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390)

80화.

빰빠밤빠밤─ 빰빠밤빠밤─ 빰!

귓가에서 팡파레가 터지며 신나는 음악이 흐르는 듯했다.

‘몸을 들썩이면 안 돼!’

그러나 내 귓가에는 수많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뿜뿜뿜!

나팔 부는 소리.

쩔그렁, 쩔그렁.

돈 들어오는 소리.

파라락, 파라라락.

지폐 세는 소리.

물욕으로 흥분한 마음 애써 진정시키며 엉덩이를 들썩거리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난 원래 어른이 주는 건 한 번 거절할 줄 아는 K어린이 출신이다.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해야지.

속으로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손을 내저었다.

아마 여기에 독심술사가 있다면 내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보고 어이 없어 할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폐하. 황족을 구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하셨어요. ……아버님이요!”

아이코.

황제가 내 말을 진심으로 받고 진짜 상을 안 주면 곤란한데─라고 생각하다가 아빠 올려치기를 잊을 뻔했다.

“네 아버지가?”

“네! 저희 아빠, 아버님이요!”

맞아.

우리 아빠가 이렇게 충심이 깊은 사람이야.

지금 당장 네 머릿속에 저장해.

빨리, 저장!

“데이몬드 아스트라…… 오늘따라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고 가는군.”

싱긋.

황제는 산뜻하게 웃었다.

아까 긴가민가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아까는 설마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면, 지금은 거의 믿는 것 같다.

‘한 80%정도? 와, 다 넘어왔네.’

“효심 깊은 그리미에보다는 데이몬드 쪽이 나와 뜻이 잘 맞겠구나.”

“그리미에 백부는 제가 잘 모르지만, 아버님은 그럴 거예요.”

맞아!

우리 아빠 완전 불꽃 불효자야!

그러니까 이름 꼭 기억해줘.

포도에 멜론에 복숭아 산지까지 다 정벌해다 줬는데!

아직도!

무공훈장 안준 거 꼭 떠올리구.

‘이제 자작위 주면 거절할거야. 최소 백작부터 줘야해.’

“그나저나, 과자를 제법 먹었구나. 그 과자가 맛있더냐?”

“전부 맛있어서 이거저거 다 먹어보고 있었답니다.”

“그래? 그러면 더 갖다주마. 시종장에게 말해둘테니 갈 때도 챙겨가거라.”

“네!”

황태후도 그러더니 황제도 집에 갈 때 과자를 챙겨주는구나.

‘내 불꽃 아부 덕인지, 황태후랑 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과자는 죄가 없으니까.

오도독오도독.

“잘먹는구나. 이것도 먹어보거라.”

오도독, 오도도독!

“차도 마셔야지. 옳지.”

‘뭐지……? 황제 앞에서 먹방 찍는 기분은?’

기분은 좀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는 그날 과자 쟁반을 다 비우고 양손에 과자를 잔뜩 받아서 황궁을 나왔다.

상사한테 아부 떨고 명절 선물 받은 기분이네!

* * *

두근두근.

콩닥콩닥.

인고의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오늘.

드디어 왔다.

‘무. 공. 훈. 장!’

황제의 명을 받은 궁인이 직접 아빠에게 무공훈장을 전해주러 왔다.

무공훈작 수여는 휘황찬란했다.

바닥에 금빛 카페트를 깔고, 옆에서 나팔을 부는 사람도 있고.

훈장 수여는 이미 예고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남매는 오늘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했다.

황궁에 갈 때보다 더 예쁘고 곱게 차려 입은 나는 아빠의 가슴에 훈장이 달리는 것을 아주 감동스럽게 지켜보았다.

훈장에 딸려 오는 건 뭐다?

작위.

작위는 내가 최소 뭐라고 했다?

다들 외쳐!

우리 아빠는 이제 백작님이다!

‘백. 작. 님!’

무공훈장을 재킷 가슴팍에 단 아빠를 보고 우리 4남매는 만세를 불렀다.

“백작님 만세!”

“아스트라 백작님!”

“데이몬드 백작님!”

“만세, 만세!”

까르륵. 까르르륵.

아빠의 드넓은 가슴팍에서 번쩍이는 훈장은 존재감이 대단했다.

이제야 아빠의 가슴팍에 안착한 훈장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긴 밀당 끝에 찾아온 너. 무공훈장.’

“그렇게 좋으냐.”

