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 *
데이몬드 관할성.
선황녀는 결국 약속도 안 지키고, 나를 밤이 늦어서야 돌려보내 줬다.
아빠가 요새 뭘 좋아하냐느니.
혹시 아빠가 자신과 추억이 있는 붉은 튤립을 기억하고 있냐느니.
여전히 브로콜리를 싫어하시냐느니.
나는 소설에서도 이렇게까지 아빠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은 적이 없었다.
부랑자의 표정으로 방에 올라가자, 한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왜 멘탈이 박살 난 표정이야?”
“박살이 났으니까 그렇지.”
살다 살다 이런 강적은 처음 봐.
진짜 난생처음이었다.
“선황녀?”
한지혁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아?”
“너더러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면서.”
“……소문났어?”
“길가의 똥개도 알걸.”
그 얘기를 들은 게 한나절도 안 됐는데?
소문은 내가 관할성에 돌아오는 속도보다 빨랐다.
벌써 관할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니.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 같은 얘기니까 소문이 빠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빠가 왜 그렇게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알겠어.’
오래전부터 선황녀한테 시달렸겠지.
이민 가지 않았다니, 아빠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난 벌써 이민 가고 싶어졌어.’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아빠는 심지어 예전엔 한 성격 하지 않았던가.
나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지혁이 내 방 화병에 물을 갈아주며 말했다.
“네가 이 정도인데 선황녀는 아예 가루가 되었겠는데?”
“아니.”
“엥?”
한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한참 나를 보던 그는 “아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
묻자 그가 화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넌 정 주는 사람한텐 약하잖아. 봐줬구나 싶었지.”
“뭐라고?”
“다른 사람이 귀찮게 하면 얄짤없잖아. 그런데 호감에서 하는 일이면 대충 봐주는 것 같더라고.”
그랬나?
고민하는데 한지혁이 말을 이었다.
“하녀들 때도 그랬고.”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에릴로트, 넌 리앙틴 때도 그랬잖아. 처음엔 그쪽이 한 짓을 제대로 돌려줬다면서.”
“응.”
“그런데 지금은 유해졌지. 리앙틴이 네게 호감이 있으니까.”
그렇긴 하다.
리앙틴은 아닌 척해도 날 좋아하는 애라, 투덜거려도 밉지 않다.
“널 귀찮게 하고, 방해하는 선황녀에게도 그래서 모질게 못 구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네 성격에 가만두겠어?”
“음….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여기서 반전은 뭔지 알아?”
“뭐?”
“넌 네가 봐준 사람이 뒤통수를 때렸을 때 개무서워져.”
“…….”
“진짜야. 너 진짜 무서워. 진짜라니까. 진짜로 믿어도 좋아.”
한지혁이 어깨를 오르르 떨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치 너한테 하듯이 말이지?”
“어?”
난 호위대와 연결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코가 쾅, 쾅, 쾅!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예, 아가씨!”
“한이 훈련장에서 즐거웠나 봐. 모스코와 또 훈련하고 싶대.”
“그렇습니까?!”
모스코는 하하하! 하면서 “그런 건 내게 말하지 그랬어!” 하며 한지혁의 등짝을 두드렸다.
그냥 두드리는 건데 어디서 척추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나이들끼리 훈련으로 우정을 다져보자고! 하하하하하하!”
한지혁은 사색이 되어 끌려 나갔다.
‘까─불고 있어.’
난 히죽 웃었다.
* * *
아빠는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아주 살금살금 조용히 먹으며 이글이글한 아빠를 힐끔거렸다.
원래 조용한 리시먼드도.
둘이 붙여 두면 티격태격 은근히 시끄러운 쌍둥이도.
나까지도.
하지만 그것도 1, 2분이지.
결국 답답해진 우리는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미간이 저러다가 저 모양으로 굳어지겠어.”
“아나톨리 선황녀가 에릴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라 한 것 때문이지?”
“사실 에릴로트가 평민이 아니라 아버지와 선황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소문 때문이겠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더러운 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선황녀의 딸이었으면 그 고생을 했겠어?
‘그리고 난 우리 엄마가 좋은데.’
아빠와 엄마는 서로 뜻이 맞아서 나를 가졌지만, 아빠가 그랬다.
엄마는 나를 정말 정말 사랑했다고.
아빠처럼 나를 예상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서, 그 먼 곳에서 아스트라 령까지 나를 낳으러 왔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엄마가 좋았다.
