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390)

71화.

“콘라드입니다.”

“들어와라.”

들어온 콘라드가 공작에게 급히 서한을 내밀었다.

“뭐냐.”

“올해 풍요제 장소가 아스트라 장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드뷔시 자작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딘가에서 챙그랑,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평화가 야무지게 깨지는 맑고 청아한 소리.

지옥 야근의 재 도래였다.

* * *

이튿날, 공작성.

“들었어? 이번 풍요제는 아스트라에서 한대.”

디오네라의 말에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풍요제?”

“응!”

황족들이 풍작을 기원하며 제를 올리는 것을 풍요제라고 한다.

해마다 풍요제를 지내는 장소는 다르다.

‘올해는 아스트라에서 한다고?’

의아한 일이었다.

원래 아스트라에서 풍요제를 지내는 건 달리아가 오고 난 뒤의 일이니까.

리앙틴이 턱을 괴며 말했다.

“좋은 일이네. 풍요제를 지낸 지역은 다음 해에 풍작이라니까.”

그거야 주로 농경으로 먹고사는 지역이나 그런 거지.

‘우리는 메인이 상업이라 그다지……. 어?’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움찔, 굳어졌다.

‘황족’들이 제단에 기도하러 우리 장원에 들려?

‘알렉시스!’

나는 황급히 노트를 덮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디오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쳐다봤다.

“에릴로트, 벌써 가려고?”

“응!”

디오네라는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다.

원래는 매일 같이 보다가, 내가 상급교육실로 올라간 뒤로는 고작해야 한 달에 두세 번 만나고 있었다.

그것도 수업 사이에 짬이 날 때야 가능했다.

리앙틴이 우울한 표정의 디오네라를 쿡 찔렀다.

“공부나 해. 저녁에 시험이 있잖아.”

“…….”

“이번에도 꼴찌면 다시 하급교육실로 내려가는 거 알지?”

디오네라가 입술을 삐죽이자, 리앙틴이 퍽! 책을 안겨줬다.

‘리앙틴이 디오네라를 꽤 잘 챙긴다니까.’

“네가 없으면 다른 애들이 나랑 조를 안 짜준단 말야!”

“그야 리앙틴의 가호는 실전 훈련에 도움이 안 되니까…….”

“뭐야?! 캬아악─!”

……뭐, 어쨌든.

서로 챙겨주는 건 좋지.

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봐.”

“그래.”

“응, 에릴로트! 잘 가!”

리앙틴과 디오네라에게 인사를 받고, 후다닥 교육실에서 빠져나왔다.

혹시나 해서 주머니에 넣어둔 통신석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통신이 오고 있다.

‘고날롱 부인이다!’

나는 주변을 살핀 후, 얼른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그런 후에야 통신을 연결했다.

[어찌합니까! 오셀리아 황비님께서 아스트라 장원에 가신답니다!]

고날롱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석에서 흘러나왔다.

“들었어요.”

[‘그 아이’는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게지요?]

“그렇게 해야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확인할 게 있어요.”

[뭐라고요?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또 저를 이용하시는 건가요……!]

“이번에 아지스 백작가에 투자하면─”

[일단 얘기는 들어보겠어요.]

태세 전환이 참 빠른 사람이다.

‘물론 빨라서 좋지만.’

“이번에 정확히 누가 오는 거예요? 황족들 중에선 오셀리아 황비님만 오시는 건가요?”

[오셀리아 황비님과 1황자님, 그리고 아나톨리 선황녀(선황의 딸, 황제의 누이동생)가 가십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망했다.’

황태후가 오길 바랐는데.

그래야 혹시라도 알렉시스랑 황비가 마주쳤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 오는 황족들 중에선 오셀리아 황비를 제재해 줄 사람이 없다.

“알겠어요. 계속 상황을 전달해주세요.”

[정말이지 얼마나 절 이용하실 생각인지. 그런데 아지스 백작가 이야기는 사실이겠죠?]

“제 정보가 틀린 적이 있었나요?”

[……없죠. 상황은 계속 전달 드릴게요.]

통신을 끊은 뒤, 나는 성을 나서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마차 대기소로 가지는 않는다.

‘왜냐면 지금의 내겐 이게 있으니까!’

<이동>의 가호석.

리시먼드가 줬다.

아스트라 장원 내라면 수백 번도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결계가 없는 제 2관문을 지나온 나는 <이동>의 가호석을 쥐었다.

