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390)

62화.

“뭐, 지금 뭐라고......!”

우당탕!

당황한 발데릭이 의자를 쳐서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다른 2세들도 경악했다.

뭐라고─!

총책임자?

말이 총책임자지, 이제 데이몬드가 대륙의 백수정 거래를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런 일이…….”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아스트라 사람들 쪽에서 난리가 났다.

평소 데이몬드가 다른 2세들과 친교를 다지지 않았다.

콩고물이 떨어질 일이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데이몬드가 총책임자가 되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왜 하필 데이몬드 오라버니가……!”

지금도 파죽지세로 땅따먹기를 하고 기세를 올리고 있는 데이몬드다.

이 상황에서 백수정 독점 거래의 공이 모두 데이몬드에게 간다면?

아스트라는 물론, 제국, 아니 이 대륙 내의 모든 나라가 백수정으로 인해 데이몬드에게 벌벌 떨게 될 것이다.

‘왜? 대체 왜?’

발데릭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데이몬드를 향한 분노와 열등감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놈이 한 게 뭐 있다고!’

그래서 다른 아스트라들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마구 뱉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하하, 벨레인 님. 형님은 군을 총괄하는 것만으로도 바쁘십니다.”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백수정 유통이라니, 그런 복잡한 상거래를 하실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아스트라엔 다른 훌륭한 인재들이 많으니─”

은근하게 데이몬드를 깎아내리는 말에 벨레인이 지그시 발데릭을 보았다.

움찔.

벨레인이 아비노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그는 강국의 제1왕자.

고작 발데릭 따위가 상대할 수 없는 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발데릭은 벨레인의 시선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나는 신의를 아는 자요.”

벨레인은 다시 데이몬드를 쳐다보았다.

데이몬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벨레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자신에게만 이득인 제안을 하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벨레인은 정말 순수한 호의와 감사의 표시를 한 것뿐이었다.

데이몬드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에릴로트에게.

“오늘 내 아들을 구해준 일은 결코 잊지 않겠소.”

“제 딸이 한 것이지,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벨레인은 미소 지었다.

자식의 공은 부모의 것이라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몬드는, 공은 온전히 딸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런 아버지니까 그런 딸이 나온 것이겠지.

그러니 아무도 몰랐던 아비노의 이상을 알아차린 것이다.

벨레인이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데이몬드에게 말했다.

“그런 딸을 둔 것도 그대의 복이오.”

“……제 딸이 복덩이인 건 맞는 말씀입니다.”

데이몬드는 벨레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릴로트는 자신에게 과분한 행운이니까.

발데릭은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쥐어뜯고 발광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게 무슨……! 고작 어린애들 사이의 일이잖아! 그걸 사업적인 문제로 끌어오면 어떡하자는 거야!’

대체 이게 어떤 건인데 이렇게 책임자를 정한단 말인가!

다른 2세들 표정도 좋지 않았다.

“…….”

데이몬드를 노려보는 2세들의 눈에는 부러움, 시기, 질투가 가득했다.

데이몬드가 예전부터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력에 한한 일이었다.

강하고 압도적인 무력.

그러나 데이몬드는 공작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산도 적어서 관할령을 다스리느라 허덕이는 신세였다.

그런데 전쟁에서 돌아온 후부터. 아니, 에릴로트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후부터 데이몬드의 위상이 시시각각 달라지게 된 것이다.

‘에릴로트. 그 아이가 뭐라고……!’

‘나도 그런 자식이 있으면 데이몬드만큼 할 수 있어!’

‘제기랄. 나도 평민에게서 딸을 봤어야 했나?’

2세들이 저마다 질투의 말을 삼키며 이를 갈고 있을 때.

디오네라의 모친인 바실레만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바실레는 디오네라가 에릴로트에 관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에릴로트는 신기한 애예요. 똑똑하고, 강하고, 멋지고……. 왠지 그 애라면 뭔가 대단한 걸 해낼 것 같아요. 이미 대단하지만요.”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듣는데.”

“어머니, 저는요…… 사실 혈족교육이 너무 싫었어요.”

“뭐라고?”

그런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딸이다.

