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빠가 굳어져서 나는 다시 힘을 주어 물어봤다.
“나는 아빠 짐이에요……?”
“그럴 리가!”
그게 무슨 말이냔 표정이었다.
오라버니들도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난 네 남자에게 금세 둘러싸였다.
나는 다정한 아빠의 눈빛을 보고 울컥하여 치맛자락을 말아쥐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수도 있었어요.”
“…….”
“아빠만 힘들면 된다고 생각해서 선황녀한테 가는 게 아니라.”
“…….”
“아빠가 나를 지키는 방식은 너무 슬퍼.”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아빠가 날 포옥 끌어안았다.
“그래. 알아, 에릴로트.”
“…….”
“그런 일을 지켜보게 해서 미안해. 좀 더 지혜로운 아비가 될게.”
“…….”
“노력할게.”
나는 아빠의 셔츠에 눈물 콧물을 다 묻히면서 엉엉 울었다.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세 살 때는 아빠를 찾으면서 울었지만, 지금은 우는 나를 다독여주는 아빠가 내 옆에 있다.
세 오라버니가 눈물 콧물을 쏙 빼며 우는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발자크는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맞아. 다른 대책을 강구할 수도 있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똑똑하게 얘기하지?”
나는 울다가 뜨끔하여 움찔, 어깨가 저절로 솟구쳤다.
그리곤 울다 말고 눈을 도로록 움직였다.
그리고 찾아낸 핑곗거리는.
“─라고 미켈란이 그랬어.”
훌쩍.
어린이처럼 콧물을 크게 훌쩍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아아.”
바보 같은 네 남자는 나의 어설픈 핑계를 듣고도 곧이곧대로 믿어준다.
‘애초에 날 의심할 생각이 없으니까.’
사촌들 중에 제일 똑똑한 요슈아도 내게는 그저 맹탕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바보 같은 네 남자들이 내 가족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한 번 더 크게 훌쩍이며 아빠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 * *
사흘 후.
데이몬드 관할령.
풍요제를 위해 아스트라 혈족들과 황족, 황실 제주원의 관료들이 제단에 올랐다.
이 풍요제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백성도 모였다.
제단이 설치된 트로칸 광장은 약 3천 명의 인원을 수용 가능했다.
제단을 준비한 신관이 오셀리아 황비를 향해 인사했다.
“광영을 누리소서.”
“제를 준비하느라 노고가 많았겠군.”
“아스트라의 풍요를 빌기 위해 먼 황도에서 걸음 하신 고귀한 분들만 하겠습니까.”
입바른 신관의 말에 황비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1황자 전하께서도 무탈하셨는지요.”
“아스트라에 있던 내내 몸살을 앓았어. 신심이 부족했던 걸까.”
“작은 몸에 깃든 신의 축복이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이었으면 몸살까지 앓으셨을까요.”
신관의 말에 흡족해진 황비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황비에게 인사를 전한 신관은 아나톨리에게도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나톨리는 흙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눈썹에 경련이 일어난 듯 꿈틀대며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제단 계단 아래의 데이몬드 부녀에게 꽂혀있었다.
아나톨리의 표정을 본 신관이 당황하자, 황비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아나톨리를 쳐다봤다.
“나라의 풍요를 비는 행사입니다. 표정 관리 정도는 하셔야지요.”
“언니!”
아나톨리는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왈칵, 소리쳤다.
데이몬드는 에릴로트가 정원에서 끌고 간 이후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황제가 에릴로트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갔어.’
아나톨리는 입술을 꽉꽉 짓씹으며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영악한 계집.’
어떻게 데이몬드와 가까워졌는데, 그걸 방해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나톨리는 황족들에게서 물러나서 시녀를 불렀다.
“준비는?”
“그게…….”
“되었느냐고 물었어.”
아나톨리가 살벌한 표정으로 시녀를 독촉했다.
“예…….”
아나톨리에게서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한 시녀는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을 들키면 큰일 날 것이 분명한데…….’
하지만 선황녀가 난리 치며 다그치니 시녀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녀는 은밀히 신의 화로로 다가갔다.
제사가 시작되면 불을 놓을 화로였다.
화로에 있는 지푸라기들을 걷어내고, 그 사이에 약초를 숨겨 넣었다.
지난번 라곤을 날뛰게 했던 바로 그 약초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아나톨리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공작성의 고용인을 돈으로 매수한 보람이 있었다.
지난번 강철 까마귀를 처리한 뒤, 저 약초는 폐기했었다.
다시 약초를 구했어야 했는데, 매수한 고용인이 꽤 솜씨가 좋았다.
구하기 어려운 약초인데도 며칠 만에 찾아주었으니까.
‘아스트라 령이기 때문이겠지.’
유통의 중심지인 덕에 귀한 약초도 쉽게 구했다.
물론 고용인을 매수한 건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작성의 고용인에게 에릴로트의 정보를 얻었다.
매수금이 웬만한 귀족들도 놀랄 금액이었으니, 술술 정보를 토해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릴로트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물과 관련된 정보는 없니?”
“음……. 라곤 외에 성 출입을 허가받은 마물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 있지?”
“특별한 마물이라 그림자 속에 숨어 산답니다. 아가씨는 절대로 몸에서 그 마물을 떨어뜨려 놓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이나 날뛰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이번엔 풍요제라는 커다란 행사에서.
아나톨리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뒤.
풍요제가 시작되었다.
* * *
발자크가 쩍, 하품하며 말했다.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야. 지루해 죽겠네.”
요슈아는 그런 발자크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제발 데이몬드 관할령의 체면을 생각하고 말해.”
그러자 리시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좋으니까 그만 좀 싸워라, 너희는.”
세 오라버니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풍요제를 버티고 있었다.
그야 두 시간이 넘도록 술을 따르고, 제단에 버리고, 따르고, 버리고…….
이제 술을 담는 저 은잔이 왜 그렇게 빛나는지 알겠다.
‘도금이었으면 다 벗겨졌을걸.’
같은 행동만 세 시간을 내리 반복하니 지루해 죽을 것 같을 수밖에.
차라리 주례사를 세 시간 듣는 게 낫겠다.
다른 직계들도 마찬가지로 힘든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지!
아, 아나톨리 언제까지 봐야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