아빠가 묻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축하해요, 아빠!”

“그래.”

아빠가 팔을 벌리자 내가 제일 먼저 답삭 아빠 품에 안겼다.

그러자 삼 형제들도 슬금슬금 아빠의 품으로 들어왔다.

민망해하면서도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우리 오빠들이 참 착하단 말이야.

와락.

와락와락!

“으윽!”

앞에는 딱딱한 아빠 가슴, 뒤로는 세 명의 오빠들 때문에 꼭 벽 사이에 낀 것 같았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듯 좋았다.

이제 아버지도 대귀족 라인에 입성했다.

중앙 귀족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 * *

중앙 귀족은 왜 중앙 귀족일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황궁 반경 안에 저택이 있어서 중앙 귀족이라는 말이 생겼으니까.’

중앙 귀족이라는 이름의 이유이자, 중앙 귀족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바로 이것이다.

바로 황궁 반경 20km 안에 저택 한 채를 매입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중앙 귀족이 된다고 저택을 공짜로 주는 건 절대 아니며, 그저 매입할 권리를 주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대단한 권리이자 특혜이다.

이 지역의 저택은 돈이 있다고 아무나 살 수 없는 어떤 상징이니까.

제한된 공간은 폐쇄성과 결속력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중앙 귀족이 갖고 있는 특권이다.

황궁 반경 20km 안의 구역.

이 구역을 1구역이라고 한다.

1구역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이야기들은 웬만해선 기사화되지도 않는다.

소문조차 1구역 내 귀족들 사이에서만 퍼진다.

1구역 거주 귀족들은 1구역에 입성하지 못한 귀족들을 은연중에 비웃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스트라 공작가도 이 1구역에 저택이 있다.

‘물론 우리 거는 아니지.’

할아버지가 그리미에 백부에게 맡겨놓은 곳이니까.

이미 중앙에 집 한 채가 있기 때문에 아스트라의 다른 친척들을 1구역 안에 집을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미 한 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가능하지!’

아빠가 백작이 되었으니까.

다시 한 번 외쳐.

백. 작. 님!

아스트라 장원에서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올라온 우리 가족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우리 집을 구경했다.

고즈넉하게 꾸며진 저택의 정원도 마음에 들고.

햇볕이 아스라이 들어오는 복도도 마음에 들었으며.

우리가 올 걸 알고 미리 깔끔하게 청소된 저택 내부도 마음에 들었다.

‘따라라닷, 따~ 따라라라~’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미켈란이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저택 후보들.

그중에서 내가 이 저택을 최종 선택했다.

왜냐면…….

“미켈란 여기가 선황제의 비밀 사저였다는 게 확실해?”

“예. 선황비께만 은밀히 말씀하신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 미켈란은 정말 최고야!”

나는 미켈란에게 들어서 여기가 선황제의 비밀 사저라는 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황제의 비밀 사저라니.

비밀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무엇이냐.

집에 숨겨놓은 것들이 많으니 비밀인 것이다.

‘현황제도 선황제의 개인 재산이 얼만큼인지 몰랐다지?’

선황제는 자기 자식들도 믿지 않았다.

오로지 돈과 철저한 보안만을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 비밀 사저 말고도 선황제의 재산은 여기저기 은닉되어 있지만 그저 비밀 속에 갇혀 있다고 한다.

현황제도 못 찾은 그 비밀 사저.

이제 이 비밀 사저는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파볼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집 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비밀 금고가 있을 것 같은 장소를 찾아내었다.

콩콩콩.

주변의 벽과 비교해서 두드려 보기도 하고.

쿵쿵쿵.

바닥을 뛰어 보기도 했다.

‘어쩌면 여기야.’

아니, 어쩌면이 아니야.

내 모든 직감이 말하고 있어. 여기가 확실해!

나는 아빠를 불렀다.

이 집이 내 거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아빠 거니까.

그치만 뭐.

아빠 게 내 거지.

“아빠.”

“그래.”

“우리 집이요, 인테리어 공사를 좀 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도 충분히 멋지지만, 우리가 1구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광고할 필요가 있…….”

─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빠와 3형제가 모두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 너무 똑똑하게 말했어.

물론 나는 똑똑한 열 살이지만, 가족 앞에서 너무 똑똑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얼른 정정했다.

“……다고 미켈란이 그랬어요.”

“미켈란이?”

미켈란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아빠에게 당황했다.