당황스러움에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니, 딸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사촌들이 다 저를 무시하고, 까마귀라고 놀리고, 또 바보라고도 하고…….”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요…….”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있는 딸을 잘 키우기 위해 이 아스트라 장원에서 온갖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정작 그 딸의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디오네라…….”

“까마귀가 너무너무 싫었는데요. 몇 년 전에 에릴로트가 그러는 거예요.”

“…….”

“까마귀는 아스트라의 상징이라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주아주 강하고 멋진 거래요.”

“…….”

“그런 것도 모르는 사촌들이 오히려 바보라고 했어요.”

“…….”

“에릴로트의 제일 대단한 점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는 거예요. 에릴로트 옆에 있으면 저도 용감해지는 것 같아요!”

디오네라가 활짝 웃으며 했던 마지막 말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그래서요. 저 이제 까마귀가 아주 좋아요. 저 스스로도…… 좋고요…….”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소심한 딸이 변한 건, 에릴로트를 만나고 난 뒤부터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지만, 바실레의 눈에는 디오네라가 자신의 재능과 장기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딸이 달라졌고, 심지어는 이런 용기 있는 말까지 했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바실레는 에릴로트가 좋았다.

디오네라를 바꿔준 이유도 있지만, 그런 긍정적인 힘을 지닌 사람은 정말 드무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아버님의 반응인데.’

데이몬드와 아스트라 공작의 불화는 유명했다.

아스트라 공작이 에릴로트를 예뻐한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데이몬드와 공작 사이의 불화가 사라졌다는 말도 없었다.

‘싫어하시려나?’

그러나 바실레가 본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움찔움찔하는 입꼬리.

씰룩거리는 뺨.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풀어진 눈가.

‘아…….’

바실레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줄을 대놔야 할까.’

데이몬드가 아닌 에릴로트에게.

쿡쿡.

바실레는 기침하는 척 웃음을 터트리면서, 에릴로트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다.

* * *

며칠 뒤.

오늘은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떠나는 날이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아스트라의 직계들이 모두 배웅을 나왔다.

알리기오사 사람들의 선두에 선 벨레인 왕자와 아비노 왕손.

아비노 왕손은 나를 보며 그렁그렁,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했다.

납치 사건이 있었던 날.

벨레인 왕자는 차마 아비노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못하고 아들과 한 침대에서 잤다고 한다.

부부간에도 침대를 따로 쓰는 게 귀족인데, 벨레인 왕자가 얼마나 아비노를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날 아버지의 품에서 깨어난 아비노는 벨레인에게 직접 자조치종을 들었다.

그 뒤로 바로 내게 달려와서 고마움을 표했다.

“에릴로트!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 뒤로 벨레인은 아비노 곁을 떠나려 들지 않았고, 아비노는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졸졸졸.

나―아비노―벨레인

이렇게 우리 셋이 오리 행렬처럼 다니면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와서 내게 읍소하곤 했다.

“왕자님, 지금 일정이……!”

“확인해주셔야 할 것들이……!”

벨레인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나를 보고 호소했다.

꼭 우리 관할령 관료들처럼.

아니, 왜 어디나 이렇게 나한테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비노 님. 우리 둘이서 놀까요?”

“그래! 아버님, 이제 일하러 가세요.”

“아비노, 하지만…….”

“얼른요!”

“……그래. 알았다.”

내가 아비노에게 말하면, 아비노가 벨레인에게 말해서, 아랫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상황이 몇 번이나 연출되었다.

그렇게 웃기는 며칠이 지나가고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덥석.

아비노가 내 손을 잡았다.

‘얘는 우리 아빠랑 쌍둥이 눈빛이 무섭지도 않은 건가?’

벌써부터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역시 왕손이라 그런가.

다른 남자애들은 눈빛만 봐도 덜덜 떨던데 의외로 대범한 구석이 있었다.

아비노는 울망한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아, 또 까만 푸들 같아.’

“다시 볼 수 있지?”

동물에게 약한 난 귀여운 댕댕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다시 보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요.”

“꼭. 꼬옥! 다시 만나.”

꼭! 꼬오옥!

내 손을 간절히 잡고 눈을 빛내던 아비노는 괜찮은지 몰라도.

