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390)

77화.

그랬다.

나는 한지혁이 구해온 양파를 반으로 뚝 잘라 눈에 비비곤 할아버지를 찾아간 것이다.

머리가 너무 차갑게 식어서 눈물도 안 나오지 뭐야.

‘양파라도 없었으면 정말…….’

눈물이 한 방울도 안 나왔을지 모른다.

이 정도는 원래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나는 한지혁이 준 차가운 손수건으로 눈가를 톡톡 닦았다.

“으, 눈알 빠지는 줄 알았어.”

“그래서? 네 할아버지가 넘어온 것 같아?”

누가 봐도 아카데미 수상 감의 열연이었는데, 당연하지.

누군가 내 연기를 보고 있었더라면, 아마 기립 박수 쳤을 것이다.

나는 공작가의 손녀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칼소이에 제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연극배우였을 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내 등을 툭, 툭, 하고 어색하게 두드릴 때는…….

그 마음이 전해져서 살짝 몰입도 됐다.

‘할아버지 손짓이 너무 어색해서 절로 눈물이 나긴 했어.’

할아버지는 손주를 처음 안아보셨을 테니까.

나도 모르게 얼굴까지 일그러뜨리고 오열했다.

‘마지막엔 거의 진심으로 울었어.’

이번 일로 보건대, 할아버지는 날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시니, 이 일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오해란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기도 했고.’

“응.”

내가 대답했다.

한지혁이 날 힐끔 하고 쳐다봤다.

잠깐 말하길 주저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네가 네 할아버지를 이용했다고 양심에 찔리진 마라. 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라고 말하는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뭐?”

“거짓 눈물로 네 할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괴로워하지 말란 얘기야.”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곤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가 범인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삼바 춤을 출 뻔했다.

속으로 ‘오예!’하고 쾌재를 부르고,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어도 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는데.

“안 괴로운데?”

당당한 나의 대답에 한지혁이 당황해서 말했다.

“뭐?”

얘는 내가 무섭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이제 보니까 좀 착하게 봤었나 보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한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할 거야. 눈물뿐이 아니라 피, 오장육부까지 전부 다.”

“…….”

“그래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절대 후회 안 해.”

“……왜?”

한지혁은 정말로 의아한 표정이었다.

난 주변을 살핀 후, 그를 쳐다봤다.

“태어나자마자 전쟁터 한복판이었어. 혈육임이 분명한 적이 갓난쟁이인 내게 저주를 내렸다고.”

“…….”

“할아버지에겐 나도 혈육이지만, 내 적도 혈육이야.”

“…….”

“혈육이라고 속이지 않고, 혈육이라서 모든 걸 공유한다고 하기엔 난 이미 산전수전을 너무 세게 겪은 어린이거든?”

할아버지는 이 전쟁의 심판이다.

그냥 심판도 아니고, 금관을 물려줄 심판 말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 심판이 승리를 선언하지 않으면 다 죽어.’

난 지킬 게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 연기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지혁이 내 말을 듣고 픽,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네 마음에 짐이 안 됐다면 다행이고.”

그러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기까지 했다.

“너 오빠처럼 굴 때마다 좀 그래.”

“재수 없다는 거야? 이게 걱정을 해줘도─!”

“손수건이나 좀 빨아와. 닦았는데 왜 계속 아픈 거야?”

나는 괜히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러곤 차가운 물이 적셔진 손수건을 아예 눈에 올렸다.

그러곤 꾹꾹 눌러대며 끙끙댔다.

열심히 양파를 비벼댔더니 눈 주변이 따끔따끔 쓰라렸다.

‘아파 죽겠네, 진짜.’

양파에 내 눈알을 모두 잃는 줄 알았다.

뭐, 그래도 건진 소득이 있었다.

“아빠가 저 때문에 아나톨리 선황녀님과 함께 계세요.”

“알고 있다.”

“저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

“그래서 말인데요. 딱 한 번만 제가 고집을 부리게 해주세요…….”

딱 한 번이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난 단 한 번도 나를 위한 고집을 부린 적이 없기에.

나는 할아버지의 시선에 고개를 떨구며 대답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꽤 오래 침묵했다.

혹시나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할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래.”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주에게서 반격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나는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을 쓰윽 닦아낸 뒤, 악동처럼 눈을 빛냈다.