나는 매체를 통해서 임산부가 얼마나 힘든지를 많이 보았다.
다리엔 피도 안 통하고, 발톱도 못 깎고, 불면증이나 식이장애가 생기고…….
내가 상상도 못 하는 몸 상태로 왔겠지.
또,
“에릴로트. 이 아이의 이름은 에릴로트라고 해주시오. 어미가 미안하다고, 너무나 미안하다고 전해주시오.”
내 진짜 가호인 <열람>으로 봤을 때의 엄마는 아주 간절한 표정이었다.
‘이름을 정해준 것도 엄마인가 봐.’
할아버지가 정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정한 것을 그대로 붙여준 모양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선황녀와 관련하여 왜 그런 소문을 내는지는 어제 겪어봐서 안다.
‘선황녀는, 어쩌면 그렇게 당사자는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는지.’
이런 소문이 돌면 나와 아빠가 곤란할 거라는 걱정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황궁에서 결혼을 추진 중이라는 소문 때문일 수도 있어.”
그놈의 소문이란.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눈앞에 있는 오믈렛을 포크로 푹푹 찍었다.
선황녀는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미친 자다.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남들이 다 듣는 장소에서 “너는 나를 어미처럼 여겨도 돼.” 라는 소리를 하는 거다.
아나톨리 선황녀 본인의 소문도 정말 어마어마했다.
황도에 잠시 들른 아버지를 보고 싶은데 준비가 덜 되어서 못 나간다고 궁인들이 막으니, 2층 방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선 물불 안 가리는 스타일인 것 같다.
‘진짜 방해된단 말이야.’
아빠를 좋아하면 아빠에게 가면 좋겠다.
괜히 나를 붙잡지 말고.
‘나를 베이비 메신저로 삼지 마!’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귀찮은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기왕 풍요제인데 뭐 하나라도 얻어가고 싶단 말이야.’
풍요제는 농업 중심 지역을 위한 행사다.
상업 중심인 우리 아스트라령에 그리 도움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내 판단이 어떻든 간에 이미 정해진 이상 풍요제는 진행이 될 거고, 그렇다면 빼먹을 건 쏙쏙 빼먹어야 한다.
실제로 이용해 먹을 건덕지도 많다.
‘가령 풍요제를 이용해서 먹자골목을 만든다든가.’
먹자골목은 내가 은근히 밀어주고 있는 관광사업이다.
‘괜히 지역마다 X로수길이나, X리단길을 만드는 게 아니란 말씀.’
그렇게 이미지를 잡아 두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관리가 이제 화려해진 데이몬드 관할령의 이미지에 맞지 않다고 결사반대 중이었다.
‘겉만 화려하면 뭐 해. 실속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데이몬드령은 현재 정벌해온 땅에서 세금을 걷어서, 국경 땅의 주민들에게 구휼 자금으로 쏟아붓는 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구수 자체가 적어서 인파랄 게 없으니 상업도 안 되고, 메마른 땅이라 농경도 안 되고.’
세금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은 자생해야 한다는 거다.
최소한 본인들의 힘으로 먹고살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한다.
‘풍요제는 좋은 물꼬가 되어줄 거야.’
풍요제 같은 규모 행사는 인근의 주민들을 모으게 된다.
같은 데이몬드 관할령 내 주민들뿐 아니라 다른 관할령 주민들이 많이 몰려오겠지.
‘팔 만한 상품을 개발하고 손이 남는 인력들을 지원해주면 좋겠지.’
노점상으로 재미 보게 하면, 아예 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길 터.
아예 풍요제가 치러지는 곳을 데이몬드 관할령의 랜드마크로 만들어서, 관광지로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
‘유혜민의 세계에선 아예 관광객으로만 먹고사는 나라도 있는데 말야.’
이번 풍요제로 실험해볼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을 구상해놨는데 선황녀에게만 붙들려 있어요─!
내가 답답해, 안 답답해?
‘하. 오늘도 공작성에 가야하고…….’
내가 가지 않으면 본인이 데이몬드 관할령에 오겠대서, 차라리 내가 간다고 했다.
‘지금도 소문이 이렇게 무성한데 아빠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엄마라고 생각하라는 말에 바로 내 출생이 바뀌는 소문이 생겼다.
만약 아빠랑 마주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환장 대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데이몬드 장군이 선황녀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리를 피했다며?
선황녀는 자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애절하게 호소하던걸.