그리고 마력을 흘려보내자…….

번쩍!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몸이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 초 뒤.

나는 이그리츠 용병단의 주둔지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는 여전히 감옥으로 보이네.’

감옥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치웠는데도 여전히 으스스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발을 디딘 곳에 나무뿌리가 깊게 박혀있었다.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으악! 코 깨진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확 잡아끌었다.

“넘어진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결 좋은 흑발.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나 보일 법한 푸르디 푸른색의 눈동자.

이제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어서 훌쩍 커진 키.

굵어진 선.

변성기가 지나서 낮아진 목소리.

……알렉시스였다.

“언제 왔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얘는 자기가 무슨 홍길동인 줄 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걸 보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동쪽에 있는 아난츠 해안에 갔다가, 서쪽에 있는 플롱 항구에 간다.

‘이렇게 움직이니까 내가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알렉시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방금.”

그 말에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

원래 이그리츠 용병단은 이번 주까지 검은 숲의 몬스터를 토벌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일찍 돌아왔다는 건…….

“결국 그 병이 올해도 터지고 말았구나.”

“그래, 칼리 단장의.”

“맞아, 그 지독한…….”

치질.

나는 이마를 짚었다.

단장 칼리의 영원한 동반자, 치질.

치질이 터지면 나을 때까지 3개월이고 4개월이고 눌러 앉아있어야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용병단의 도움은 못 받겠는데.’

용병단 최대 전력인 칼리 단장이 누워있으니.

그 몸 상태로 나서는 건 오히려 방해나 될 거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알렉시스가 물었다.

“왜?”

“…….”

잠시 황비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게 알렉시스한테도 티가 났나 보다.

알렉시스의 얼굴이 한껏 뚱해졌다.

“또 보호하려는 표정.”

난 흠칫했다.

‘정말 귀신이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곤 말해줬다.

“황비가 올 거야.”

“그래.”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황비가 온다니까.”

“들었어.”

“안 무서워?”

“별로.”

아기일 땐 그렇게 겁먹더니?

나는 알렉시스의 나이를 셈해봤다.

나랑 4살 차이니까, 지금이…… 14살.

‘아직 중2병 오려면 1년 남았는데?’

중2병도 안 왔는데, 웬 허세람.

어릴 때는 황비에게 쫓기는 악몽을 자주 꿀 정도였으면서.

아닌 척해도 칼리 단장에게 들어서 다 알고 있다.

“정말로 안 무서워?”

“난 네 잔소리가 제일 무서워.”

알렉시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게 걱정을 해줘도.’

내가 오만상을 쓰자 알렉시스가 픽,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놀린 거지!”

말하자 알렉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날 놀릴 정도로 훌쩍 컸네.’

이 누나는 너무 기쁘다, 알렉시스.

“안 무서워도 잘 숨어있어.”

“그래.”

난 웃는 알렉시스 머리를 헝클어뜨렸고, 알렉시스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뚱해졌다.

* * *

시간이 흘러 한 달.

풍요제를 이틀 앞두고 황궁 마차가 아스트라 장원의 경계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스트라의 혈족들 모두 공작성에 모였다.

드뷔시 자작이 한 달 전보다 훨씬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물으니, 자작은 시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사직서를 낼 힘은 남아서 다행입니다.”

한 달을 내리 고생했다더니 사직서를 품고 다니나 보다.

나는 드뷔시 자작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아주세요…….”

“늙은이를 이렇게 부려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내가 얼른 손을 내저었을 때였다.

“에릴로트.”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리 나는 쪽으로 빙글, 돌아보니 아빠가 저 멀리서 성문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와…….’

성장(盛裝)한 아빠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본다.

정말로 근사했다.

아빠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으로 세 명의 오라버니들도 나란히 걸어왔다.

다들 오랜만의 행사라고 잘 차려입었네.

가르마를 살짝 내서 뒤로 가볍게 고정한 리시먼드.

부드러운 머릿결을 차분히 내려 정리한 요슈아.

한쪽으로 붉은 머리를 넘긴 발자크.

정말이지 근사한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모델처럼 긴 다리를 뽐내며 내게 다가왔다.

기둥 뒤에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하인과 고용인들은 “하아아…….” 신음하며 황홀한 눈빛으로 넷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오늘도 예쁘네, 에릴.”

요슈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발자크가 하품을 쩍 하며, 귀찮아 죽겠단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내 어깨에 턱을 걸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 지겨워.”

