 강철 깃털에도 불구하고 보통 까마귀와 똑같은 속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날 수 있는 거다.

하인이 한참 전에 도망갔다고 해도 금세 잡혔을 텐데, 약간의 시간차 정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곤, 넘어뜨려!”

라곤은 평소 훈련 시킨 대로 움직였다.

하인의 머리 위로 날아서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발로 찍어누를 듯 위협했다.

“사, 살려줘! 히익!”

몸을 낮추며 기겁하던 하인의 다리가 꼬였다.

우당탕!

바닥에 넘어지면서 등에 업혀있던 아비노가 힘없이 튕겨 나갔다.

데굴데굴.

공처럼 굴러가는 작은 몸을 보자마자 나는 라곤의 등에서 뛰어내려 아비노에게 달려갔다.

“아비노!”

힘없는 몸을 부둥켜안았다.

‘크게 다친 데는 없어.’

주변에 푹신한 잔디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뭐, 그 점을 노리고 라곤에게 넘어뜨리라고 한 거지만.

내가 아비노를 살피고 있는 사이에, 넘어졌던 하인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계집─!”

절뚝거리는 꼴로 나를 위협하려는 게 우습다.

“어디 어린애한테 최면제나 먹이는 쓰레기가 사람한테 주둥이를 벌려? 쓰레기 냄새나게.”

“뭐라고?!”

덥석!

하인이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으윽.

이 자식은 화나면 손부터 나가네.

분명 폭력 전과가 있을 거야.

나는 피식 비웃듯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말하는데, 라곤은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100m 범위 안에 있는 인간은 다 먹어.”

너는 인간 사이에선 쓰레기지.

라곤에겐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다.

“뭐, 뭐라고?”

라곤을 부르려는 찰나.

쾅─!

굉음과 함께 하인이 바닥으로 납작하게 짓눌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게추가 하인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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