* * *

다음 날.

아나톨리 황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또 아빠를 불러냈다.

둘은 정원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함께 차를 마셨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다정한 광경이었다.

아침부터 한껏 꾸미고 나온 아나톨리 황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입을 가려도 훤히 다 드러나는 황녀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내려올 줄 몰랐다.

그에 비해 아빠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황녀의 질문에 대답만 하고 있었다.

“차향이 어떠세요? 괜찮은가요?”

“예.”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다음엔 다즐링을 가져올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랍니다.”

“예.”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배를 빌려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함께 가주시겠지요? 폐하께 어떤 말을 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아서…….”

“예.”

황녀는 여봐란듯이 대놓고 다정함을 뽐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정원 속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보니까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이번에 두 분께서 잘 되실 수도 있겠는데.”

“암만 딸 때문이라지만, 저렇게 매일 같이 붙어있기는 힘들지.”

“사랑하는 남자 딸이라고 에릴로트 아가씨마저 품으려는 인품에 데이몬드 님이 마음을 열었을 수도…….”

─라고 말했다.

내 입장에선 기가 막힌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저게 바로 최근의 여론이니까.

공작성에서도 이렇게 쑥덕이는데, 밖이라고 다르겠는가?

이번엔 아빠와 아나톨리 선황녀가 잘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분명 아나톨리 선황녀가 발 빠르게 사교계에 흘렸겠지.’

그 소문을 말 옮기기 좋아하는 촉새들이 열심히 물어다 옮겼을 것이고.

정원 앞에서 쑥덕거리던 고용인들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빤히 그들을 쳐다보는 내 눈초리에 고용인들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저마다 갈 길을 갔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나는 3세들 가운데서도 할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손주였다.

서열에 민감한 고용인들 사이에선 당연히 유명한 일이다.

평소라면 내 앞에서 그렇게 떠들어 대고서 고개 숙이는 정도로 끝났을 리가 없다.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며 애원을 했겠지.

‘할아버지가 조용한 걸 보고 나한테서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지나가는 고용인들을 한번 흘깃, 봐주곤 정원 앞으로 갔다.

정원 앞에는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경비병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에릴로트가 왔다고 말씀드려.”

내 말을 들은 경비병은 곧장 선황녀에게 내 말을 전했다.

경비병의 보고를 받고 잠깐 침묵하던 선황녀는 곧 내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들어오렴~.”

다정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다들 들으라고 소리치는 게 뻔하지.’

가족 같은 모습을 연출하려고.

허락의 말이 떨어지고, 나는 정원의 테이블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아나톨리 선황녀님.”

치마를 그러쥐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래. 에릴로트가 무슨 일일까.”

아나톨리 선황녀는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놨다.

그러곤 턱을 괸 채로 날 보고 싱긋,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자세가 편해졌다.

원래라면 공작가 아들의 앞에서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아빠와 자신의 사이가 매우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선황녀의 행동을 깡그리 무시한 채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를 모시러 왔어요.”

그러곤 아빠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가 동공이 얇게 흔들리며 나를 쳐다봤다.

선황녀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아빠 앞이라 그런지 애써 웃어 보였다.

“어쩌지? 데이몬드 장군은 나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황제 폐하께 어떻게 하면 네 얘기를 잘 드릴 수 있을지 상의하고 있단다.”

항상 그렇게 말하고 아빠를 홀라당 불러갔지.

안 그래도 다 지켜보고 있었다.

회의랍시고 또 아빠를 압박할까 봐 옴브레를 붙여놨기 때문이었다.

‘근데 회의하는 꼴은 보지도 못했다.’

그제는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었다고 종알종알.

어제는 자기 어린 시절 얘기하느라 종알종알.

오늘은 자기 주변인 험담을 종알종알.

아빠는 묵묵히 선황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선황녀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요.”

“……뭐?”

선황녀는 내 대답에 당황해서 말했다.

“저는 당당하니까요! 황궁에 가서도 잘 말할 생각이에요. 오해라고요. 그리고…….”

“…….”

나는 일부러 순진한 어린이인 척 또박또박 말했다.

“할아버지가 도와주실 거랬어요!”

할아버지.