요슈아가 “치워.” 하며, 발자크의 얼굴을 밀었다.

“이게, 형한테.”

또 쌍둥이들 둘이 서로의 얼굴을 밀치며 다퉜다.

“그만 좀…….”

흐린 눈을 하며 말하자, 리시먼드가 요령 좋게 쌍둥이를 떼어놓았다.

‘음, 큰형이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쌍둥이가 투덕거릴 때마다 제압해줘서 아주 편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저 멀리서 황궁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황궁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고, 시종이 쪼르르 달려가 마차의 문을 활짝 열었다.

석양과도 같은 주홍빛의 머리칼.

푸른 눈.

입가에 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셀리아 황비다.’

그녀가 할아버지를 향해 사뿐사뿐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아스트라 공.”

“예. 무척이나.”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였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무시무시했다.

두 사람은 지금 1황자로 인해 한배를 탔다.

하지만 아군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관계였다.

이들은 서로를 철저히 이용하는 뱀들이었으니까.

그것도 틈을 보이면 상대방의 목에 독니를 박아 넣을 준비가 된 독사들이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어떤 소년이 황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황비와 같은 주홍빛 머리칼.

황족의 상징인 금안.

그것만으로도 소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1황자, 살바토레였다.

“평안하셨습니까, 아스트라 공.”

“예. 황자님도 별고 없으셨겠지요.”

“덕분에요.”

할아버지와 인사를 마친 황자가 고개를 돌려 스윽, 주위를 둘러봤다.

둘러보는 시선 중에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빠 옆에 붙어있던 날 보고 1황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가 에릴로트 아스트라일까.”

‘어떻게 알았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

내가 눈을 크게 홉뜨자 황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모르겠지만, 황도에선 널 아스트라의 장미라고 부르거든. 듣던 만큼 아름답네. 반가워. 살바토레 칼소이에야.”

1황자는 여유롭고, 예의 바른 느낌이 물씬 났다.

황제의 하나뿐인 자식인데도, 오만한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난 어이가 없고.

‘내숭은…….’

쟤는 엄청난 난봉꾼이다.

앞에서 예의 바른 척, 잘 자란 척하지만, 뒤에선 완전히 개망나니였다.

난 이전 삶에서 그런 그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때는 살바토레가 어떤 일로 아스트라 장원에서 머물고 있었다.

원래 달리아가 그를 수행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몸살에 걸려서 내가 나가게 되었다.

급하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터라 서둘러 준비해서 그에게 달려가야 했다.

그가 있다던 사교클럽에 시간을 겨우 맞춰 들어갔는데, 그는 약에 취해 하녀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셔츠의 단추는 다 풀어 헤치고서,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우뚝 굳어있으니, 그는 하녀를 품에 안은 채로 다가왔다.

“네가 아스트라에서 내돌려진 손주인가. 더러운 피라던.”

그러며 내 턱을 쥐고 이리저리 휙휙, 돌려봤다.

마치 물건 감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은 쓸만하구나. ……마음에 들어.”

나는 희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상황은 처음이었고, 약에 취한 그의 풀린 눈빛이 무섭기도 했다.

그때는 손발을 발발 떨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지금이었으면 귀싸대기를 날렸을 텐데.’

회상을 끝낸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살바토레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친절한 황자님 행세 중이었다.

“황태후 폐하의 티 살롱에 초대되었다고?”

“예. 겨울 티 살롱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요.”

“그래. 자주 보자.”

‘뭐래. 미래의 성희롱범 주제에.’

하지만 난 속을 능숙하게 감추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이에요!”

황비 쪽에는 2세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이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있던 찰나였다.

황궁 마차 한 대가 더 도착했다.

분홍색의 마차에서 내린 사람의 눈동자 또한 금안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분홍색 머리.

누가 봐도 나 곱게 자랐어요, 하는 느낌의 숙녀였다.

‘아나톨리 선황녀.’

선황제의 딸이자, 현황제의 누이동생이었다.

마부의 손을 잡고 내린 선황녀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 이 마차는 바꿔야겠어요. 의자는 딱딱하고, 요철 진동도 너무 잘 느껴져서─”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아스트라 혈족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런데.

‘엥?’

아빠를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술을 깨물고…….

누가 봐도 절절한 사연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여기가 드라마 속이었다면 슬픈 재회 BGM이 들려올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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