“아……. 예, 제가 알려드렸죠.”

“미켈란은 유능하고 엄청 똑똑하니까!”

“그래.”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미켈란에게 말했다.

“금액은 상관하지 마라. 우리가 살 집이니까.”

허억. 인테리어 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말은 정말 위험한 말이다.

정말 돈X랄을 해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거든!

하지만 우리 아빠는 저런 말을 감당할 능력이 있으시다.

백수정 유통 마진으로 우리는 백작 가문이 되기도 전에 재벌급 자산가였으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만,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니 좋은 업자들로 알아봐라.”

“예, 각하.”

미켈란이 아빠에게서 수표책을 받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각하……! 크으, 너무 달콤한 호칭이야.’

이제 아빠는 각하다.

백작님이니까.

각하는 자작한테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아빠가 백작이니까, 나는 아스트라 백작 영애지!

‘이제 누가 날더러 아스트라의 더러운 피라고 할 거야?’

물론 이전에도 우리 오빠들 때문에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무서워서 못 말하는 것과, 내가 백작 영애가 되어서 말하지 못하는 건 다르니까.

히죽히죽.

키득키득.

악당같이 웃고 있는데, 발자크가 물었다.

“로티, 너는 무슨 방을 쓸 거야? 2층 가운데 방? 창가 방?”

“음.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집을 그렇게 돌아다니더니 방도 안 골랐어? 나는 네 옆 방 쓰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야. 에릴로트의 옆 방은 나야.”

요슈아가 끼어들자 리시먼드도 슬그머니 다가왔다.

“내가 장남이니까.”

삼 형제가 잠시 신경전을 벌일 동안.

미켈란이 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도도, 달려가자 미켈란이 뭔가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 제가 가려고 했는데요.”

“괜찮아. 나도 오빠들 싸우는 거 지겨워서 나왔어. 그건 뭐야?”

“백합 정원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이제 막 이사 온 집에서 이런 건 어떻게 바로 꺼내왔는지.

반짝반짝한 은쟁반은 미켈란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척도처럼 보였다.

미켈란은 은쟁반에 초대장을 담아 내게 건넸다.

초대장을 봉한 실링 왁스부터 백합 문양이다.

바스락.

왁스를 조심히 떼어내고 봉투를 열자 안에서 향긋한 백합 향기가 흘러 나왔다.

‘백합 정원이라.’

백합 정원이라면 아주 유명한 모임이다.

중앙 귀족의 딸들 중 미성년자들만 참석할 수 있는, 한 달에 딱 한 번 열리는 파티.

이렇게 우리가 저택에 들어온 날에 딱 초대장이 왔다는 건, 많은 중앙 귀족들이 우리에게 주목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아마 아빠가 무공훈장과 백작위를 받고 미켈란이 1구역에 저택을 구하러 다닐 때부터 우리가 언제 저택에 들어오는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을 터.

‘재밌네.’

후후후.

나도 모르게 흑막의 딸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러면 안 되지. 나는 주인공이니까!’

“참석하시겠습니까?”

미켈란의 말에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물론이지!”

백합 정원은 중앙 귀족의 영양들만 참석할 수 있는 인맥의 밭인데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파티라면, 파트너가 있어야 하잖아?”

“맞습니다.”

“어쩌지. 나는 중앙에 아는 영식이 하나도 없는데.”

“아뇨. 형제들과도 많이들 참석하십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뭐 걱정 없지.

나는 오빠가 셋이나 있으니.

‘파트너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네.’

그런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켈란과 대화를 하던 나는, 오빠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에릴로트 옆 방은 내 거야!”

“바보냐? 왼쪽 방, 오른쪽 방. 이렇게 두 개잖아. 그러니까 너만 포기하면 나와 리시먼드 형님이…….”

“나는 포기할 생각 없어.”

‘…….’

아직도 방 가지고 싸우네.

그렇지만…… 내 파티 파트너 가지고 싸우진 않겠지?

그렇게 나는 미켈란과 대화를 하느라 오빠들의 싸움을 애써 모른 척했다.

우리 오빠들이 그렇게 유치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나의 패착이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

─앞으로 백합 정원이 열리는 한 달에 한 번마다, 에릴로트 파트너배 데이몬드 3공자의 처절한 혈투가 벌어질 미래를.

이것이 바로 역사에 기록된, 백합 정원 깽판 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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