나는 이제 무서웠다.

‘이렇게까지 험악해진 건 처음이야.’

쌍둥이며 아빠의 표정이 너무 험악해져서 나는 슬쩍 손을 놓았다.

그리고 벨레인 왕자에게로 갔다.

“저, 벨레인 님.”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벨레인이 먼저 허리를 숙여서 시선을 맞춰 주었다.

나는 벨레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서 작게 말했다.

속닥속닥.

“하인이 최면제를 먹인 건 아비노 님의 기억을 지우려고 한 거잖아요.”

“그렇지.”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는 건…… 하인이 그 내전과 관련이 있던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이것까진 벨레인도 예상했을 거다.

그러나 내게는 비장의 한 수가 더 남아 있다.

“저희 하녀들이 그랬는데요. 성의 하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안주인이래요.”

“……!”

“약을 들키지 않게 들여오려면 행정처의 힘이 필요하고요.”

알겠지?

‘당신 새어머니랑 행정처장이 내전 관련 인물이란 거야.’

“아…….”

벨레인이 감탄과 고통이 섞인 신음을 흘렸다.

왕족의 고뇌와 번민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 좋은 웃음만이 남았다.

벨레인은 천성이 좋은 사람이건만, 너무 높은 자리에 있다 보니 괴로운 일을 많이 겪는 것 같다.

벨레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영애는 정말이지 날 몇 번이나 놀라게 하는지……. 그래, 유념해두마.”

나는 벨레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도움이 되길 바라요.”

악수를 푼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생긋 웃었다.

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벨레인의 문제다.

나는 다 줬다.

그렇게 다들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떠나려던 때.

벨레인이 고개를 돌려 아빠를 쳐다보았다.

“한데, 에릴로트 영애는 약혼자가 있소?”

아빠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주먹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고!’

행여나 무슨 짓을 할까 봐 바짝 긴장된다.

그래도 다행히 아빠는 조용히 대답만 했다.

“……없습니다.”

비록,

없. 습. 니. 다. ─하고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지만.

벨레인 왕자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비노도 옆에서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호오, 그래요.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문도 없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러자 아빠의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에릴로트의 인생에 약혼자란 없습니다.”

그 말에 벨레인이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아빠 얼굴에 익숙해진 내가 봐도 무시무시한데, 좋은 것만 보고 자란 벨레인 왕자는 어떻게 느낄까.

“아니…….”

벨레인이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오래 서서 시간을 보내면 쓰나. 조심히 가십시오.”

나는 당황했다.

알리기오사 왕자를 잡상인 쫓아내듯 내보내고 있었다.

아빠는 말리진 못할망정 거들고 있고…….

두 사람이 이렇게 쿵짝이 잘 맞는 건 처음 본다.

“가십시오.”

“아, 저 영애에게 인사하고 싶은데……!”

“마차가 오는군요.”

“영애…….”

“마—! 차─!”

아버지의 사자후 덕에 아비노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긴, 뭐 어때. 얻을 건 다 얻었는데.’

아빠와 할아버지가 벨레인에게 어떻게 굴던 간에 나는 그저 기뻤다.

벨레인과 아비노,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

아마 오고 갈 서류가 산처럼 쌓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 살 어린이니까 서류작업은 안 해도 되는걸?’

이게 바로 어린이의 장점이지.

아빠는 서류 지옥에 빠졌다.

앞, 뒤, 좌, 우에 온통 서류를 산처럼 쌓아두고 그 안에서 흐린 눈을 하는 중이다.

그 미친 서류 양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서류로 종이 비행기까지 접어서 날 가져다주라고 했을까.

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공작성을 쏘다녔다.

‘아빠가 백수정 유통의 총책임자가 되면 그 권력이 얼마나 달콤할까…….’

절로 앓는 한숨이 나왔다.

‘권력은 정말 최고야.’

아빠가 권력이 없다고요?

이젠 생겼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양 뺨을 가린 채 킥킥 웃었다.

며칠 후.

이번 연평가 시험의 1등이 발표되었다.

과연 1등은 누굴까?

‘누구겠어.’

반전 따윈 없다.

시험의 1등은 바로 에릴로트 아스트라.

당연히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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