하긴, 선황녀가 장군의 막내딸 에릴로트를 보겠다고 데이몬드 관할령까지 찾아왔다며.
이건 완전히……!
둘. 째. 각.
‘으악.’
사람들 입에서 아빠의 밤 생활이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물론 아빠가 얼마나 열받을지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거다.
지금이야 아빠가 사남매 육아를 하며 인내를 쪼─끔 길러서 그렇지.
원래였다면 사자처럼 날뛰었을 거다.
‘그냥 내가 가는 게 낫지.’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포크를 내려놨다.
“그럼 나는 공작성으로 가볼게.”
내 말에 삼형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이르게?”
“그래,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게다가 밥도 이렇게 남기고?”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빨리 갔다가 빨리 오려고.”
무엇보다 선황녀를 만나기 전에 콘라드와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고.
‘선황녀와 얽힌 소문을 좀 죽여놔야지.’
콘라드는 정보를 다루는 데엔 아주 뛰어나니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삼형제들과 속닥이는 것을 멈추고 아빠한테 다가가 공작성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무슨 말씀을, 나는 소문으로부터 아빠를 구해야 해!’
나는 부러 씩씩하게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나갈 채비를 재빨리 마치고 <이동>의 가호석을 발동시켰다.
* * *
빛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뜨니 공작성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위풍당당한 공작성 신관의 옆으로 호수와 숲이 보였다.
‘역시 순간이동이 최고라니까.’
<이동>의 가호석이 생긴 이후로, 나는 마차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음, 아직 좀 이르네.’
조간 회의(공작성의 아침 회의)가 끝나기 전이었다.
당연히 콘라드는 조간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콘라드를 기다리면서 시간 좀 죽여야겠다.’
마침 라곤에게 만들어준 둥지와 가까웠다.
라곤과 놀고 있으면 딱이겠다.
나는 소리 높여 라곤을 불렀다.
“라곤!”
카아아악─!
내 목소리에 화답하듯 멀리서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잘 먹고 잘 자고 있구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피리를 불었다.
휘익!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라곤이 오지 않았다.
‘뭐지?’
라곤은 아주 착한 애라서 내가 부르면 곧장 달려오곤 했는데.
“라곤? 라곤!”
계속 라곤을 부르며 소리쳤을 때였다.
“꺄아아악─! 살려줘! 몬스터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몬스터? 성엔 결계가 있어서 다른 몬스터는 못 들어오는데?’
라곤과 옴브레를 관할성으로 쉽게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결계에 가로막혀서 다른 곳까지 가지 못하니까.
‘……그럼 설마 라곤이?’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얼른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라곤의 모습이 보였다.
‘상태가 이상해!’
완전히 흉포해져서는 위협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라곤이 공격하는 상대는—
‘황궁에서 온 시녀인가?’
하얗게 질린 시녀는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라곤!”
애타게 라곤을 불렀지만, 라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라곤은 온순하고 상냥한 아이다.
내가 데리고 있는 몬스터 중에선 제일 인간 친화적이다.
몬스터들은 원래 인간은 모두 먹잇감으로 본다.
내가 길들인 아이들조차도 나 외에 다른 인간들은 전부 다 먹잇감으로 보았다.
그게 마물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라곤은 사람이 반경 100m안까지 다가가도 참을 줄 아는 의젓한 아이였다.
소심한 편인 옴브레도 사춘기가 오고 나서부터는 내 말을 번번이 어겼다.
하지만 라곤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내 말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었다.
‘내 목소리를 저렇게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싹 무시할 애가 아닌데!’
나는 다급하게 시녀 쪽으로 달려갔다.
“라곤! 하지 마!”
시녀의 앞을 막아서며 라곤에게 명령했지만, 라곤은 오히려 나까지 공격하려고 했다.
확장된 동공과 초점이 어긋한 시선.
완전히 이성을 잃고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녀는 목청이 터지도록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몬스터가 날 죽여요! 꺄야아아아악! 살려주세요!”
라곤은 그 소리에 더 자극받은 것인지 날개를 거칠게 움직였다.
“진정해, 라곤. 나야!”
캬아악! 캬악!
하지만 라곤은 더 흉포하게 푸드덕거리며 나를 공격하려고 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라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피리를 입에 물었다.
휘익!
“라곤. 착하지? 인간은 공격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우리는 계속 그렇게 약속해왔어. 기억해? 인간은 공격하는 게 아니야.”
라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낮춘 채,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나를 향해 부리를 찍으려던 라곤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