네 글자를 또박또박 강조하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선황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 생각해도 아스트라 공작이 나서면 해결될 것 같지?’

너의 나쁜 짓이 다 밝혀질 것 같지?

나는 아빠 몰래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쿡, 비웃었다.

그리곤 아빠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빠, 가요.”

“에릴로트.”

아빠가 나를 달래듯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서, 눈썹을 한껏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제 속상한 거 싫어…….”

“…….”

“아빠도 내가 힘들면 속상하면서, 왜 아빠가 힘들면 난 속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인상을 쓰며, 아빠의 팔을 끌어당겼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같이 안 가면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하루 종일 쫄쫄 굶어서 쫄쫄이가 되어버릴 테야.”

“…….”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빠 없는 집은 싫어요.”

“…….”

아빠는 고집부리는 날 빤히 바라봤다.

그러곤, 시선을 옮겨 선황녀를 쳐다봤다.

“이만 가겠습니다.”

“장군!”

선황녀가 울컥, 소리쳤으나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말했다.

“딸이 쫄쫄이가 되어선 안 되니까.”

아빠는 언제나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내 고집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줬다.

어린아이의 슬픔을 얄팍하게 여기지 않고, 내 마음을 가장 먼저 생각해준다.

나는 아빠와 이마를 맞대고 킥킥 웃었다.

“가요.”

“그래.”

나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선황녀를 쳐다봤다.

‘열받아 죽겠다는 표정이네.’

너는 생각 회로가 정상인이 아니니까 이런 거에 질투할 줄 알았다.

그럼 이제 마음껏 날뛰어봐.

이 미친 여자야.

* * *

정원을 나오면서 아빠는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토닥 쓸어주었다.

반면에 난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안겨있었다.

정원을 벗어나서 한참 뒤.

인적 드문 곳에 이르러서 난 말했다.

“내려주세요.”

나는 아빠를 한 번 흘낏, 보고 말했다.

“왜?”

당황한 아빠가 다시 물었다.

“내릴래요.”

그러고선 허리를 조금 굽힌 아빠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아빠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식사하면서 얘기할까?”

뾰로통하게 있는 날 달래려는지 아빠가 무릎을 굽히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때, 멀리서 오빠 세 명이 나란히 다가왔다.

“찾았다.”

“에릴로트.”

“어디 갔었어?”

요새 세 사람은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부득불 날 쫓아왔다.

그리고 날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등 뒤에 사냥개 세 마리를 풀어놓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지.’

나는 오빠들 손을 잡았다.

먼저 달려온 리시먼드와 발자크의 손이었다.

그러고 아빠를 힐끔 돌아봤다.

“식사는 발자크 오라버니랑 할래요,”

쿵.

아빠가 머리 위로 바위가 쿵, 떨어진 것처럼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날 보았다.

당황한 아빠가 말했다.

“그럼 나와는 차를 마실까.”

“그건 요슈아 오라버니랑 마실래요.”

두 번째 쿵.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당혹에 물들었다.

“책을 읽어줄까.”

“리시먼드 오라버니랑 읽을래요.”

세 번째 쿵까지.

아빠는 3단 충격으로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라면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을 삼 형제가 나랑 아빠를 번갈아 보았다.

아빠가 나 때문에 아나톨리 선황녀에게 끌려다녔다는 걸 아니까.

삼 형제는 나와 아빠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빠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괜찮겠냐는 표정들이었다.

“에릴로트…….”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르며 슬픈 눈을 해서, 나도 자꾸만 입술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감정이 요동치면 오는 조연 페널티다.

이제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음이 괴로우니까 다시 나타난 모양이다.

“나도 슬픈데!”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아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빠 그러는 거 나 싫은데…….”

“…….”

아빠가 대답이 없어서 나도 결국엔 우물쭈물 말을 끝맺었다.

“내가 아빠를 구하겠다고 좋아하지 않는 남자애를 만나면 싫을 거잖아요.”

“그야 당연히─!”

아빠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단번에 대답했다.

“그것 봐.”

나를 지키려는 마음을 나도 왜 모르겠는가.

부모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태산 같던 자존심을 버린 아빠는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가.

‘나도 잘 알아.’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게 아빠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아빠는 앞으로도 언제나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면 똑같은 선택을 하리란 것도.

하지만.

“나는 아빠 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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